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65)
로판 속 공무원 465화(466/945)
이왕 황궁까지 간 김에 재무성 청사에도 방문했다. 에리나 피네는 감찰성 창립 준비 때문에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서 이렇게 틈틈이 방문해야 서운해하지 않는다. 사실 바쁜 사람과 노는 사람 중에 노는 사람이 찾아가는 게 맞지.
“부장님이 조언이요?”
“뭐, 그렇게 됐다.”
그리고 둘과 합류하자마자 황제와 있었던 일을 얘기해 줬다. 딱히 보안이 필요한 내용도 아니었으니 이 정도는 가볍게 얘기해도 무방하다.
“황태녀의 대부에다가 황족의 스승이라. 대단하네요.”
“스승은 무슨. 옆에서 자세 조정 정도만 할 텐데.”
장난스레 박수를 치며 히죽거리는 에리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직접 부탁을 한 만큼 조언은 해주겠으나, 본격적인 가르침은 무리다. 나는 누군가를 부드럽게 가르치는 재주가 없으니까.
물론 아인테르를 4과 시절 묵광대처럼 굴리면 가능은 하겠지만, 황족 겸 후작인 아인테르를 개처럼 굴리기는 좀.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서로 민망한 일이다.
“여차하면 에리히도 끌어들이려고. 둘이 동갑이니 같이 단련하는 것도 좋지 않겠냐?”
게다가 제과 동아리에는 이미 검술을 단련하고 있는 부원만 둘이다. 굳이 나 혼자 아인테르를 담당할 필요가 없다는 말.
황제가 나를 지목하여 부탁했으니 아예 발을 빼는 건 무리지만, 에리히나 류티스는 친구의 단련을 외면할 성격이 아니지. 내가 할 일은 상대적으로 적을 거다.
“제발 그 개 같은 비숍 좀 그만 만들어라!”
“걱정 마라. 이번에는 나이트다!”
대신 류티스가 가르치게 된다면 포커페이스에 능한 아인테르도 뒷목을 잡을 것 같기는 하다. 그 새끼는 상대가 누구든 티배깅에 능통한 놈이라.
“주인님이 가르치신다면 이드라펜 후작도 뛰어난 무인이 될 겁니다.”
그 와중에 조용히 내 얘기를 듣고 있던 피네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내 아래에서 구르던 과거를 떠올린 모양.
조금 머쓱해졌다. 피네를 비롯한 묵광대가 내 가르침을 받고 무럭무럭 자라기는 했으나, 솔직히 걔네의 재능이 뛰어난 것도 크다. 평범한 평민을 데려다 훈련시켰으면 이제야 숙련병 수준에 도달했을걸.
“그랬으면 좋겠네. 이드라펜 후작이 바란디가 후작 영애랑 결혼하면 북방에서 지낼 텐데, 무인으로 인정받으면 살기 편하겠지.”
허나 피네가 품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잘 가르친 걸로 치자.
그렇게 말하며 피네의 뺨에 입을 맞추자 파르르 몸을 떤 피네도 내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세상에.’
순간 감동의 눈물이 흐를 뻔했다. 트릭시와 자웅을 겨룰 정도로 스킨십 약자였던 피네가 이제는 뻣뻣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역공을 가할 줄 안다니.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의미 아닌가.
“아! 치사하게 혼자만!”
이 역사적인 역공에 자극을 받은 에리도 내 반대편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사람의 뺨은 두 개라 다행이다.
“아, 맞다. 부장님.”
한참이나 양쪽에서 볼을 빨리던 사이, 뒤늦게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에리가 입을 열었다.
“저희 다음 주부터는 재무성 청사가 아니라 감찰성 청사에서 지내요.”
“오.”
그 말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감찰’성’이 독자적 청사를 지니는 건 당연한 일이나, 아직 정식 출범을 하지 못했기에 재무성 청사에 빌붙어 지내는 신세였다. 덕분에 특무성 소속 인원들이 감찰성 창립과 관련하여 용무가 있으면 재무성 청사까지 와야 했지. 지금 내 옆에 있는 피네처럼.
하지만 드디어 감찰성 청사가 생겼다. 재무성, 특무성 소속 인원들이 한곳에 모여서 업무를 볼 수 있고, 나를 볼 때마다 기생충이라 갈구던 장관의 놀림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슈퍼 기생충 탈출이다.’
나도 이제 엄연한 숙주가 되는 거야.
“엊그제 잠깐 구경하고 왔는데, 지상보다 지하가 더 넓더라고요.”
“작정하고 배정해 줬네.”
에리의 말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하, 감찰성 외부 인사라면 파악하기 어려운 위치.만약 누군가 감찰성 청사에 침입하더라도 지하는 감히 접근할 수도 없을 거다. 따로 도면을 확보하지 않은 이상 외부에서는 지하를 볼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지상보다 지하가 더 넓다면 거의 요새나 다름없다. 감찰성 장관이 아니라 요새장이었네.
“그러니까 이번에는 고문실 넓게 만들어도 되죠? 재무성 청사는 지하가 좁아서 적당히 만들어야 됐는데.”
“그건 정보부장 허락받고 해.”
“히잉…”
자연스레 청탁을 넣으려다 실패한 에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에리가 내 예비 아내기는 해도 정보부 소속이 될 예정인데, 정보부의 일을 정보부장을 패싱하여 처리하는 건 옳지 못하다. 괜히 감찰성 출범과 동시에 정보부장과 어색한 사이만 될 터.
물론 상황과 황제가 미친 듯이 내 권위를 높여줬기에 정보부장도 불만을 품을지언정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부장급 인사를 무시할 생각은 없다.
‘괜히 업무 전체에 장관이 관여한다는 이미지를 주면 안 돼.’
