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58)
로판 속 공무원 458화(459/945)
바람처럼 나타난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은 떠날 때도 바람처럼 사라질 생각인지, 아무 망설임 없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두 분을 복자의 반열에 시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시성성 성장으로서 합당하다 판단한 사안이며, 어제 교황 성하께서도 최종 승인하신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빙빙 돌려 말하는 것보다는 추기경 같은 화법을 더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다. 공무원 화법도 업무상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거지, 남이 하는 걸 들으면 나도 개 같아.
그래도 전달할 정보가 심상치 않으면 조금은 무겁게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순간 ‘아무래도 시성이나 시복은 무리인 것 같아요.’ 라는 말을 하는 줄 알았잖아. 저게 어딜 봐서 시복 선언을 하는 추기경의 모습이냐.
“또한 두 분이 에넨의 곁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즉각 시성 절차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는 현 교황 성하가 아닌 다른 분이 교황의 자리에 계셔도 변하지 않을 일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눈가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생전에는 복자, 사후에는 성인 확정?
‘그게 뭐야.’
난생처음 듣는 패턴이다. 제발 그런 막중한 사안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 말라고.
‘혼자 나와서 다행이다.’
이윽고 이 자리에 나와 추기경만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마침 마르는 새로 구입한 물자들을 점검 중이라 혼자 나온 건데, 만약 마르도 있었다면 뇌정지가 와서 굳어버리지 않았을까?
나름 다른 세계 출신인 나도 혼란스러운데 토종 출신인 마르의 충격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다.
“많이 놀라신 것 같군요.”
그 와중에 추기경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일은 아니니까요. 조금 놀랍기는 합니다.”
당연한 질문이기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생전에 시복이 되었다는 것도 어마어마한 일인데, 사후 시성 확정은 정말 듣도 보도 못했다.
아니, 애초에 시성이 확정이면 그냥 생전에 해도 되지 않나? 아니면 시복도 사후에 하든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데.
“이해합니다. 알디노 추기경께서도 제 제안에 의문을 품으셨었지요.”
쿡쿡 웃음을 흘린 추기경은 조심스레 허리를 숙였다. 마치 윗사람을 알현한 아랫사람처럼 정중하게.
연이은 기행에 이번에는 머리가 아닌 몸이 굳어 버렸다. 추기경이 허리를 숙여야 할 대상은 에넨과 교황, 황제뿐이다. 일개 귀족인 나에게 목례도 아니고 허리까지 숙이는 건 너무 과분한 예의다.
“예하, 고개를 들어주십시오. 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분께서 어찌 일개 신도에게 이러십니까?”
일단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부담감을 표했다. 마음 같아서는 어깨를 잡아서 일으키고 싶지만, 그건 그거대로 무례니까.
허나 내 당혹스러운 심정과 달리 추기경은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후라는 조건이 달렸지만 시성이 확정된 것은 두 분에게 성인의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교단의 사정에 따라 시복에 그쳤으니, 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으로서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는 50도 정도 숙여졌던 허리가 65도 정도로 내려갔다.
미치겠다. 일으켜도 모자란 판국에 더 숙이게 만들었다.
“형제님께서는 주의 축복을 받아 성인의 반열에 오름이 마땅한 분. 그런 분을 인간의 사정으로 복자로 끌어내렸으니, 부디 제 사과를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신도 앞의 추기경이 아닌 성인 앞의 신도처럼 행동하는 추기경을 보니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이 자리에 나만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작은─ 아니, 엄청 큰 소란이 있었지만 금방 수습할 수 있었다. 사과를 받아들인다고 하니 칼같이 일어나더라.
아직도 정신이 아찔하지만 최대한 추기경의 입장을 고려하여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제국으로 치면 현직 장관이 리브노만 백작위를 받은 평민에게 고개를 숙이는 느낌 아니겠나. 아무리 장관이라도 리브노만 백작 앞에서 뻣뻣하게 굴면 황실의 진노와 온갖 욕을 다 처먹을 테니.
‘숙일 만하지.’
지끈거리던 머리가 조금씩 진정됐다.
“시성과 시복은 교황 성하의 권한이라 이 자리에서 형제님을 시복할 수는 없습니다. 시성성은 어디까지나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을 추려 성하께 보고를 드리는 곳이니까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양해해야지요. 저도 관료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농담 섞인 대답에 추기경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들이 제국의 장관이니, 신성교국의 성장이니 해봤자 결국은 관료제에 속한 공무원이다. 공무원의 고통은 공무원이 잘 아는 법이지.
“형제님이 장관이셔서 다행이군요.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자연스레 자비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쓴웃음을 지을 뻔했다. 이제는 단어 선택 하나하나에 예의가 가득하구나.
“아, 시복식은 성 토그라 대성당에서 이루어질 겁니다. 물론 시복식에 시복 당사자가 참여할 의무는 없으니, 편히 제국에서 결과를 기다리셔도 됩니다.”
그래도 슬슬 돌아갈 생각인지, 추기경은 빠르게 시복식 일정을 설명해 줬다.
성 토그라 대성당은 신성교국에 위치한 여명 교단의 상징. 혹시 신성교국까지 가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해외여행을 갈 필요는 없어졌다.
“그리고 이건 시성성 성장으로서 미래의 성인께 드리는 제 자그마한 성의입니다.”
그렇게 말한 추기경은 몇 걸음 다가오더니 자신의 가슴에 왼손을, 내 머리에 오른손을 얹으며 기도문을 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기경의 손에서 하얀 광채가 생기는 걸 보니 축복을 걸어주는 것 같─
– 아잇, 깜짝이야.
?
순간 나도 추기경도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나는 머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기에, 추기경은 미래의 성인에게서 이교의 기운을 느꼈기에.
