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66)
로판 속 공무원 466화(467/945)
오배송 된 불량 물품은 처량한 뒷모습을 보이며 반송됐다. 동생에게 너무 야박한 것 같지만 후회는 없다. 내 저택에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친 애송이 따위가 머무를 공간은 없으니까.
‘나약한 놈.’
차라리 나처럼 동시 결혼 운운했다면 현실과 투쟁하다가 광기에 먹힌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싸우다 미친 것과 싸우지도 않고 도망간 것은 큰 차이가 있다.
– 초대요?
“응.”
그렇기에 나름의 준비를 마친 후, 제노비아에게 연락을 걸었다.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여유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지. 그렇다면 도저히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면 된다. 양쪽에서 포위 당하고도 도망치면 그건 그거대로 대단한 새끼지 않겠나.
“개학하면 몇 달은 만나기 힘들잖아. 동아리 박람회가 있기는 한데, 그래도 개학 전에 얼굴이라도 직접 보는 게 낫지.”
– 저야 초대해주시면 감사한 일이기는 한데…
희미한 다크서클이 감돌고 있던 제노비아의 얼굴에 깊은 고뇌가 자리 잡았다.
이해한다. 심적으로는 내가 제안하기 전부터 에리히를 만나러 가고 싶었을 거다. 물론 제국백이라는 신분 때문에 남의 영지에 거침없이 방문하는 건 힘들지만, 같은 제국백이라는 명분과 소꿉친구라는 친분을 내세우면 그럭저럭 용납할 수 있는 범위다.
그러나 제노비아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요인은 업무다. 현직 제국백이라는 건 현직 제국의회 의원이라는 의미. 심지어 그중 막내인 제노비아는 업무에 치이느라 도저히 에리히를 만나러 갈 시간이 없다.
“하루 정도는 괜찮아. 아버지가 도와주시기로 했거든.”
– 아버지가?
난데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제노비아는 이윽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분께 신세를 질 수는 없습니다!
오죽 당황했으면 평범하게 존대를 하던 제노비아의 말투가 과거의 딱딱한 말투로 복귀했을 정도였다.
이 역시 이해한다. 그만큼 내가 꺼낸 말은 제노비아 입장에서 이 악물고 거절해야 할 일이었으니.
‘예비 시아버지에게 짬처리하는 기분이겠지.’
업무에 치이는 막내 의원이 하루의 시간을 낸다는 건, 그 업무를 누군가 대신 처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그 대리자로 아버지를 지목한 거고.
“괜찮아. 아버지도 에리히의 연애 문제라고 하니 바로 승낙하시더라고. 오히려 일주일 정도 도와주겠다는 걸 겨우 말렸어.”
허나 제노비아에게는 몹시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는 뜨거운 열정으로 내 제안을 받아들이셨다.
– 그 아이의 업무는 내가 처리하마. 어차피 은퇴를 앞에 둔 입장이라 내 앞으로 오는 서류도 적었으니 문제없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 감사 받을 일은 아니다. 연장자가 아이들을 위해 힘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지.
에리히를 돌려보내자마자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 그 짧은 대화에서 아버지의 진심을 느꼈다.
아버지도 말로 표현하지만 않으신 거지 에리히의 눈치와 연애에 대해 걱정이 많으셨던 것 같다. 사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좋으니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소연을 했을 수도 있고, 가문 내 사용인들에 대한 장악력이 뛰어난 아버지니 유모의 고통을 짐작하고 계셨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장남이 결혼했으니 다음은 차남이지.’ 라는 생각이실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아버지가 에리히의 연애에 진심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거절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무례인 거 알지?”
– …네. 감사합니다.
결국 제노비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런 형이 어디 있을까.’
어느새 미소까지 짓고 있는 제노비아를 보니 내가 다 흐뭇했다.
동생 연애에 이렇게 진심인 형도 드물 거다.
연인들과 함께 우르르 영지로 이동했다. 제노비아를 초대한 명분이 제국백끼리의 친목 도모니, 현직 제국백인 내가 영지에 없으면 초대한 명분이 사라져버린다.
“왔니? 어서 들어오렴. 제노비아는 이미 와있단다.”
그렇게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정문에 계시던 어머니는 그 말만 남기고 성으로 들어가셨다.
빠른 인사, 생략한 포옹, 직설적인 정보 전달. 나와 연인들이 영지에 찾아오면 살갑게 맞이해주시는 어머니치고는 너무 딱딱한 반응이었으나, 나도 연인들도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
‘작정하셨구나.’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전사의 기운이 풍겼으니까. 그것도 곧 전장에 참전할 전사의 기운이.
아무래도 아버지가 영지 외부에서 고생 중인 것처럼, 어머니는 영지 내부에서 세라와 제노비아를 적극 지지할 예정인 것 같다. 오히려 이 와중에도 정문까지 나와 우리를 맞이한 것이 신기할 정도.
‘온 세상이 돕는다.’
나 역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 만남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헌납한 아버지, 온화한 귀부인이 아닌 전장에 나선 전사로 돌변한 어머니, 유모 아래 한 몸이 되어 일치단결했을 사용인들.마지막으로 동생 좀 결혼시키겠다고 이 고생 중인 나까지.
