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57)
로판 속 공무원 457화(458/945)
수프에 찍은 빵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카페에서 있었던 폭풍 같은 사건 이후로 정신도 멍하고 식욕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갑자기 끼니를 건너뛴다고 하면 걱정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특히 주방은 자신들이 뭔가 실수를 했나 필사적으로 과거를 되짚겠지.
물론 주방의 사용인들에게는 언제나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 괜한 오해를 하지 않게 저녁 식사는 간단하게 방으로 보내달라 한 거고.
‘미치겠네.’
아직 반이나 남은 음식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주방의 솜씨는 뛰어나지만, 훌륭한 식사로도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사실 먹는 걸로 진정될 감정이었다면 그 카페에서 해결하고 왔겠지만.
‘농담… 은 아니야.’
순간 세라와 제노비아 누나가 농담을 한 건 아닐까─ 하는 현실 도피까지 생각이 닿았으나 금방 머리에서 털어냈다.
아무리 당황스러워도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된다. 용기를 내서 고백했을 텐데 그걸 농담으로 치부해? 그건 예의가 아니야. 상대가 진지하게 마음을 보였으니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애초에 나도 누군가를 사랑했던 적이 있잖아. 고백도 하지 못하고 끝난 짝사랑이지만, 그렇기에 둘이 얼마나 큰 용기를 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좋아해, 에리히. 이렇게 말하면 오해할 테니 확실히 말할게. 누나로서 동생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여자로서 에리히라는 남자를 사랑해.”
“나, 나도 옛날부터 사랑했어.”
직설적인 고백이 다시 떠오르자 절로 침음이 나왔다.
나도 둘을 좋아하기는 한다. 세라는 같은 영지에서 지내는 소꿉친구로서, 누나는 같은 제국백 가문의 소꿉친구로서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성을 향한 감정이냐고 하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난 그 둘을 이성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친구로서는 너무도 소중한 존재지만, 그렇기에 친구를 넘어선 존재로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왜 몰랐던 거지?’
이제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이 다시 나왔다. 차라리 최근부터 나에게 좋은 감정을 품었다면 모를까, 아주 옛날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한다.
전혀 몰랐다. 그렇게 친한 친구처럼 지냈으면서, 내 인생에서 가족과 사용인들 다음으로 자주 만난 사이면서 그걸 몰랐다.
‘나만 몰랐어.’
만약 둘이 철저하게 마음을 숨긴 거라 눈치채지 못한 거면 변명할 여지라도 있다. 그러나 그조차도 아니었다.
“잘 다녀왔니?”
“아, 예.”
“그래, 방에서 푹 쉬렴. 머리가 복잡할수록 느긋하게 결정하는 게 좋단다.”
성에 돌아오자마자 다 안다는 듯 등을 토닥여줬던 어머니, 어머니 옆에 서서 연신 고개를 끄덕인 유모.심지어 방으로 가면서 만나는 사용인들마저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뒤에서 수군거리기 바빴다.
그래,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다. 제노비아 누나는 우리 영지에 온 적이 거의 없었으니 예외로 둔 다 쳐도, 세라의 마음은 성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만 빼고.
‘아니야.’
끈적한 자괴감에 잡아먹히려는 찰나, 유일한 광명이 생각났다.
형, 형이 있다. 형이라면 나처럼 모를 수도 있다. 예비 형수님들에게 연이은 고백을 받았을 때, 다 같이 결혼하면 전부 첫 번째니 뭐니 하는 미친 소리를 한 형이지 않나. 그랬던 형이 나보다 눈치가 좋을 것 같지는 않다.
떨리는 손으로 통신구를 잡았다. 나처럼 세라와 누나의 마음을 모르는 형이라면 솔직하게 조언을 구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와! 도련님은 상대의 마음도 못 알아봤으면서 혼자 결정도 못 하는 머저리군요!’ 같은 눈치나 받겠지만, 형이라면 같이 놀란 뒤에 조언을 줄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믿음이 무너졌다.
– 알고 있었는데?
“어?”
심드렁한 형의 대답에 멍하니 반문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걸 형이 왜 알아.
그런 내 반응에 형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 네가 리제 좋아하는 것도 말하기 전에 알고 있었는데, 그 정도야 금방 알지.
그 말에 숨이 턱 막히면서도 납득했다. 확실히 막 제과 동아리를 만들었을 무렵, 루이제에게 반했던 걸 형이 먼저 알아차렸었지.
– 그리고 옆에서 그렇게 티를 냈는데 모를 수가 있겠냐. 동아리에서도 너 빼고 다 알고 있었어.
이어지는 말을 듣자마자 부원들의 얼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인테르, 류티스, 라테르, 타니안─ 걔네들도 알고 있었다고?
‘내가 걔네들보다 못한 놈이라고?’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자괴감과 절망이 찾아왔다. 지금까지 나나 그것들이나 고만고만하게 못난 놈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중 제일가는 밑바닥이 나였다. 신분이 밑바닥이라고 눈치까지 밑바닥일 줄은 몰랐지.
