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61)
로판 속 공무원 461화(462/945)
멍하니 식탁을 내려다보다가 주방에 계시는 외조모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상하다. 분명 한 끼는커녕 두 끼 정도의 분량은 진작에 먹은 것 같은데, 먹어도 먹어도 음식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마법인가?’
순간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리 먹어도 음식이 줄어들지 않는 마법이라니, 이 대륙에 아사라는 개념을 없애버릴 수 있는 기적이다. 역시 트릭시의 외조모님이라 그런가 엄청난 대마법사시네.
그렇게 한참이나 외조모님을 보다 도로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엘프면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외조모님이 차려준 음식은 육류, 생선, 채소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했다. 확실히 풀만 먹고살면 몸에 안 좋지.
그래서인지 정신이 아찔했다. 뷔페를 통째로 빌려서 혼자─ 아니, 단둘이서 식사를 하는 기분이었으니까.
“왜 그러니? 혹시 입에 맞지 않니?”
“아닙니다, 너무 맛있습니다.”
차오르는 포만감 때문에 먹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으나, 어느새 다음 음식을 가지고 온 외조모님 덕분에 억지로 포크를 움직였다.
“후후, 다행이구나. 아직 많이 있으니 마음껏 먹으렴.”
“…네, 감사합니다.”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외조모님께 감사를 표하며 최대한 덜 배부른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고통스럽다. 설마 내 짬에 식고문을 당할 줄이야. 심지어 악의 없이 호의와 애정으로 가득한 식고문이라 더 미칠 것 같아.
‘트릭시는 괜찮나?’
겨우 샐러드를 삼키며 슬쩍 트릭시의 안색을 살폈다.클라리스의 안내를 받아 외조모님의 자택에 도착하고 지금까지, 외조모님은 거의 1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식고문을 진행하셨다.
그나마 나는 억지로 욱여넣으면 많이 먹을 수 있는 편이니 괜찮다. 하지만 트릭시가 이 속도로 음식을 먹는 건 무리인… 데…?
‘뭐야.’
트릭시를 보다가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 트릭시는 음식을 입에 가져다 대고 있으나, 딱히 씹거나 삼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식이 붕괴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자세히 살피니, 저 기막힌 상황의 원인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마법?’
이번에는 진짜 마법이다. 트릭시가 포크를 움직일 때마다 미세한 마나 유동이 느껴지는 걸 보면 확실하다.
트릭시는 외조모님의 사랑을 그 자리에서 섭취하는 게 아니라 미래로 미뤄두고 있었다. 배가 차서 더 이상 먹지 못하니 보관 마법을 사용해 빼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친.’
부러우면서도 당혹스럽다. 꾸역꾸역 먹고 있는 내가 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냥 배불러서 더 못 먹겠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저렇게까지 하면서 먹는 시늉을 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내 시선을 느꼈는지 메소드 연기를 하던 트릭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했다.
본인도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외조모님의 무한한 사랑은 식사만 2시간 정도를 하고 나서야 전부 받을 수 있었다. 너무 과분한 사랑이라 목이 멜 정도다.
“매실차란다. 소화에 좋으니 식후에 먹기 딱이지.”
“아, 감사합니다.”
식후 티타임까지 알뜰하게 챙겨주실 때는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 와중에 소화에 좋다는 차를 챙겨주시는 섬세함까지.
사실 소화가 필요할 정도로 당신의 사랑이 무겁다는 걸 인지하고 계셨다면, 조금만 가볍게 주셔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랑이 과분하면 오히려 독이 되는 법인데.
물론 굳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연장자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패륜아가 될 수는 없지.
“이거밖에 준비하지 못해 미안하구나. 나이가 들수록 조금만 먹게 돼서, 요즘 애들이 얼마나 먹는지 헷갈리지 뭐니.”
그러나 조심스레 매실차를 마시는 사이, 민망하다는 듯 입을 연 외조모님의 말씀에 흠칫하고 말았다.마치 우리를 더 먹이지 못해 아쉽다는 듯한 뉘앙스였으니까.
‘너무 무리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치명적인 실수를 깨달았다. 외조모님의 정성을 거부할 수 없어 이 악물고 먹었는데, 그게 도리어 화가 된 것이다.
