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68)
로판 속 공무원 468화(469/945)
에리히의 연애에 대해 적극 개입이 아닌 관망으로 스탠스를 변경했다. 개입도 적당한 타이밍에 해야 효과적인 거지, 24시간 내내 개입하면 서로 피곤한 법이다. 만약 피곤함이 누적되어 에리히의 입에서 ‘내가 알아서 한다고!’ 같은 말이 나온다면 나는 화병으로, 에리히는 주먹으로 인한 타박상으로 쓰러질 게 뻔하다.
그래도 다행히 연회를 기점으로 에리히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세라와 제노비아의 말에 따르면 연락도 더 잦아졌고,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말도 몇 번 생각해서 말하는 게 보이는 수준이라나. 그 정도면 내가 관망 상태에 돌입해도 무방하겠지.
희망이 보인다. 작년 1년은 에리히의 눈치 때문에 내다 버린 1년이 되었으나, 올해 1년은 다를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너무 빠르게 샴페인을 터뜨리는 걸 수도 있지만 작년보다 상황이 나아진 건 확실하니까.
– 각하.
나도 모르게 에리히가 결혼식장에 선 모습을 상상하려던 찰나, 통신구 너머에서 들리는 키셀레 자작의 목소리 덕에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너무 정신을 놓고 말았다. 벌써부터 에리히가 결혼하는 모습을 떠올리다니, 막 자대 배치를 받은 이등병 나부랭이 주제에 전역하는 꿈을 꾼 수준 아닌가.
– 혹시 제가 바쁘실 때 연락을 드린 건지요?
아무튼 내가 넋을 놓고 있자, 마침 보고를 위해 연락을 걸었던 키셀레 자작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잠시 다른 생각을 했군. 집사장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조금 움츠러든 키셀레 자작에게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키셀레 자작은 위리디아 백작령에 있는 시간보다 없는 시간이 더 긴 나를 대신하여 영지를 관리하는 집사장. 그런 집사장이 기껏 연락을 준 것이니, 정말 바쁜 일이 있더라도 집사장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옳다.
– 허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안색이 밝아진 집사장은 빠르게 보고를 이어갔다.영지 내 시장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거나, 동부와의 거래도 순탄하게 지속되고 있다거나, 떠돌이 야생마들이얼어버린 강을 타고영지 내에 유입됐다거나.
‘별일 없네.’
보고를 들을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집사장의 보고는 위리디아 백작령의 발전 지표가 우상향을 찍고 있다는 내용이지, 무슨 문제가 터졌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물론 사람 사는 곳이니만큼 아무런 문제가 없을 리는 없겠다만, 나에게 보고가 올라올 정도로 큰 사건만 아니면 된다.
“야생마?”
그런 의미에서 이건 꼭 물어야겠다. 단순히 야생마들이 유입된 걸 내가 알아야 하나? 얘기만 들어보면 북방을 하염없이 떠돌던 것들이 강이 언 김에 넘어온 것 같은데?
– 예, 각하. 그것이…
뒤이은 집사장의 설명에 헛웃음이 나왔다.영지에 들어온 야생마의 숫자는 결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열 필 정도니 북방 전체는커녕 위리디아 내에 있는 말들과 비교해도 한 줌 수준이나, 그 행동이 인상적이었다.
위리디아가 직접 관리하는 목초지에 난입한 야생마들은 그곳의 원주인인 위리디아 말들과 막고라를 펼쳤다. 그리고 당당히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 이후로는 외부마 주제에 목초지에 당당히 자리 잡아 풀을 뜯거나, 늘어지게 잠을 자거나, 자기들끼리 놀거나, 혹은 위리디아의 말들과 짝짓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깡패냐고.’
어이가 없다. 그냥 북방에나 있을 것이지 왜 위리디아까지 내려와서 깽판을 치는 건지. 혹시 도장 깨기라도 하면서 다니는 건가?
– 처음에는 쫓아내려고 했지만 사람이 위협을 해도 거들떠도 보지 않고, 하다못해 포획을 하려고 하면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약은 녀석들이로군.”