– …아, 에넨 쪽 아이구나. 갑자기 따끔한 게 느껴져서 뭔가 했네.
금새 상황을 파악했는지 평온하고 늘어진 목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평온하지 못했다.
“형제님…?”
내 몸속에서 다른 신의 기운을 감지한 추기경의 눈매가 심상치 않았으니까.
복자(이교)라니. 내가 생각해도 끔찍하기는 하네.
‘망할.’
진정하자. 내가 북방에서 이교의 신과 연이 이어지고, 세계수 부활에 북방의 신이 개입했다는 것은 제국도 여명 교단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교단의 고위직인 추기경도 영원한 푸른 하늘에 대해 들었을 터.
지금은 추기경도 갑작스러운 복자(이교)에 당황해서 십자군의 눈빛을 하는 거지, 자세히 설명해주면 오해를 풀 거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
멍하니 내 앞─ 정확히는 내가 깃든 나무 앞에서 기도를 하는 엘프를 바라봤다. 나한테 육체는 없지만, 만약 있었다면 바닥에 드러누운 채 배를 긁고 있지 않았을까. 그만큼 익숙한 광경이다.
“우리의 어머니 콘스탄티나시여, 세계수를 수호하는 영원한 푸른 하늘이시여. 세계수를 관리하는 중임을 미천한 필멸자에게 허락하신 자비에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막 기도를 마치고 일어난 엘프 종족의 장로는 오늘도 가지를 정리하기 위해 거대한 가위를 들었다.
조금 떨떠름하다. 저 장로는 내가 이 나무에 깃든 날부터 지금까지, 매일매일 기도를 하며 가지를 정리하고 있다. 물론엘프에게 있어 콘스탄티나가 어떤 존재인지, 콘스탄티나가 하사한 세계수가 어떤 의미인지 정도는 잘 알고 있기에 유난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람 머리도 이 정도로 자르면 대머리 됐겠다.’
다만 정리를 너무 자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뿐.
신기하다. 분명 매일 자르는데 어떻게 아직도 자를 게 나오는 거지?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가지를 새로 붙이기라도 하는 건가?
“영원한 푸른 하늘이시여. 혹여나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 …없어. 애초에 이건 내가 머무는 집이지, 몸이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그래도 불편한 점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길.”
미소를 지으며 가지를 자르는 장로를 보니 ‘나 괜찮으니까 그만해.’ 라는 말을 하기 어려웠다. 나도 신으로서 무수히 많은 신도들을 봤는데, 이런 성격의 신도들은 하지 말라고 말리면 오히려 풀이 죽고 우울해하는 편이다.
그러니 어쩌겠나. 거슬려도 참고 수긍하는 수밖에.
“하늘 아줌마! 하늘 아줌마!”
“좋은 아침, 좋은 아침!”
대신 얘네가 떠드는 건 못 참겠다.
장로가 가지를 자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는지, 조용하던 요정들이 우르르 튀어나와 근처를 날아다녔다.
제발, 제발 조용히 해. 아침부터 시달리는 건 싫다고…
“아줌마! 아줌마! 이제 며칠 남았어? 우리 집, 언제 다시 생겨?”
“며칠? 며칠?”
오늘도 어김없이 재잘거리는 요정들의 모습에 실소를 흘릴 것 같았다.
내 팔자도 기구하지. 멀쩡한 신전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요정들에게 시달리며 살 일도 없었을 텐데.
– 3천5백 밤 정도만 더 자면 돼.
“3천5백? 진짜? 진짜?”
나도 몰라. 세계수를 콘스탄티나가 만들었지 내가 만들었냐.
– 응.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겨우 답을 돌려줬다.
비록 자세한 수치를 계산하는 건 어렵지만 최대 10년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러니 3천5백이 틀린 말은 아니겠지.
“5백은? 5백은 안돼?”
“5백! 5백!”
– 3천도 아니고 5백은 너무하지 않니?
후려치는 솜씨가 아주 예술이야. 콘스탄티나가 좋은 걸 가르쳤어.
‘도망치자.’
점점 정신이 멍해지려는 찰나, 희미해지는 의식을 겨우 붙잡고 비밀기지로 도망칠 준비를 했다.
한동안은 버텼지만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다. 잠깐만 명예 제사장 몸으로 가야겠어.
‘3시간만 버티면 되겠지.’
활기가 과도하게 넘치는 요정들이지만, 3시간이나 자리를 비우면 흥미를 잃고 자기들끼리 놀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때문에 정신을 가다듬으며 예비 제사장의 몸으로 향했고─
– 아잇, 깜짝이야.
몸에 들어가자마자 따갑고 뜨거운 감각에 놀라고 말았다.
나만의 작고 소중한 비밀기지가 더럽혀졌다.
“과연. 이것이 영원한 푸른 하늘의 기운이군요.”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는 에넨 쪽 아이를 보니 작은 서러움이 몰려왔다.
기껏 도망치자마자 만나는 게 에넨 쪽 아이라니. 쉬려고 왔다가 새로 보는 애한테 시달리고 있잖아.
“형제님께서 이교의 기운을 품고 계셔 놀랐지만, 영원한 푸른 하늘이라면 괜찮습니다. 세계수 부활에 일조하신 분이니까요.”
게다가 에넨 당사자도 아니고 그 아래의 아이인 주제에 나를 평가하는 것 같은 말을 해서 마음이 아프다.
나도, 나도 왕년에는 잘나가는 신이었는데. 한 달에 한 번은 소랑 말을 수백, 수천 마리나 바치는 제사도 받고 그랬는데.
‘…난 정주민들이 싫어.’
– 정주민 몸 속에 있으면서 무슨 말입니까.’
작게 투덜거렸지만 이 야박한 명예 제사장은 퉁명스러운 대답을 돌려줬다.
서럽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