그래, 우리가 외조모님을 기쁘게 하고 싶은 것처럼, 외조모님도 외손녀와 외손녀사위를 성대하게 대접하고 싶지 않았겠나. 우리가 접시를 비울수록 외조모님도 사명감에 불타 즉석에서 요리를 시작했을 터.
생각해 보면 막 외조모님 자택에 왔을 때는 적당한 분량의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지. 원래라면 그것만 먹고 끝나야 할 식사였으나, 서로에 대한 배려로 치킨게임이 되고 만 것이다.
가족이 서로 화목해서 생긴 식고문이라…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일이네…
“괜찮습니다. 저희도 원래는 이것보다 적게 먹지만, 너무 맛있어서 조금 무리한 거니까요.”
“그러니?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렇게 문화충격으로 인하여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트릭시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다행히 트릭시의 말에 외조모님도 안도하신 듯하지만, 트릭시가 무리했다는 말을 꺼내니 미약한 원망감이 들었다. 이 중에서 무리한 건 나밖에 없잖아. 자기는 혼자 마법으로 버텼으면서.
이래서 미천한 검쟁이로 사는 건 서러운 일이다. 고귀한 마법사의 길을 걸었다면 이런 설움도 느끼지 않았겠지.
‘자식은 마법사로 길러야 하나.’
물론 억지로 마법사의 길로 내몰지는 않겠으나, 만약 검사가 아닌 마법사를 희망한다면 기꺼이 밀어주자.
자식만큼은 더 행복했으면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니까.
***
어두운 안색으로 차를 홀짝이는 칼을 보자 여러 감정이 느껴졌다.
그 많은 양을 전부 먹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외할머니를 배려한 것에 대한 고마움이.
‘다 먹을 필요는 없었는데.’
칼이 이번에 평소 식사량을 아득히 초월하여 먹은 것쯤은 알고 있다.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지내는 연인의 식사량을 모르는 건, 지능이 부족하거나 눈치가 없어야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는 귀족이 미식을 즐기지 않고 과식을 한 것에 대해, 그만 먹겠다고 단호히 의사를 표현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칼은 평소에 똑 부러진 모습을 보이는 현명한 아이다. 그런 아이가 내 혈육을 위해 미련한 모습을 보였다면 오히려 기뻐할 일.
…그런 칼을 두고 홀로 마법이라는 꼼수를 쓴 건 미안하지만, 무인인 칼과 달리 난 아무리 노력해도 먹을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으니까. 분명 이해해 줄 거라 믿는다.
“은인, 은인.”
“다 먹었어? 다 먹었어?”
속으로 칼을 향해 사과를 하는 사이, 문이 열리며 요정들이 날아왔다.
그 모습에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저 아이들은 우리가 왔을 때부터 짙은 호감을 표했다. 칼의 머리카락에 매달린다거나, 어깨에 앉는다거나, 주변을 날아다니는 등. 마치 오랜만에 본 주인을 반기는 동물 같았다.
안타깝게도 외할머니께 손님을 귀찮게 하지 말라며 쫓겨났었으나, 창문 너머로 보고 있었는지 식사가 끝나자마자 모습을 보였다.
“어, 다 먹었어.”
“와!”
“다 먹었대! 다 먹었대!”
대답과 동시에 칼은 요정들의 습격을 받았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한 광경이다. 엘프가 아닌 인간이, 사제가 아닌 일반인이 요정들의 사랑을 받는 건 세계수가 멀쩡하던 시기에도 보기 드문 일이다.
물론 북방 이교의 기운이 자리 잡은 걸 생각하면 칼을 일반인이라고 보기는 힘들기는 하다. 사제와 일반인의 중간 단계라고 해야 할까?
“이제 세계수 살려줄 수 있어?”
“세계수! 세계수!”
“우리 집! 우리 집에서 살고 싶어!”
“알았으니까 머리는 잡아당기지 마…”
피곤한 듯 중얼거린 칼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내려두었던 검을 챙겼다.
‘신물이라.’
무심코 그 검으로 시선이 향했다. 여명 교단의 신물도 보기 힘든데, 유목민 신앙의 기운이 깃든 신물은 말할 것도 없다. 마음 같아서는 마법사로서 진득하게 연구를 하고 싶은 물건이다.
하지만 참았다. 비록 반이라지만 나에게도 엘프의 피가 흐르니, 엘프의 간절한 숙원을 자의로 늦추고 싶지는 않다.
