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60)
로판 속 공무원 460화(461/945)
연장자를 찾아뵈러 갈 때는 양손 무겁게 가는 것이 도리다. 심지어 그 연장자가 예비 부인의 외조모이자 한 종족의 지도자라면 말할 것도 없다.
다만 무엇을 선물로 드려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게 문제일 뿐.
‘인간 기준으로 고르면 난리 날 텐데.’
창고에 쌓인 장신구와 옷감을 뒤적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외조모님이 나를 외손녀사위로 인정해 주시기는 했으나, 애석하게도 인간에게 불편한 감정을 품고 계시는 건 변함이 없다. 사실 외조모님이 살아오면서 개 같은 인간과 괜찮은 인간 중 누구를 더 많이 봤겠나.
게다가 그 개 같은 인간은 막연한 개새끼가 아닌 아펠스라는 구체적인 개새끼였다. 아펠스는 같은 인간도 혐오하는 국가였으니 엘프인 외조모님의 상처는 깊고 어둡겠지.그렇기에 인간이 만든 물건을 선물이랍시고 가져가는 건 곤란하다.
‘집에 있던 물건도 전부 수제였지.’
그리고 외조모님 댁에 가득했던 수제 가구들. 그게 단순한 취미인지, 아니면 인간이 만든 건 쓰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후자로 생각하자. 그게 안전하지.
‘차가 좋겠다.’
그렇게 한참이나 머리를 쥐어짠 결과, 무난한 결론이 나왔다.
외조모님도 차를 즐겨 마셨으니 차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물론 차도 찻잎 재배 과정에서도 인간의 손길이 닿기는 하지만, 그래도 공산품보다는 마음의 벽이 낮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걸로 고른 거라고?”
“응.”
기쁜 마음으로 트릭시에게 선물을 보여주자 트릭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이건 차가 아니라 와인이잖니.”
“과일로 만든 차라고 생각하면 괜찮지 않을까?”
그 말에 트릭시의 입이 다시 닫혔다. 혹시 내가 추위를 먹어 미친 건 아닌가 고민하는 눈빛과 함께.
그래, 나도 알고 있다. 내가 들고 있는 건 차가 아니라 술이다. 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미친놈이 아니니까.
‘이게 최선이다.’
트릭시의 눈빛이 따갑지만 어쩌겠나. 당장 구할 수 있는, 제법 괜찮은 품질의 찻잎들은 자연과 만리장성을 쌓은 인간 친화적 재배 방식으로 양산하고 있었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외조모님께 드릴 용기가 나지 않더라.
하지만 이 와인은 괜찮다. 무려 세르베트 공작령에서 생산했고, 나름 자연 친화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니까.
‘외손녀 영지의 특산품이라고 하면 좋아하시겠지.’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도 아닌 외손녀와 연관된 물건이다. 약간의 인간 향기는 웃으며 넘길 것이다.
그리고 보통 술을 곡차라고도 하잖아.이건 과차(果茶)라고 하면 아무튼 차의 범주에 속하지 않을까?
“…그래도 와인이면 선물로 괜찮겠지.”
이윽고 트릭시도 내 생각에 공감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트릭시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다.
***
신에게 있어 시간은 가볍고도 희미한 개념이다. 영생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에게 하루가 무슨 의미고, 한 달에 무슨 감흥이 들까. 그나마 년 단위로 훅훅 지나가야 ‘아, 세상이 조금 변했구나.’ 라는 느낌이라도 들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내 신생을 통틀어 지금처럼 하루하루를 간절히 기다린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내가 하늘의 신이라는 것에 애석함마저 느꼈다. 만약 시간의 신이었다면 주말까지 시간을 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불가능했겠지만.’
물론 부질없는 망상이다. 생명체, 혹은 건물의 시간을 가속하거나 되돌리는 거면 모를까, 세계의 시간을 건드리는 건 신격의 소멸을 각오하더라도 힘든 일이다. 애초에 그런 짓을 하려고 하면 다른 신들이 달려와서 무슨 짓거리냐고 두들겨 팼을 거다.
