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64)
로판 속 공무원 464화(465/945)
개학이 가까워졌기에 아카데미에서 사용할 짐들을 하나하나 직접 점검했다.
작년에 사용한 짐을 그대로 들고 가도 무방하지만, 옷 정도는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요즘 들어 예전에 입던 옷들이 작게 느껴졌으니.
“들어오게.”
그렇게 1시간 정도 짐을 확인한 후, 문 밖에서 대기 중인 시종들을 호출했다.
“짐은 이 정도만 가져갈 생각이네. 마차도 적당한 크기로 준비하고.”
“예, 각하.”
내 지시에 허리를 숙인 시종들은 빠르게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아마 아카데미까지 타고 갈 마차에 알아서 적재할 터.
그리고 마지막 시종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도 황궁 시종들의 손을 빌릴 줄은 몰랐는데.’
조금 머쓱한 심정에 괜히 볼을 긁적였다.
아무리 황족이라지만 정식으로 작위를 하사받았으니 황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낼 줄 알았다. 그게 관례니까.허나 폐하께서는 내가 지낼 곳을 따로 구할 터이니 그때까지만 황궁에 머물라 하셨다.
물론 이드라펜 후작위에는 공식적으로 귀속된 영지만 없을 뿐이지 같이 하사받은 땅은 제법 있지만,폐하께서 그러시니 어쩌겠나. 후작인 주제에 황궁에 머무는 호사를 누릴 수밖에.
하지만 어째서일까. 근거는 없지만 몇 년 정도 황궁에서 지낼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슬슬 연락해볼까.’
복잡미묘한 직감을 뒤로 하며 통신구를 손에 쥐었다. 짐 정리도 끝났으니 이제 다른 일을 처리해야지.
– 누구시죠?
통신구를 작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연락을 받았다.
새하얀 피부와 은발이 찬란하게 빛나는 영애, 너무 뻔한 비유지만 꾀꼬리가 지저귀는 것 같은 목소리를 가진 영애.
“접니다, 샤티 영애.”
바란디가 후작의 유일한 자식인 샤티 구르트.
내 약혼자나 다름없는 영애에게 연락을 걸었다.
– 아, 이드라펜 후작 각하시군요.
언제나 그렇듯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반응이었으나, 이제는 익숙해졌기에 별 감흥은 들지 않았다.
그야 샤티 영애 입장에서는 몇 개월 전에 처음 본 사람과 원치 않은 정략혼을 하게 된 것 아닌가. 아무리 정략혼이라도 어릴 적부터 안면을 쌓은 상대와 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 그렇기에 샤티 영애가 다소 벽을 세우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날씨가 좋아서인지, 문득 샤티 영애가 생각나 연락드렸습니다. 혹 제가 영애의 귀한 시간을 방해하지는 않았는지요?”
– 괜찮습니다. 갑자기 연락하신 게 한두 번도 아니니까요.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미소를 지으며 답하자 샤티 영애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발끈할 수 있는 말을 들었음에도 웃어넘긴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샤티 영애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나 나는 샤티 영애에게 화를 낼 생각이 없다. 결혼이 기정사실인 이 관계를 깨트릴 생각은 더더욱 없고.
영애에게 첫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낭만적인 이유는 아니다. 이미 누군가를 사랑했던 여파인지, 지금의 나는 사적인 애정을 느낄 생각도 여지도 없다. 그저 황족의 의무를 위하여, 내 부인이 될 영애를 위하여 움직일 뿐.
“아카데미에 가기 전에는 영애를 직접 보고 싶었는데, 애석하게도 개학이 코앞까지 다가왔군요. 지금만큼 학생 신분이 원망스러운 적이 없습니다.”
– 저는 오지 않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북방 변두리에서 후작 각하를 모시다니, 부끄러워서 고개도 들 수 없는 일이군요.
“샤티 영애가 있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저에게 그보다 더한 대접은 없습니다.”
그러자 샤티 영애의 눈매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통신구 너머로도 느껴졌다.
‘오늘도 솔직하군.’