– 그래도 연락한 걸 보면 고백은 제대로 받은 모양이네. 혹시 부끄럽다고 미루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그 와중에 형이 세라와 누나의 등을 떠밀었다는 듯한 발언이 나와 울컥했으나, 도로 감정을 가라앉혔다.
항의하면 뭐가 달라지겠나. 아무리 형이 떠밀었어도 나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은 건 그 둘의 자발적인 감정이잖아. 게다가 형이 나설 정도면 형이 보기에 너무 답답했다는 의미겠지.
애초에 언젠가는 생길 일이었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겪는 게 좋기도 하고.
“형.”
– 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론 빨리 겪는다고 빨리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천천히 고민하고 말해줘도 된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머리가 복잡해.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막막한 심정에 형에게 푸념 아닌 푸념을 했다.
차라리 아예 모르던 사람에게 고백을 받은 거라면 이렇게 혼란스럽지 않았을 거다. 그냥 마음은 고맙지만 난 아직 연애나 결혼에 뜻이 없다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사양할 수 있으니.
허나 그 둘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누구보다 친하고,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마음이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기도 두렵고, 여지를 주는 것도 미안하다.
내가 생각해도 이도 저도 아닌 생각이다. 고백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사이가 어색해지더라도, 미움을 받더라도 거절하는 게 맞다. 그게 이성적으로 맞는 행동이다.
“어떻게 하는 게 정답일까?”
내 말에 형은 침묵을 지켰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정신이 돌아왔다. 신혼인 사람한테 일방적으로 연락을 걸어서 일방적인 연애 상담을 하다니, 너무 민폐인 행동이잖아.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 정답이 어디 있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급하게 내저었던 손이 우뚝 멈첬다.
–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걔네가 천천히 고민해도 된다 말했다고. 그런데 왜 그리 서둘러? 빨리 대답 안 하면 2등분으로 나눠 가지겠대?
“그건 아닌데…”
– 그럼 천천히 생각해. 당장 답을 구할 수 없는데 답을 찾으려 하니 복잡할 수밖에.
목소리는 여전히 심드렁했지만 친절히 조언을 해주는 형의 모습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이게 경험자의, 무려 여섯이나 되는 연인을 가진 사람의 품격이구나. 역시 형은 동생보다 모든 분야에서 우월한 존재구나.
“형.”
– 또 왜.
그런 형에게 존경과 경외의 감정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결혼하면 전부 첫 번째라고 말했을 때, 미쳤다고 해서 미안해.”
내가 어리석었다. 형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텐─
– 닥쳐.
“응.”
단호한 대답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동시 결혼은 미쳤던 발언이 맞지. 그때는 형도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
통신구를 품 속에 집어넣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망할 놈.’
잘나가다가 갑자기 흑역사를 꺼내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인지. 통신구 너머가 아니라 눈앞에 있었다면 주먹으로 하늘 베기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이다. 세라랑 제노비아가 제대로 고백은 했으니까. 만약 옛날 로맨스 코미디처럼 고백을 하려니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고, 유야무야 고백이 다음으로 밀리면 어쩌나 진지하게 걱정했었는데.
‘그 정도로 세상이 방해하지는 않는 모양이네.’
사실 이게 정상이다. 끔찍한 눈치를 가진 걸로도 세상의 저주나 마찬가지인데, 고백조차 이루어지지 못해? 그건 에넨이 에리히의 자손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 어떻게 하는 게 정답일까?
에리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둘의 고백이 성공한 것도 다행이지만, 에리히가그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도 고무적인 일이다.
당장은 혼란스러울 수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세라랑 제노비아는 뭐 태어날 때부터 에리히를 좋아했겠나. 그 둘도 친구로서 에리히를 대하다가 이성으로 보게 되고, 그 감정이 사랑으로 변한 거겠지.
그러니 이번에는 에리히가 그 루트를 밟을 차례다. 고백을 받았으니 더 이상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인식하게 될 테고, 그 인식이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다.
“잘됐어요?”
“아, 응.”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마르가 다가와 묻길래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었으니 잘 된 건 맞다. 그저 결과가 우리의 계획 밖의 문제일 뿐.
‘이제 하늘에 맡기자.’
나는 정말,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이보다 더한 도움을 주려면 북방 영주들을 불러 에리히를 납치하고 강제로 결혼시킬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러고도 이어지지 못하면 그건 운명이다. 겸허히 받아들여야겠지.
그렇게 에리히의 상담과 유모의 감사 문자를 받고 며칠 후.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제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한동안 잊고 있던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이 찾아왔다.
‘이런 사람도 있었지…’
민망하다. 원수 같은 동생의 옆구리를 챙기느라 진짜 잊고 있었다.
“에넨과 대제께서 가호하셨는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기쁜 소식이로군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답변을 하자 추기경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추기경은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모습을 감췄었다.그런 추기경이 다시 찾아왔다는 건─
“그런 형제님께 더욱 기쁜 소식을 드릴 수 있어서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신성교국 내부에서 시성에 관한 논의가 끝난 모양이다.
그것도 제법 긍정적인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