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67)
로판 속 공무원 467화(468/945)
연회가 시작하자마자 최소한의 인사만 나눈 채 다크 템플러 모드로 돌입했다. 이 연회가 제국백끼리의 친목 도모 목적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명분. 이 명분을 지키기 위해 연회장을 누비면 에리히의 연애 전선에 적신호─ 아니, 신호등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그건 안 되지.’
게다가 기껏 시간을 낸 제노비아를 생각해서라도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하는 게 맞다.초대한 제국백이 활발히 움직이면 방문한 제국백도 나와 장단을 맞춰야 하니까.
그렇기에 오랜만에 만난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신들, 제노비아와 함께 방문한 히덴 가문의 가신들과 인사를 나눈 뒤 구석에 처박혀 에리히를 주시했다.
“연회 주인이 숨어있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졸지에 나와 함께 구석에 숨게 된 마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연회를 개최한 주인공이 연회장 구석에 숨어있는 건 확실히 희귀한 일이지. 그리고 연회에 나섰다 하면 철혈공의 막내딸로서 주목을 받은 마르가 이런 조용한 연회를 어디서 겪어봤겠나.
“미안해. 안주인이 되고 처음 여는 연회인데, 첫 연회를 이렇게 써버렸네.”
그런 마르의 뺨에 입술을 맞추며 사과를 했다. 이 연회는 에리히와 세라, 제노비아를 위한 연회이며, 동시에 마르가 타일글레헨 백작부인이 된 후로 처음 개최한 연회기도 하다. 백작부인의 위엄을 과시해도 모자란 상황에서 이러고 있다니, 미안하지 않다면 남편이 아니다.
“괜찮아요. 저를 위한 연회는 다음에 열 수 있지만, 도련님을 위한 연회는 오늘이 아니면 기약할 수 없잖아요?”
“…그건 그렇긴 하지.”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답하는 마르를 보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에리히를 위해 자비로운 마음으로 물러나 준 건 에리히의 형으로서도, 마르의 남편으로서도 정말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사교계에 능통한 마르가 첫 연회를 깔끔히 포기했다? 이건 그만큼 에리히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의미잖아.
‘못난 놈.’
홀로 멀뚱히 서있는 에리히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연회장에 저놈을 걱정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 사람들이 에리히를 한 대씩만 때려도 병상에 누워야 할 거다.
‘응?’
조금씩 타들어가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들고 있던 샴페인을 마시려던 찰나,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에리히는 분명 홀로 서있었으나 시야만큼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몸도 빳빳하게 굳어서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보고 놀란 것처럼.
대체 뭘 봤길래 저러나 싶어 에리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오.”
짧은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에리히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세라와 제노비아가 있었다.
그 모습에 은근한 기대감이 꿈틀거렸다. 패션에 무지한 내가 봐도 세라와 제노비아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상태다.
청순한 느낌의 흰 드레스를 입은 세라, 정열적인 붉은 드레스를 입은 제노비아. 거기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장신구들이 달려있으니, 또래들이 모이는 연회에 강림한다면 단숨에 중심을 꿰찰 수준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에리히도 그 또래 중 하나기는 한 모양이다.
‘먹혔다.’
멍하니 둘을 바라보는 에리히의 얼굴에 미세한 홍조가 보였다. 남자 새끼가 얼굴 붉히는 걸 보는 취미는 없다만, 지금만큼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에리히가 저 둘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조금, 아주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다는 의미니.
그러면 충분하다. 옛날 러브 코미디에나 나올 ‘우린 친구잖아!’ 메타만 벗어난다면 희망이 넘친다. 상대를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인식한다면 그 뒤는 탄탄대로다.
솔직히 세라도 제노비아도 과하면 과했지, 부족한 편은 아니니까. 이성으로 보기 시작한다면 호감은 금방 쌓일 거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만약 이러고도 호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진짜 심기체 동정이야.
“저기, 그런데 칼…”
“응?”
그 와중에 마르가 내 소매를 약하게 잡아당기며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서로 사랑을 가지고 결혼을 하는 게 최선이기는 하지만, 정략혼으로 이어진 다음에 정을 쌓는 방법도 있지 않아요?”
약간의 의문이 담긴 듯한 속삭임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실 마르의 말은 타당하다. 귀족은 연애 결혼보다 정략 결혼이 보편적이고, 그 정략 결혼 상대도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인 경우가 많다. 즉 에리히와 세라, 제노비아는 정략혼으로 이어져도 아무 문제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내가 이 악물고 연애 결혼을 지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쟤가 정략으로 결혼하면 상대를 의무감으로만 대할걸.”
“아…”
쟤는 본인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정략이라는 틀에 갇히면 영원히 그 틀에 갇힐 놈이다. 남편으로서, 소꿉친구로서 애정은 보이겠지만 이성을 향한 애정은 영원히 나오지 못한다.
그건 끔찍한 일이다. 말만 부부지 현재의 소꿉친구 관계와 다를 게 없잖아.
“다행히 어머니도 에리히를 급하게 결혼시킬 생각은 없으시니, 어떻게든 연애 결혼으로 가야지.”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가 계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모의 보필을 받으며 트릭시와 대화 중인 어머니, 리제와 린이 건네는 음식을 건네받으며 미소를 짓는 어머니.
부디 어머니의 인내심이 에리히의 행동력보다 굳건하기를 바란다.
아버지도 연회 진행 상황이 궁금하실 것 같아 잠시 테라스로 나가 통신구를 꺼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가 들으면 기뻐할만한 정보는 확보할 수 있었다.