이건 진심이다. 감찰성 전체에 그런 기조가 풍기면 그날로 망하는 거다. 감찰성 소속 과장급 공무원들이 각 부의 부장을 무시하고 장관의 결재를 바란다?
‘시발.’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일은 최대한 부장들에게 맡긴다.’
난 최대한 놀 거고.
이건 하늘이 무너져도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이다.
“그, 주인님. 특임부에서도 연무장을 만들 예정인데…”
“아, 그건 피네가 정한 다음에 보고서만 올려.”
“가, 감사합니다.”
에리의 청탁이 광속으로 기각되는 걸 본 피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으나, 피네의 요구는 바로 들어줬다.
“아니, 왜 저만 차별해요!”
그 모습에 에리가 서럽다는 듯 소리를 질렀지만 딱히 양심에 찔리지는 않았다.
“피네는 부장이잖아. 내 허락만 받으면 돼.”
불만 있으면 네가 정보부장하든지.
그 말에 에리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부장을 하는 건 미친 짓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 같다.
***
오늘도 어김없이 연무장에서 수련을 했다.
하지만 몸만 규칙적으로 움직였을 뿐, 마음은 평소와 달리 격렬하게 흔들리며 평온을 되찾지 못했다.
마음과 육체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한심한 상황. 이런 나를 무인이라 할 수 있을까?
“하아.”
결국 검을 멈추고 연무장 구석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마음으로 수련을 해봤자 비틀어진 길을 걷겠지.
‘어쩌지.’
그리고 칼자루에 슬며시 이마를 기대며 두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어떻게 하냐 이거.
미칠 것 같다. 세라도 제노비아 누나도, 도대체 무슨 얼굴을 하며 만나야 할지 모르겠다.
둘의 고백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이러는 건 아니다. 형의 조언대로 고백에 대한 대답은 서두르지 않고 신중히 돌려주기로 했으니까. 그 둘도 졸속 답변보다는 신중한 답변을 반기지 않겠나.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고백을 받은 순간부터 둘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자신이 사라졌다.
‘어떻게 예전처럼 대하냐고.’
나를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아무런 격식 없이 친구처럼 대한다? 그건 예의가 아니다. 자신들의 고백을 가볍게 여기고 거절할 예정이라 생각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나 자신이 예전처럼 대할 자신이 없다.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런지, 얼굴을 보는 것과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긴장된다.
세라의 찬란한 금발이, 사파이어 같은 청안이, 제노비아 누나의 부드러운 은발이, 루비 같은 적안이─
“도련님.”
“어, 어?”
기사의 부름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세라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도로 숙일 뻔했다.
최대한 느릿한 발걸음으로 어기적어기적 움직였다. 세라가 유모와 같이 있다고 들었으니 유모의 방으로 가면 되지만, 도저히 당당히 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솔직하게 말하면 이제는 유모를 볼 용기마저 나지 않는다.
세라는 예전부터 나를 좋아했다 말했고, 유모도 세라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하나뿐인 딸의 짝사랑 상대가 눈치라고는 먼지만큼도 없었다. 그동안 유모가 나를 보며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을 거고, 얼마나 나를 한심하게 생각했을까.
그냥 이대로 도망칠까?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용기가 생길 때까지 버티면 되잖아.
“어디 가?”
그렇게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며 몸을 돌리자마자 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망했네 이거. 현행범으로 잡혀가게 생겼어.
“잠깐 화장실 좀…”
“그래? 같이 가줄까?”
“생각해 보니 굳이 안 가도 될 것 같아.”
빠른 항복에 세라는 배시시 웃으며 나와 팔짱을 꼈다.
이윽고 팔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손발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다. 친구 사이에 팔짱 정도야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인데, 이성 사이라고 생각하니 몸과 마음이 격렬하게 반응한다.
“빨리 가자. 같이 먹으려고 케이크도 가져 왔어.”
“어, 응, 그래.”
나보다 한참이나 약한 세라에게 이끌려 다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제노비아 누나가 현직 제국백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누나도 작위 귀족이 아닌 후계자 신분이었다면, 세라처럼 우리 영지에 기습적으로 방문했겠지.
불행 중 다행이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제노비아 언니가 보내준 거니까 맛있을 때 먹자.”
하지만 세라의 말에 흠칫하고 말았다. 비록 누나의 몸은 제도에 있지만, 그 정신은 케이크를 타고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이다.
심지어 세라가 제노비아 누나를 부르는 호칭이 백작 각하에서 제노비아 언니로 변해 있었다. 대체 언제 변한 거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두렵다. 내가 하루하루를 침묵으로 보내는 사이, 그 둘이 어떤 논의를 나누었는지 공포스러울 정도다.
***
해가 질 즈음이 되자 에리히가 나타났다.
“나 개학까지만 형하고 같이 지내면 안될까?”
미묘하게 떨리는 동공과 간절한 목소리.
왜 저러는지 알 것 같다. 내가 과거 고백 릴레이에 치여 정신적으로 몰린 것처럼 에리히도 정신이 나간 모양이지.
그런 에리히를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돌아가.”
주문하지도 않은 불량 물품은 즉각 반송했다.
건방진 놈. 감히 도망이나 치다니. 네가 그러고도 크라시우스의 남자더냐.
‘제노비아도 영지로 보내야 되나?’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도망이라는 수단을 생각해낸 거다. 포위망을 세라 혼자가 아닌 세라-제노비아 듀오로 구성한다면 도망도 못 칠 터.
아무래도 개학 전, 제노비아를 ‘제국백끼리 친목 도모’ 명목으로 타일글레헨 백작령에 초대해야겠다.
대신 나도 영지에 있어야 하지만, 동생의 결혼을 위한 일인데 그 정도 수고는 감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