그 모습을 보니 픽 웃음이 나왔다. 사실샤티 영애에게 이성적 호감은 없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의 호감은 있다. 그야 대화할수록 노골적이고 귀여운 반응을 보이는데 어찌 싫어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샤티 영애도 철저하게 예의를 지키고 우회적인 발언을 통해 나를 밀어냈다. 신진 귀족이 황족과의 혼인을 거부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영애의 가문이 위태로워질 테니 당연한 일.
허나 나는 그런 영애의 속내를 최대한 모른 척했다. 예의를 지키면 능글맞게 다가가고, 우회적으로 말하면 못 알아들은 척했다. 그러니 영애도 답답해서인지 점차 직설적이고 명확하게 밀어냈지.
물론 그것도 모른 척했지만.
“참, 영애의 조언대로 최근 단련에 힘쓰고 있습니다. 언젠가 저도 북방에서 지낼 일이 생길 터인데, 몸이 버티지 못하면 곤란하지요.”
– 그… 렇군요. 제 조언에 귀를 기울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영애의 말인데 당연한 일입니다.”
슬슬 이도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 정도만 해야겠어.
***
이드라펜 후작의 얼굴이 사라지자마자 통신구를 내던졌다.
“으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머리를 격렬하게 헤집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러지 않으면 타오르는 속을 진정시킬 수 없을 것 같다.
짜증 난다. 너무 열받는다. 이드라펜 후작이 눈앞에 있었다면 눈 딱 감고 한 대 팼을 거다. 그 정도로 이드라펜 후작은 거슬리고, 능글맞고… 아무튼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 대만 때리면 픽 쓰러질 놈이!’
주먹을 파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신년하례식 때 처음 만난 이드라펜 후작은 전형적인 정주민 국가의 왕자처럼 생겼었다.
고난이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고, 제 몸을 써서 무언가를 이룩한 적이 없는 윗사람.떠받들어져 사는 것이 당연한, 외모랑 신분밖에 내세울 게 없는 놈. 그게 이드라펜 후작의 첫인상이었다.
지금은 그 첫인상에 뻔뻔하고 능글맞고 눈치 없는 척하는 재수 없는 놈이라는 인상까지 추가됐지만!
– 참, 영애의 조언대로 최근 단련에 힘쓰고 있습니다. 언젠가 저도 북방에서 지낼 일이 생길 터인데, 몸이 버티지 못하면 곤란하지요.
이윽고 이드라펜 후작의 말이 떠오르자 헛웃음이 나왔다. 더 이상 분노를 표출할 힘도 없어.
‘단련은 무슨.’
몇 주 전, 아직 내가 이드라펜 후작에게 예의를 차렸을 당시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북방의 환경은 가혹하고 매서우니 평범한 사람은 발을 딛는 것도 힘들 거라는 말.
네가 나와 결혼을 하면 그 혹독한 북방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으나, 이드라펜 후작은 그걸 결혼을 포기하라는 압박이 아닌 단련하라는 조언으로 받아들였다.
아니, 분명 전자인 걸 알면서도 후자로 들은 척하는 걸 거다. 그 능글맞은 놈이라면 확실해.
‘어디 백날 단련해 보라지.’
헛웃음을 가다 듬고 바닥을 구르는 통신구를 주웠다.
정원 속 꽃이 단련해 봤자 결국은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자란 꽃.
나와 나란히 설만한 북방의 전사는 될 수 없을 거다.
***
이쯤 되면 진지하게 고민된다. 혹시 내가 전생에 큰 죄를 지은 게 아닐까? 예를 들면 황제가 다스리던 국가를 누군가에게 팔아먹은 중죄 같은 거. 그것도 암묵적 동의가 아닌 적극적 매국 정도는 한 것 같다.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 새끼가 나에게 이 정도로 진심일 수가 없다.
“추기경이 보낸 선물을 아무 곳에나 둘 수는 없어서 걸어뒀네. 개인적으로도 볼 때마다 흐뭇하더군.”
