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63)
로판 속 공무원 463화(464/945)
귀 만지작 사태는 흥겨움으로 가득했던 연회장에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엘프들 입장에서는 기껏해야 10대 초반 정도인 꼬꼬마들이 차마 말로 설명하기 민망한 짓을 한 거니까.
그나마 그 사태의 원인을 문란함이 아닌 지식 부족으로 여겨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기껏 올린 호감도가 수직 낙하할 뻔했다.
‘좆 될 뻔했다.’
나도 모르게 목을 쓰다듬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펠로펜 제국은 황제가 이종족의 친우를 자처할 정도로 친 이종족 성향의 국가다. 그런 국가의 장관이 엘프 장로의 외손녀를 엘프들 앞에서 희롱한다? 그 일로 제국과 이종족의 사이가 틀어진다면 이미 죽은 에이만카 대제가 부활하여 나를 길동무로 삼을 것이다.
“너에게 엘프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인간의 피도 흐르니 귀, 를 만지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단다. 혼혈인 너에게 엘프의 문화만을 강조하는 건 너무한 일이겠지.”
아무튼 여차저차 연회가 끝난 후, 트릭시에게 설교를 하는 외조모님의 표정은 매우 엄격하고도 진지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자제해 주었으면 하는구나. 여기는 엘프들의 공간이잖니.”
“네… 명심하겠습니다…”
외조모님의 말씀에 트릭시는 귀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평소의 트릭시와 달리 반쯤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 자신이 일상적으로 했던 행동이 엘프 입장에서는 그렇고 그런 행동이었다는 게 충격이었던 모양.
이해한다. 귀를 만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직접 듣지 못하고 추측만 한 나조차 정신이 아찔한데, 귓속말로 자세하게 들은 트릭시는 오죽하겠나. 외조모님을 뵈러 온 자리만 아니었으면 텔레포트로 도망쳤을 거다.
“너도 이해했을 거라 믿는단다.”
“예, 물론입니다.”
풀이 죽은 트릭시를 껴안으며 토닥인 외조모님은 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기분 탓인가. 호감도 100이었던 눈빛이 90 정도로 하락한 것 같은데.
‘내 업보다.’
물론 하나뿐인 외손녀가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다.
인간이라 엘프의 문화를 몰랐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성과 감정이 따로 노는 경우가 있지 않나. 지금이 바로 그때다.
“저기, 외조모님. 그러고 보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 주제로 대화를 지속하면 나만 손해다.
“말하려무나.”
“올해 여름 정도에 트릭시와 혼인을 하려고 하는데, 혹 외조모님과 다른 엘프분들이 괜찮다면 보호 구역에서도 결혼식을 올리고 싶습니다.”
그 말에 외조모님의 표정이 급격히 온화해지셨다.
성공적으로 화제를 돌린 것 같아 다행이다.
결혼식에 대한 논의는 금방 끝났다. 외조모님을 비롯한 엘프들이 보호 구역 밖으로 나오기는 곤란하고, 인간들이 보호 구역에 들어오기도 곤란한 상황. 그러니 그냥 결혼식을 두 번 올리기로 했다.
괜히 축복받아야 할 결혼식 때 하객들이 서로 어색해하는 것보다는 두 번 올리는 게 낫지. 축복도 한 번 받는 것보다는 두 번 받는 게 좋잖아.
“옛날에는 세계수 앞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었단다. 그러면 요정들이 신랑과 신부의 몸에 붙어 장난을 쳤는데, 어느 부부에게 더 많은 요정들이 붙는지 경쟁을 하기도 했었지.”
그리고 논의가 끝나자 외조모님은 과거를 회상하며 미소를 지으셨다.
“너희가 결혼하기 전까지 세계수가 완전히 부활하면 좋겠지만, 설령 시간이 맞지 않더라도 저 나무 앞에서 하자꾸나.”
“인간이 누리기는 과분한 영광 같습니다.”
“네가 없었다면 세계수도 없었을 텐데 무슨 말이니.”
그렇게 말하는 외조모님의 눈빛은 어느새 귀 만지작 사태 이전의 눈빛으로 변해있었다.
아무래도 세계수 부활은 엘프들의 호감도를 100으로 고정시키는 업적인 것 같다. 잠깐 흔들리기는 해도, 정말 큰 사고를 치는 게 아니라면 변하지 않는 존중과 호감을 받는다. 엄청난 업적이네.
“그건 그렇고 여름이라. 그때는 다들 더워서 집 밖을 나가는 걸 귀찮아하는데, 오랜만에 여름을 즐겁게 보낼 수 있겠어.”
졸지에 우리 결혼식이 여름맞이 대축제가 된 기분이지만, 당연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결혼식은 축제 맞잖아.
게다가 결혼식이 무더위로 골골거리는 엘프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된다면 어느 때보다 진심 어린 축하와 박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박 2일에 걸친 일정을 마치고 저택에 복귀했다.
“어서 와요, 칼.”
복귀하자마자 마르가 사용인들과 함께 반겨주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시선은 마르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뭐야 저거.’
