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70)
로판 속 공무원 470화(471/945)
퇴근하고 싶다.
아까 전에 출근했지만 격렬하게 퇴근이 하고 싶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망설임 없이 질문하며, 의심을 품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이 배움의 장소에서 가르침은 동등합니다. 동등한 가르침으로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느냐는 학생 스스로의 몫입니다.”
열심히 개학 기념 연설을 하는 교장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솔직히 훈화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임산부 아내랑 떨어져 있는데 아무리 좋은 말을 한들 귀에 들어오겠나.
애초에 나는 학생이 아니니 훈화 내용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지만.
“여러분이 언젠가 인생을 돌아볼 때, 3년의 학창 생활이 괜찮고 의미 있는 시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교장은 학생들의 박수를 받으며 물러났다. 그 뒤를 이어 교감, 각 학부 수석 교사들이 훈화를 이어갔다.
훈화 내용 중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재작년, 작년에 비해 올해 아카데미 신입생들은 평범한 편이었으니까. 굳이 교직원들이 긴장할 필요는 없지.
물론 올해 신입생 중에서도 타국 학생과 마법사 비율이 높은 특이사항이 존재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작년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단순히 숫자만 늘어난 수준이면 아카데미가 감당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좀 많긴 하네.’
하지만 뒤이어 단상에 오른 트릭시에게 유독 열렬한 박수를 보내는 학생들을 보니, 단순히 ‘늘었다’라는 말로 퉁칠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좀 어마어마하게 늘었구나.
하긴. 트릭시가 내년부터는 파견 강사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을 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대륙 각지에 퍼진 마법사들 입장에서는 올해가 마지막 기회로 보였겠지. 정말 처절하게 입학 신청서를 냈을 거다.
“역시 각하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는군요.”
멍하니 트릭시의 뒷모습을 보는 사이, 내 옆에 앉은 교감이 작게 속삭였다.
“같은 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냥 같은 제국인이라 자랑스러운 거면 각하께서 서운해하시겠군요.”
“이런, 제가 실언을 했군요. 비밀로 해주십시오.”
교감의 말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나와 트릭시의 관계는 예비부부라는 끈끈한 관계. 교감의 말처럼 예비부부를 같은 제국인 수준으로 격하한다면 트릭시가 서운해할 수도 있다.
“당연히 비밀로 해야지요. 축하를 받아도 모자란 분을 괴롭힐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은 교감은 작게 고개를 숙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둘도 없을 보물을 얻으셨다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교감의 축하 인사에 안 그래도 올라가있던 입꼬리가 더더욱 승천했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축하 인사가 나올수록, 나한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
‘잠깐만.’
그런데 교감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직 아카데미 사람들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딱히 숨기려는 생각은 아니지만 마르의 임신은 개학 직전에 알게 된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알릴 정신도 없었고, 기껏 정신을 차린 후에는 가족들에게 알리느라 바빠 아직 아카데미까지 순번이 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아카데미 교감인 분께 보물이라는 말을 들은 아이니, 분명 총명한 아이로 자라겠군요.”
“하하, 민망한 말씀입니다.”
허나 기껏 축하를 건네는 사람 앞에서 침묵하는 건 예의가 아니기에 자연스레 감사를 표했다.
게다가 내가 말하기도 전에 소문이 퍼진 거라면 나도 편한 일이지. 일일이 말하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거잖아.
‘누구지?’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다. 대체 누가 확성기 역할을 한 거지?
아버지가 자랑을 할 상대면 제국의회 의원들 정도인데, 의원들은 가진 권력과 별개로 의회에 박혀사는 존재들이라 빠른 소문을 퍼뜨리기에는 다소 부적합하다. 심지어 어머니도 마르가 백작부인이 된 이후부터 사교계와 다소 거리를 둔다고 들었고.
…
‘장인어른이네.’
자연스럽게 후보는 장인어른만 남았다. 아버지랑 어머니가 아니면 장인어른밖에 없지.
생각해 보면 장인어른은 마르가 막 태어났을 시절, 늦둥이 딸을 온 사교계에 자랑하여 마르가 ‘바렌티의 보물’이라는 별명을 갖는 데 큰 활약을 하신 분이다. 그 막내가 자식을 가졌으니 사방팔방에 알릴 당위성은 충분.
마음이 편해졌다. 확성기의 정체가 장인어른이면 고민할 것도 없다.
‘온 제국이 다 알겠어.’
어쩌면 국경 너머까지 퍼졌을 수도 있다.
***
며칠 전, 상당히 흥미로운 정보를 접했다.
“장관에게 자식이 생겼다고요?”
“예, 폐하. 이제 4주라고 하옵니다.”
장인어른에게 북방 주둔군에 대한 보고를 들을 겸 마련한 자리. 그 자리에서 공적인 보고를 마친 장인어른은 덤덤한 말투로 어마어마한 정보를 입에 담았었다.