미묘한 피곤이 섞인 집사장의 말에 다시 실소가 나왔다. 글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이겼다는 것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지능도 보통 수준이 아닌 것 같다.
– 해서 각하께 건의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게.”
– 근본을 알 수 없는 야생마이나, 체격과 능력만큼은 확실한 것들입니다. 차라리 목초지에 방치하여 알아서 교배를 하게 두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나니 집사장이 이 야생마 사건을 굳이 보고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말은 군사적으로 용이하게 쓸 수 있는 전략물자이며, 성능이 좋은 명마는 고오오-급 물자로 취급된다. 그렇기에 뛰어난 말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려 명마를 양산하는 건 각국, 각 영지의 주요 정책이나 다름없다.
헌데 그 뿌리를 알 수 없는 야생마의 유전자를 퍼뜨린다? 당장 보기에는 좋아 보여도,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결함도 같이 퍼지면 상당히 귀찮아진다. 아무리 집사장이어도 백작인 나에게 보고 없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확신할 수 있겠나?”
잠시 고민하다가 집사장에게 물었다. 전략물자에 흠이 생길 수도 있는 선택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사실 흠이 생겨도 큰 문제는 없다. 유전자가 퍼져봤자 위리디아 내로 국한될 것이며, 위리디아 전체는 북방과 비교하면 소수에 불과하다. 이 유전자 가챠가 실패하면 똥 밟았다 생각하고 북방의 명마들을 들여와 다시 복구하면 그만이다. 귀찮고 돈도 나가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
허나 감당할 수 있다고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도 곤란하다. 이상한 곳에서 인력과 예산을 낭비하면 정말 필요할 때 못 쓰잖아.
– 예. 지난 두 달간 지켜본 결과, 시도할 가치는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집사장은 거침없이 답했다.
흐으으으음.
“그럼 해보도록 하지.”
– 감사합니다, 각하.
집사장이 저렇게 말하니 그냥 승인해줬다.
생각해 보면 나름 백작령 2인자인 집사장이 처음으로 자발적 아이디어를 낸 건데, 그걸 너무 매정하게 무시하면 집사장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 안 그래도 신진 귀족이라 귀족의 권위보다는 관료의 권위로 버티고 있을 텐데, 그걸 내 손으로 꺾기는 좀.
“참, 집사장. 새로 들어온 관료들은 어떤가?”
아무튼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집사장에게 슬쩍 운을 뗐다.
– 아직 젊고 경험이 부족하여 현장과의 괴리감에 난항을 겪고 있으나, 그를 능가하는 능력과 열정이 있습니다. 경험이야 시간이 해결할 문제니 훌륭한 관료가 될 겁니다.
“극찬이로군.”
쿡 찌르자마자 술술 나오는 칭찬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론 신입 관료들 중에는 내가 추천장을 써준 학생회 간부 출신들도 있으니 혹독한 평가를 하기 애매하겠지만,
‘겸사겸사 자식 칭찬도 하는 거지.’
집사장의 딸도 신입 관료 명단에 있었다. 내가 추천한 인재들을 칭찬하는 겸 자기 딸도 칭찬하는 것. 이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그러면 이번 일을 할 때 신입도 몇 명 데려다가 하게. 아직 빈 자리가 많으니 있는 사람들로 노력해야지.”
–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집사장은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미묘한 흥분이 감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이 정도 말은 금방 이해하는구나.
‘못 알아들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만.’
집사장 자리는 주인이 있지만, 애석하게도 아직 무수한 요직은 공백인 상태다. 그 요직들을 집사장이 겸임하거나 나름 짬이 찬 관료가 대행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
그런데 그 빈자리를 언급하며 있는 사람들로 노력한다는 말을 했다. 심지어 신입들도 몇 명 굴리라는 말과 함께. 최소한의 눈치가 있다면 젊고 신입인 관료라도 요직에 오를 수 있다는 걸 눈치챘을 터.
‘딸도 요직에 앉을 기회니 열심히 하겠지.’