아, 어차피 다른 신이라고 해봤자 이제는 에넨밖에 없구나.
‘나쁜 놈.’
몇 번을 생각해도 이가 갈린다. 내 유일한 신도나 마찬가지인 명예 제사장에게 침을 바른 악독한 놈, 이미 모든 걸 가져놓고 남의 것도 노리는 탐욕스러운 놈.
내가 정정했을 때는 막 태어난 신격이라 제법 귀여워해 줬다. 머리가 큰 다음에도 나름 깍듯해서 싸우지도 않았다. 그랬던 녀석이 설마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가장 힘들 때 가장 치명적인 비수로 찌르다니.
‘내가 사자 새끼를 길렀어.’
눈물이 나올 것 같다. 태양신으로 태어난 녀석이라 하늘신으로서 보듬어준 거였는데, 태양이 하늘을 집어삼켜버렸어.
사실 알고 있다. 명예 제사장이 복자인지 뭔지로 임명된 건 어디까지나 에넨을 따르는 아이들의 짓이라는걸. 그 녀석은 자신을 따르는 아이들에게 체계적인 이름이나 직책을 안겨줄 녀석이 아니다.
그래도 괜히 에넨이 원망스럽다. 나쁜 놈, 말년에 꼭 지 같은 신생 신 만나서 고생해라.
“하늘 아줌마, 하늘 아줌마.”
“울어? 울어?”
– 진짜 울 거 같으니까 조용히 해.
그 와중에 요정들은 내 울적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근처를 맴돌았다.
서글프다. 얘들이 눈치는 좋지만 배려가 부족하구나. 콘스탄티나가 가정 교육을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하필 세계수가 불타버려서.
‘부활만… 부활만 하면 돼.’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요정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명예 제사장이 이곳에 오기만 하면, 신물에 깃든 기운을 이 나무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 기운을 온전히 흡수하면 최대 10년인 부활 예정 기간은 1년까지 단축될 수 있고, 운이 좋다면 그보다도 빨라질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난다. 세계수가 부활하면 콘스탄티나도 다시 대륙에 간섭할 수 있을 거고, 콘스탄티나가 나타나면 엘프와 요정들은 내가 아닌 콘스탄티나만 바라볼 거다.
“맞다. 아줌마, 아줌마. 그 얘기 해줘, 그 얘기 해줘.”
“맞아, 맞아! 그 얘기, 그 얘기!”
그렇게 되면 이 정신없는 나날도 끝나겠지.
– 그 얘기?
“엄마랑 있었던 일! 엄마 옛날 일!”
“해줘! 해줘!”
당당하고 명확한 요구에 한숨이 나왔다. 막 이 나무에 깃들었을 때, 나름 같이 살게 된 아이들이니 이것저것 옛날 얘기를 해줬지만, 그 업보가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래, 내가 멍청하기는 했지. 엄마가 그리운 아이들 앞에서 그 엄마 얘기를 하다니.
‘주말은 언제 오려나…’
누가 나 좀 주말까지만 봉인해줬으면 좋겠다.
***
외조모님께 드릴 세르베트 와인, 한가득 챙겼다.
이종족 보호 구역을 관리하는 현명공의 허락, 어제 직접 연락을 걸어서 방문 허락을 받았다.
신혼 중 제국 서쪽 끝으로 가는 외출 일정, 연인들에게 트릭시의 외조모님을 뵈고 오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덤으로 세계수 부활에 도움을 줄 신물까지 확실히 챙겼다.
완벽하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외조모님을 뵙고 돌아오면 된다.
– 왔… 어?
그렇게 엘프 주거 지구에 발을 딛자마자 다 죽어가는 영원한 푸른 하늘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혼란스럽다. 분명 신물을 가지고 방문하겠다는 말에 크게 기뻐하던 영원한 푸른 하늘이었다. 그런데 그 며칠 사이에 기쁨에 가득 찼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절망과 피로에 찌든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대체 무슨 일이지? 에넨이 세계수에 벼락이라도 내리꽂은 건가?