당연히 첫술에 배가 부른 상황은 생기지 않았으나, 에리히가 세라나 제노비아를 보면 은근히 시선을 돌렸다가 애써 다시 쳐다보는 기색을 몇 번이나 보였다. 평소처럼 단순한 친구로 여겼다면 보일 수 없는 모습이고, 고백을 받은 부담감 때문에 피한다 생각하기에는 밀접하다.
그래, 이제야 제대로 된 스타트 라인에 선 것이다. 아버지께 당당히 전할 낭보로는 충분하다.
– 에리히도 상대를 의식하게 된다면 결국 이어질 거다. 이미 서로에 대해 잘 알고, 부족함이 없는 아이들 아니더냐.
분명 그럴 것인데.
– 이제 게오르크, 그 녀석이 귀찮게 굴지는 않겠어.
어째 내 보고를 전해 들은 아버지의 안색은 말과는 달리 다소 핼쑥해 보였다.
– …아, 미안하구나. 업무가 예상보다 복잡해서 조금 고민 중이었다.
그런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아버지는 씁쓸하게 중얼거리셨다.
의외다. 아무리 제노비아가 시간을 내기 어려울 정도로 업무에 치이는 중이었다지만, 제노비아는 제국의회 의원 중 막내다.
막내기에 업무량 자체는 무수한 짬에 맞아 상당할 수도 있다. 그게 막내의 숙명이니까. 그래도 업무 난이도 자체는 무난할 텐데? 어떤 미친 단체가 신병이나 일병 초 정도인 사람에게 중임을 맡기냐고.
– 내가 업무를 맡겠다고 하니 온갖 서류를 밀어주더구나.
“아.”
허나 이어지는 말에 납득하고 말았다. 신병이나 일병 초 정도의 인력이 사라지고, 그 공백을 베테랑 병장이 메우는 중이다. 그러니 이때다 싶어 다른 의원들이 업무를 몰아준 모양.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대타를 맡았던 아버지는 오랜만에 서류와의 전투를 벌이고 계신 것이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어도 의회는 가지 말아야지.’
그런 아버지를 보며 결심했다. 내가 행정부에서 은퇴하게 된다면 반드시 그 전에 제국백 작위를 자식에게 물려주자. 내가 제국의회 의원으로 활동할 여지를 남기지 말아야지.
사람이 장관까지 갔으면 충분하다. 굳이 의원까지 할 필요는 없다.
***
연회의 분위기가 절정을 넘어 소강에 접어들 무렵, 세라와 함께 그레이트 홀 근처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테라스는 은근히 사람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니 밀담을 나누려면 방이 최고다.
“어땠어?”
“좋았어요.”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짧은 질문, 즉각적인 대답이 오고 갔다.
“저희를 보는 눈빛이 달랐어요. 확실해요.”
상기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쥔 세라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에리히가 우리를 보는 눈빛이 이전과 달라졌다고, 에리히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다고.
나도 동의한다. 평소에는 평온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에리히였다. 우리가 고백한 이후로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거나 거리를 벌렸다.
그런 에리히가 우리를 피하지 않고 바라봤다. 가끔 시선을 돌리기도 했으나, 금방 우리를 쳐다봤다.
‘처음이야.’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얼굴, 그 눈빛. 그동안 에리히를 지켜봐온 나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아마 세라도 처음일 테지.
슬쩍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심호흡을 했다. 이러지 않으면 방을 나가서도 히죽거릴 것 같았으니까.
‘시작은 좋았어.’
이윽고 잠시 기쁨을 밀어두며 앞으로의 일을 떠올렸다.
일단 시작은 좋았다. 에리히에게 우리를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인식시키는 것 자체는 성공했다. 더 이상 우리는 에리히에게 ‘친한 소꿉친구’가 아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좋은 시작을 개학 직전에서야 이루었다는 점. 물론 칼 오빠의 지원이 없었다면 시작조차 이루지 못했겠지만, 기세를 이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맞다.
“…박람회 때까지 잘 부탁해. 나도 최대한 자주 연락하겠지만, 바로 옆에 있는 것보다는 못하니까.”
“맡겨주세요.”
생각을 마치고 다시 입을 열자, 세라도 결연한 각오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세라는 나와 달리 에리히와 함께 아카데미에서 지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기세를 이어 에리히를 옆에서 뒤흔들 예정이며, 그 과정에서 수시로 내 이름도 언급할 예정이다.
육체적 거리가 멀다면 이런 방안이 최선. 세라의 지원과 내 연락이 결합되면 어떻게든 공백의 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을 거다.
***
테라스에서 다시 연회장으로 복귀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에리히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불쾌했다. 애꿎은 걸 찾을 시간에 조금이라도 세라나 제노비아를 봐야─
“아, 형.”
에리히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혹시 세라랑 제노비아 누나 못 봤어? 아까까지는 있었는데, 갑자기 안 보이네.”
그 말에 불쾌했던 기분이 급속도로 녹아내렸다.
‘이 새끼가 먼저 상대를 찾는 수준이 되다니.’
감동했다. 이는 에리히의 눈치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에리히의 연애에게는 위대한 도약이 될 것이다.
“저기 있네. 잠깐 쉬고 있었나 보다.”
마침 방에서 나오는 세라와 제노비아를 발견했기에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에리히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위대한 도약…’
자연스레 나와 멀어지는 에리히를 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내 동생을 지켜봐 줘, 닐 암스트롱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