모든 걸 동원했다. 에리히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는 전부 때려 박았다.이러고도 에리히가 삽질을 한다면 그건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에리히는 심기체 동정으로 살다가 홀로 죽을 운명이라고.
‘심기체 동정.’
몇 번을 생각해도 미친 단어라 절로 눈을 감고 말았다.무인에게 있어서 심기체의 균형과 발전이 중요한 건 맞는데, 그 균형이 동정일 필요가 있나?
만약 에넨이 에리히에게 그런 운명을 하사한 거라면 너무 가혹하다고 항의하고 싶다. 형은 복자인데 동생은 왜.
***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그 분주함이 마치 내 어리석음을 꾸짖는 것 같았다.
‘내가 사자 입에 대가리를 들이밀었었구나…’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빛을 찾기 위하여 형에게 도망쳤었지만, 내가 마주한 것은 빛이 아니라 심연이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짙고 깊은 심연.
물론 저택에 찾아갔던 나를 돌려보낸 건 원망하지 않는다. 신혼인 형에게 다짜고짜 찾아간 내 잘못이니 당연한 일인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심연이 쫓아오는 게 어디 있냐고.’
차라리 형의 저택에서 제노비아 누나를 만났다면 그건 내 죄가 맞다. 영지에 가만히 있었다면 세라로 끝났을 일을 스스로 키운 거니까.
그런데 형이 제노비아 누나를 초대하는 건 대체 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느긋하게 생각하라며.’
순 거짓말이었다. 느긋하게 생각하라고 말한 사람이 이런 판을 벌이는 게 말이 되나.
순간 작년, 형이 동시 결혼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를 했을 때 말로 두들겨 팼던 업보가 돌아온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혹시 그때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어서 이러는 건가? 감히 동생 주제에 형에게 말대꾸를 했다고 복수하는 건가?
그럴 듯하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런 이유라도 없다면 난 억울해서 살지 못─
“도련님.”
“어, 어?”
유모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트 홀로 가시죠. 간단한 먹을거리도 준비되어 있으니 여기 계시는 것보다는 덜 지루할 겁니다.”
“어, 아, 응. 그럴게.”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유모에게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최대한 유모와 눈을 마주치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도저히 유모를 당당히 볼 용기가 없었으니까.
그 행동에 미묘한 자괴감이 느껴졌다. 설마 내가 유모를 피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련님.”
그런 나를 향해 다시 유모가 입을 열어 흠칫 놀라고 말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괜찮다니, 뭐가?
“도련님이 남들보다 순수하신 건 도련님을 어릴 때부터 돌본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유모는 슬며시 내 손을 잡았다.
“저는 그런 도련님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순수하게 세상을 보는 도련님이 좋습니다.”
유모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세라도 그런 도련님을 좋아하는 겁니다. 눈… 순수함을 단점이라 생각하지 않기에 마음을 품은 겁니다.”
기분 탓인가. 방금 눈치 얘기를 하려다가 급하게 순수함으로 수습한 것 같은데.
그래도 기껏 좋게 얘기해주는 유모를 방해할 수는 없기에 잠자코 듣기만 했다.
“도련님이 그런 면모를 알면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한 그 아이의 잘못도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그 말에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눈치가 없기에 세라가 혼자 앓고 있던 건 내 잘못이다. 내 부족함으로 인해 생긴 사건이다. 그걸 세라의 잘못이라고 치는 건 너무한 일.
“유모, 난─”
“전 두 분을 아들처럼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두 분은 어떠실지 몰라도, 저는 듬직한 아들 둘과 귀여운 딸 하나를 둔 행복한 어미입니다.”
제대로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도로 입을 다물게 되었다.
안다. 잘 알고 있다. 유모가 어떤 마음으로 나와 형을 돌봤는지도, 우리가 아무 탈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건 유모 덕분이라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입을 다문 것이다. 친자식 중 하나를 병으로 보내고, 다른 하나도 허약했던 유모가 우리 형제를 자식처럼 기른 감사함에, 그런 유모의 유일한 딸에게 긴 고통을 줬다는 미안함에.
마지막으로 그 미안함 때문에 유모를 피한 죄책감에.
“그래서 저는 도련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남매 사이에 소란이 있을 수도 있는 거죠.”
작게 웃음을 터뜨린 유모는 내 손등을 토닥였다. 어느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러니 부디 도련님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세요.”
유모의 말에 한참이나 입을 다물었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유모의 조언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더 이상 유모를 보는 게 힘들지 않았고, 세라의 목소리가 들려도 놀라지 않았다. 심지어 누나를 봐도 도망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세라와 제노비아 누나를 동시에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혼자 끙끙거리며 도주 루트를 구상할 필요가 없다.
그래,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뭐지?’
그레이트 홀에서 진행되는 작은 연회. 타일글레헨 백작과 호르펠트 백작의 우호 관계를 위하여 열린 연회.
그 연회에 참석한 세라와 제노비아 누나를 보니 이전과는 다른 감정이 들었다.
‘왜 이러지?’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해할 수 없다. 가슴이 요동치는 건 둘에게 미안함을 가졌을 때도 그랬으나, 지금은 미안함을 밀어낸 상태다. 그런데도 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을 느끼며 마침 한곳에 모인 세라와 누나를 바라봤다.
‘아.’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둘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더욱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