그러면 충분하다. 집사장은 내 가신으로서는 물론, 한 딸의 아비로서도 최선을 다해 이 유전자 가챠에 사활을 던질 것이다. 이 일만 성공적으로 끝나면 딸이 출세하는 건데 어느 아비가 소홀히 하겠나.가족이 걸리면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보이는 법이다.
‘잘 끝났으면 좋겠네.’
은근히 기대된다. 이 사업이 제대로 끝나면 위리디아의 말들은 한혈마 같은 취급을 받지 않을까? 유독 뛰어난 것들은 오추마나 적토마 같은 위용도 뽐내고.
이왕이면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요직 수준이 아니라 작위도 줄 의향이 있다.
사적으로는 동생의 연애 사업을 돕고, 공적으로는 영지의 사업을 지시했다. 신혼 휴가를 받았음에도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신혼 휴가가 끝나가고 있었다.
“아카데미 가기 싫어.”
마르의 무릎에 누운 채 농담 반 진심 반의 마음으로 중얼거리자 마르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스물이 넘은 유부남이 부인한테 학교 가기 싫다고 칭얼거리는 상황이니까. 내가 마르 입장이었어도 웃었을 거다.
“불평해도 안 돼요. 아카데미는 가야죠.”
“어차피 가봤자 나는 졸업장도 못 받잖아.”
그 말에 마르가 꾹 입술을 깨물었다. 이 자학성 개그에도 웃으면 내 마음에 상처가 갈 것 같아 참는 모양.
고마운 배려지만 더 마음이 아프다. 이럴 때는 ‘입학식도 안 했으니 당연하죠.’ 라는 말로 반격하면 되는 건데.
“그래도 숙소에서 지내는 건 아니라 다행이지. 하마터면 신혼인데 각방 생활할 뻔했어.”
“그랬다면 저도 아카데미로 갔을 거예요.”
빠르게 화제를 돌리자 마르도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줬다.
조금 서글펐다. 졸업장 드립이 마르의 웃음벨을 제대로 자극했었구나.
“…사실 대범한 척 아카데미에 있으라고 하고 싶지만, 칼을 하루라도 못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서요. 미안해요.”
이윽고 내 머리를 쓰다듬던 마르가 그 말과 함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연인들과의 논의 끝에 올해 아카데미 파견은 ‘나와 트릭시는 매일 텔레포트로 출퇴근, 리제와 린은 기숙사에 생활’로 합의를 보았다. 트릭시라는 대마법사가 있기에 가능한 사치스러운 방식.
그렇기에 마르는 은근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괜히 자기 때문에 나와 트릭시가 귀찮아지는 건 아닌가, 하는 그런 죄책감을.
“무슨 소리야. 아카데미에 있으라고 했으면 서운했지.”
“후후, 그런가요?”
살포시 미소 짓는 마르를 보니 마르가 리제, 린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이 아쉬웠다. 마르도 학생이었다면 걱정할 필요 없─
‘결혼을 못 했겠구나.’
생각해 보니 마르가 학생이었다면 아직도 미혼 상태였을 거다. 장점과 단점이 확실하네.
“퇴근은 동아리 시간이 끝나면 바로 하는 거죠? 저녁 식사는 그때 맞춰서… 우읍!”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는 마르의 모습에 급히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흥분과 기대감이 솟구쳤다. 예전이라면 혹시 먹은 게 잘못됐나 하고 걱정했겠지만, 이 시기에 나는 헛구역질이라면 짚이는 게 하나 있다.
“마, 마르, 괜찮아?”
그래도 흥분을 억누르며 안부부터 물었다. 내 짐작이 단순한 설레발일 수도 있으니까. 진짜 속이 안 좋아서 이러는 걸 수도 있어.
허나 마르의 표정을 보니, 마르도 나와 같은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티티, 가서 집사 불러와.”
– 왕!
구석에서 쿠션을 물어뜯으며 놀고 있던 티티가 내 말을 듣고 뛰쳐나갔다.
똑똑한 녀석이니 금방 찾아서 데려올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