– 요정들한테… 네가 오면 세계수 부활이 빨라질 거라고 말했거든… 그랬더니 너 언제 오냐고 괴롭히더라…
‘저런.’
그 말을 듣자마자 빠르게 걱정을 거두었다. 본인의 자업자득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수학여행 때 잠깐 요정들을 본 나도 그 녀석들 앞에서 입조심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까지 같이 지낸 영원한 푸른 하늘이 그걸 몰랐겠나. 아마 주말이 가까워질수록 본인도 흥분해서 입을 잘못 놀린 모양이다.
– 장로한테도, 세계수한테 귀한 손님이 올 거라고만 했는데… 하필 마지막에 실수를 해서…
‘그래도 약속대로 왔으니 된 거 아니겠습니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 오늘 안 왔으면 세계수고 뭐고 그냥 도망쳤어…
진심이 가득한 말이라 픽 웃음이 나왔다.
오늘 신물의 기운을 옮기는 작업만 끝나면 영원한 푸른 하늘이 골골거릴 일도 사라질 테니.
“얘들아!”
이윽고 저 멀리서부터 적발의 엘프가 손을 격렬하게 흔들며 달려왔다.
낯이 익은 엘프다. 아마 이름이 클라리스였나? 저번 수학여행 때 외조모님에게 안내해주었던 엘프로 기억하는데.
“오랜만에 뵙습니다, 클라리스 님.”
그리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클라리스를 향해 트릭시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120세가 넘은 공작이라도 입장만 하면 아이가 되는 곳이라니, 역시 엘프 주거 지구는 대단해.
이번에도 클라리스의 안내를 받으며 외조모님의 자택으로 이동했다. 한 번 가봤던 곳이니 굳이 안내는 필요 없지만, 친구의 딸과 조금이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것 같아 조용히 있─
“맞다, 얼마 전에 결혼했다며?”
“아, 예.”
…지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클라리스의 관심 대상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순간 본능적으로 클라리스의 눈치를 보고 말았다. 내 연인이 여럿이라는 건 이미 엘프들도 알고 있으나, 아무리 그래도 트릭시를 각별히 여기는 엘프 앞에서 ‘트릭시 말고 다른 사람과 먼저 결혼했습니다! 트릭시는 두 번째니까요!’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잖아. 미친 새끼도 아니고.
“그럼 곧 트릭시랑 결혼하는 거 맞지?”
“…예, 맞습니다.”
하지만 정작 클라리스는 첫 번째, 두 번째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그저 트릭시와의 결혼이 임박했다는 말에 활짝 미소를 지을 뿐.
“저기, 가족도 아닌 내가 이런 말하기는 민망한데… 트릭시랑 결혼은 여기서 해줄 수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미소가 머쓱함으로 변했으나,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진짜 동족처럼 여기기는 하는구나.’
이종족 보호 구역의 엘프들이 트릭시를 정말 동족으로 여긴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물론 트릭시가 장로의 혈육이기도 하고, 이미 다른 엘프들과도 살갑게 대화 중이기는 한데─ 결정적인 순간에 혼혈이라는 핏줄이 족쇄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순혈이 아니면 세계수의 가호와 요정들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은 소설에도 간혹 나오잖아.
“엘프분들이 보호 구역을 나오기 어렵다면 당연히 그래야죠.”
그렇기에 기쁜 마음으로 확답을 줬다. 엘프들이 원한다면 꼭 그러겠다고.
슬쩍 트릭시와 시선을 교환하니 트릭시도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친구 결혼식을 빛내주지 못했으니, 그 딸 결혼식이라도 북적북적하게 해주고 싶었거든.”
그 말에 트릭시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아무래도 나도 뵙지 못한 둘째 장모님은 인망이 좋으신 분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