집에 돌아온 남편이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면 섭섭할 법도 하나, 마르는 내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멋지죠? 칼이 자리를 비웠을 때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께서 보내주신 거예요.”
“…응, 멋지네.”
짧은 침묵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걸 멋지다는 카테고리에 넣어도 되는지 의문이다. 멋지다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저택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벽. 그 벽에 걸린 거대한 초상화 한 쌍과 초상화 하단에 적힌 문구는 내 머리를 굳게 만들기 충분했다.
[ 복자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가 그려진 초상화.
[ 복자 마르게타 크라시우스 ]그 옆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마르의 초상화.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정식 시복은 교황의 권한이라 당장은 못 한다고 한 주제에, 언제 저런 초상화를 만든 건지 모르겠다.
“저까지 시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부부가 나란히 복자인 건 기쁜 일이네요.”
그렇게 말한 마르는 트릭시를 향해 쪼르르 걸음을 옮겼다. 장로님은 무탈하시냐는 안부 인사, 이왕 간 김에 더 있다 오지 그랬냐는 덕담이 들려왔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초상화를 향했다.
‘저걸 치울 수도 없고.’
이윽고 두 눈을 감으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저게 신성교국에서 정식으로 준 선물만 아니었다면 창고에 처박아뒀을 텐데, 하필 추기경이 직접 보낸 물건이라 숨길 수도 없다. 민망함 때문에 신성교국과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않나.
그리고 신성교국에서 성인 초상화까지 미리 보냈다는 건 저녁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망할.
***
장관과 마종공이 이종족 보호 구역에 방문하였고, 엘프 주거 지구에서 연회가 벌어졌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딱히 특이한 보고는 아니다. 세계수 사건 이후로 장관은 엘프들의 은인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마종공은 엘프 장로의 혈육이니 환영 연회가 벌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신의 기운이 더욱 짙어졌더라.’
다만 아우스엔 대교구에서 보낸 서신은 눈여겨봐야 할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작년에도 아우스엔 대교구는 이종족 보호 구역에서 에넨이 아닌 다른 신의 기운을 느꼈다고 언급하였다. 그 신의 기운은 세계수를 엘프에게 하사한 콘스탄티나의 기운일 터이고, 콘스탄티나의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면 세계수 부활이 임박했다는 뜻.
이건 긍정적인 일이다. 장관의 결혼식 때 에넨의 축복이 있었고, 이번에는 수백 년 만에 세계수가 부활한다? 무지한 자가 봐도 신의 총애가 제국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황이다.
‘가만히 있어도 권위가 생기는군.’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상황께서 그토록 노력하며 쌓아온 권위, 내가 서자 출신이었기에 어떻게든 거머쥐려고 했던 권위가 숨만 쉬어도 생기고 있다. 진즉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우스엔 대교구에서 보낸 서신을 보다가 다른 서류를 집었다.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지금은 지금이다. 괜히 이상한 미련은 가지지 말자.
‘벌써 이렇게 됐나.’
그리고 서류를 확인하자마자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삼국 주요 인사가 조만간 입국한다는 내용의 서류였으니까.
아직 졸업하지 못한 재학생들이 개학에 맞추어 입국하는 건 마땅한 일이나, 벌써 개학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신년하례식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장관도 다시 업무로 복귀하겠어.’
또한 아카데미 일정이 시작된다면 장관도 다시 아카데미 감찰관으로 지내야 한다. 그 사실에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실 올해 아카데미 감찰관은 다른 사람을 보낼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아무리 ‘내정자’라지만 장관급 인사를 장기 파견 보내는 건 너무한 일이고, 장관의 격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허나 다른 사람을 찾을수록 장관만 한 인물을 찾을 수 없다.
이미 장관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각국 왕자, 차기 성자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마지막 1년을 남기고 담당자를 교체하는 건 그 주요 인사들에게도, 주요 인사들을 호위하는 삼국 전력에게도, 아카데미 교직원들에게도 혼란스러운 일이다.
물론 방금 생각한 것처럼 장관에게 감찰관을 맡기는 건 난감한 일이나─
‘내정자기는 하지만 부장이기도 하지.’
방향을 조금만 틀면 장관 내정자가 아닌 부장으로 취급할 수 있다.원래 이런 건 해석하기 나름 아니겠나.
결정적으로 현재 부장급 이상 관료 중 그나마 놀고 있는 건 장관뿐이다. 감찰성 창립 준비로 고생 중인 다른 관료들과 달리, 장관은 장관 비서 내정자에게 모든 걸 일임하고 있으니.
그렇기에 장관이다. 장관이 아니면 아카데미에 갈 사람이 없다.
‘불만이 있다면 창립 준비를 맡기면 그만이고.’
감찰성 창립 준비에 수개월이라는 시간을 투자하기와 아카데미에서 2년 동안 하던 일을 마저 하기.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장관은 기꺼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집무실 한쪽에 걸린 장관의 성인 초상화도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프흣.”
잠시 초상화를 보다가 빠르게 터져버렸다.저건 어떻게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오냐.
‘성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
미치겠다. 장관의 이름 앞에 성을 붙이다니.
저게 장관 사후에야 공식화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