“조금 쉬었다가 하지 않겠니? 급한 일은 아니란다.”
“괜찮습니다. 기운만 옮기는 작업이니 힘들 것도 없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최대한 빠르게 하는 게 좋습니다.”
정작 요정들에게 끌려가는 칼을 향해 외할머니가 걱정스레 물었으나, 칼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만류하는 외할머니의 목소리에도 은근한 기대감이 섞여있었으니까. 세계수가 불타는 걸 직접 보시고, 수백 년의 시간 동안 한을 품으셨던 외할머니시니 세계수에 대한 열망은 요정들과 비슷하실 거다. 단지 자중하시는 것뿐.
그런 외할머니를 배려해 기꺼이 움직여주는 칼이 고맙고도 자랑스럽다.
***
요정들에게 머리채가 끌리고 멱살을 잡히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껏 탈모 유전자가 없는 축복 받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데, 후천적인 충격으로 머리카락이 빠지면 그보다 억울한 일이 없다.
게다가 슬쩍 보니까 주방 탁자에 디저트가 가득하더라.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또 식고문이야.
– 왔어…?
그렇게 예비 세계수 앞에 서자 여전히 죽어가는 목소리의 영원한 푸른 하늘이 반겨줬다.
‘아직도 피곤하십니까?’
– 괜찮아, 기운만 받으면 좋아질 거야…
그 말에 더욱 애잔함이 느껴졌다. 누가 봐도 중병에 걸린 사람이 약 먹으면 괜찮다고 하는 기분이었으니.
– 기운만, 기운만 받으면 돼. 기운만 받으면… 전부 잘 풀릴 거야.
아니, 지금 보니 중병에 걸린 환자가 아니라 한탕을 노리는 도박 중독자 같다.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합니까? 나무에 꽂으면 됩니까?’
그렇기에 영원한 푸른 하늘의 얼마 남지 않은 명예를 위하여 화제를 돌렸다. 본인 입으로 기운만 받으면 된다고 했으니 빨리 넘겨주고 끝내야지.
– 그냥 근처에 꽂아줘. 뿌리 안 다치게 조심하고.
‘옙.’
어려울 것 없는 지시라 빠르게 신물을 땅에 꽂았다.
뿌리가 다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와 깊이… 이 정도면 되겠─
– 고맙습니다, 태양과 하늘의 총애를 받는 자여.
갑자기 머리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제 아이들을 위해, 길을 잃은 가여운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놓는 숭고함. 그 숭고함은 힘을 잃고 영락해가는 저조차 당신을 주시하게 만들었습니다.
– 어…?
낯선 목소리에 이어 넋이 나간 듯한 영원한 푸른 하늘의 목소리가 들렸다.
– 물론 저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지켜보는 것일 뿐, 제가 이 세상에 다시금 나타나는 건 미래의 일입니다. 허나 당신의 헌신으로 그 미래는 앞당겨졌으며, 당신께 감사를 표할 힘 정도는 생겼습니다.
온화한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혼란에 빠진 머리가 서서히 이성을 되찾았고, 이 목소리의 주인도 깨닫게 되었다.
엘프의 어머니이자 세계수를 대륙에 하사한 존재.
그리고 초목의 신이라 불린 신격.
‘콘스탄티나?’
– 예,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당혹스럽다. 세계수가 부활하면 콘스탄티나와 접촉이 생길 거라는 건 각오하고 있었지만, 아직 세계수가 완전히 부활하지 못한 이 타이밍에 등장할 줄은 몰랐다.
– 저는 모든 엘프와 요정들의 어머니이자 정령의 친우, 이 대륙 모든 곳을 감싸 안는 초목의 신.
그러고는 잠시 침묵한 콘스탄티나는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그리고 당신에게 은혜를 입은 존재로서 자그마한 보답을 하고자 합니다.
– 어? 야, 잠깐!
영원한 푸른 하늘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어깨 부근에 미약한 열기가 느껴졌다.
– 지금은 힘이 부족하여 흔적을 남기는 것이 고작이나, 우리가 다시 만날 미래에는 창대한 신성이 꽃 필 것입니다. 그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방적으로 들리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 왜, 왜 다들 내 거만 노리는데…!
어느 신의 오열만을 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