황제의 호출을 받고 방문한 태양전. 그 태양전 내에서도 황제가 업무를 보는 집무실.
사실상 제국의 모든 업무가 최종 승인을 받는 공간에, 내 성인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미친 새끼인가?’
정신이 아찔해졌다. 개학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황제의 호출 자체는 그러려니 하고 받았는데, 집무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저딴 초상화가 반겨줄 줄은 몰랐다.
미친 새끼. 진짜 미친 새끼. 대륙 역사상 어느 황제가 자기 신하의 성인 초상화를 걸어두고 있냐고. 자기 초상화면 또 모를까.
“이거 참. 말을 못 할 정도로 감동했나?”
그 와중에 황제는 추가 도발을 이어나갔다.
감동은 이 새끼야, 넌 꼭 감동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부터 다시 공부하고 와라.
“…황제 폐하께옵서 업무를 보시는 신성한 공간에… 미천한 소신의 초상화가 걸려있다는 것이 두렵고도 황공할 따름입니다.”
“신성한 공간이니 마땅히 성인의 초상화를 걸어야지.”
그러고는 황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도 호탕하고 당당한 웃음이라 나도 따라 웃을 뻔했다.
“머리가 뿌옇고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장관의 초상화를 본다네. 사후 성인이 될 위인이 살아서 짐을 보필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
“황송하옵나이다, 폐하.”
내 어깨를 토닥이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지금 저 새끼 얼굴을 보면 진심 펀치가 나갈 것 같았다.
진심 펀치에 대한 욕망을 가라앉힌 후, 평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올해까지 장관이 수고를 해줘야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을 보내어 혼란을 야기할 바에는 장관을 보내는 게 좋더군.”
“예, 폐하. 그리 하겠습니다.”
올해도 아카데미에서 개노답 부원들을 상대하라는 통보였으나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내가 갈 거라 생각한 것도 있지만, 황제의 말처럼 마지막 1년을 남기고 다른 사람을 보낼 필요성은 없으니까.
그리고 괜히 다른 사람을 보냈다가 일이 터지면 누군가 그 일을 수습해야 할 텐데, 높은 확률로 그 누군가는 나다.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내가 하는 게 낫지.
“미리 말하는 거지만 3년 동안 수고 많았네. 어느 관료가 타국의 왕족을 3년이나 보필한단 말인가. 상황 폐하께서도 장관이 적임자라 생각하셨기에 장관을 아카데미에 보내신 거겠지만, 속은 편치 않으셨을 걸세.”
내 대답에 황제는 의외의 위로를 꺼냈다. 파멸적 인성을 자랑하는 황제가 보기에도 내 아카데미 생활은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기에 칭찬 받아 마땅하지.”
옅은 미소를 지은 황제는 잠시 침묵하더니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이미 장관이라 이 이상 승진을 시킬 수도 없고, 이중 백작인 것처럼 이중 장관을 해보는 건─”
“폐하.”
“농담일세. 한 사람이 장관직을 겸임하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무려 황제의 말을 끊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저 새끼, 말로는 있을 수 없다고 했으면서 눈빛은 진심이 가득했어. 내가 조금만 당황했다면 그대로 밀어붙였을지도 몰라.
“아, 그러고 보니 장관. 내 개인적인 부탁이 있다네.”
“하명하소서.”
본능적으로 움직인 입과 달리 머리는 의심으로 가득찼다. 이중 장관이라는 미친 발언을 한 다음에 개인적 부탁? 이 새끼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요즘 아인테르가 검술에 흥미를 붙였던데, 시간이 된다면 조언이라도 해주게.”
하지만 예상외의 발언이 나왔다.
의외다. 2황자의 실각 이후로 무예와는 거리를 둔 아인테르 아닌가. 황제가 아인테르를 황가의 일원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제 거리를 둘 필요는 없다만, 굳이 가까이 다가갈 필요도 없다.
“예. 소신의 조언이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그리 하겠습니다.”
물론 의외인 것이지 꺼릴 일은 아니다.
남자가 살다 보면 검 좀 잡을 수도 있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