장관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정보를, 크라시우스 가문과 바렌티 가문의 피를 동시에 지닌 아이가 생겼다는 정보를.
“철혈공이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누가 보면 처음으로 손주를 보는 줄 알겠습니다.”
너털웃음을 짓는 장인어른의 말에 나도 따라 웃은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아주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직 제국백이자 장관 내정자가 첫아이를 가졌으면 응당 황제에게 보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마땅한 절차를 잊어서 건너 건너 듣게 하다니. 이는 충신의 행동이 아니다.
그렇기에 궁내성 장관에게 정보를 흘렸다. 감찰성 장관의 부인이 회임을 하였으니 좋은 선물을 준비하라고.
그 뒤는 내가 나서지 않아도 순조롭게 흘러갔다. 궁내성 장관은 각 성의 장관들에게 회임 사실을 알려주고, 장관들은 휘하 부장과 지인들에게 알려줬다. 행정부를 중심으로 회임 사실이 퍼지니 제국 전체를 뒤덮는 건 순식간이었다.
“황태녀와 한 살 차이인 동생이 태어나겠군요.”
“그렇구려. 이거 참, 대부가 대녀에게 좋은 친구까지 주는군.”
활짝 웃으며 기뻐하는 황후를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황후의 말처럼 장관의 자식이 무사히 태어나면 사랑하는 샤를로테와 한 살 차이인 동생이 되는 것이다. 대부의 자식이라 서로 만나게 할 명분도 충분하니,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거고.
‘차기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주라.’
황태녀에게 다가가 조만간 동생이 생길 거라 말하는 황후를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미 장관이 여섯이나 되는 부인을 들이며 크라시우스 가문은 여러 고위 가문과 관계를 맺은 상태다. 헌데 장관이 여섯 부인들 사이에서 수많은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이 다시 결혼을 하면 크라시우스 가문과 얽힌 가문은 급속도로 늘어날 터.
‘그 중심에 설 아이.’
또한 혼인 인맥의 정점, 중심에는 남매 중 첫째인 아이가 서게 될 것이다. 첫째가 차기 사령탑이 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장관보다 거대한 가문을 이끌 수도 있지.’
심지어 장관이 심은 혼인이라는 씨앗은 자식 대에 화려하게 꽃피울 가능성이 높다. 후손이 3대, 4대까지 넘어가면 혈육 간의 연계가 느슨해지지만, 남매나 조카 정도의 관계면 그럭저럭 한 세력이라고 봐도 무방하니.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군.’
수십 년 후의 크라시우스 파벌을 상상할수록 그런 결론만 나온다.
제발 장관의 자식들도 장관처럼 충성스럽고 온화한 성향이기를.그렇지 않다면 기껏 반석 위에 오른 황실과 제국의 권위에 잡음이 생길 수도 있다.
“황후. 조만간 타일글레헨 백작부인에게 황후궁의 시녀들을 보내는 건 어떻겠소? 황후가 임신 중일 때 곁에서 도운 자들이니, 백작부인을 능히 도울 수 있을 거요.”
“그렇게 하면 백작부인도 기뻐할 겁니다.”
잠시 고민한 끝에 말을 꺼내자, 황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장관의 부인에게, 훗날 태어날 장관의 아이에게 이런 식으로 빚을 쌓아두면 언젠가는 효과를 보겠지.
그리고 정치적 입장을 떠나 딸의 대부가 처음으로 보는 자식 아닌가. 이런 호의 정도는 얼마든지 베풀 수 있다.
‘…태어나면 연회라도 열까.’
일개 귀족 자제의 탄생을 기념하여 황실이 직접 여는 연회라. 장관이 알면 기뻐서 몸을 비틀 일이다.
‘좋군.’
반드시 해야겠다. 친애하는 장관을 위해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
진짜 국경 너머까지 임신 소식이 퍼질 줄은 몰랐다.
“축하드립니다, 고문 선생! 역시 대륙 제일의 무인이라 그런지 힘이 대단하군요!”
동아리 시간이 되자마자 류티스는 놀리는 건지 축하하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는 말과 함께 난입했다.
무인이라 그런지 힘이 대단하다는 건 무슨 말인데. 내가 칼질 잘 하는 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흐으, 개학 전에 들었다면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아쉽지만 선물은 다음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하지만 뒤이은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국경 너머에서 소식을 접한 게 아니라 아카데미에 와서 알게 된 거구나.
“말로도 충분하니 무리하지는 마라.”
“그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최고로 준비하면 되겠군요!”
편안한 마음으로 의례적인 거절을 보였으나 당연히 기각됐다.
그래, 마음대로 준비해라. 이미 로벤스 왕가 문장이 박힌 선물도 받았는데 뭔들 못 받을까.
“방학 사이에 축하할 일이 많이 생겼군요. 결혼에 시복에 회임이라.”
낄낄거리는 류티스 다음으로 이번에는 라테르가 입을 열었다. 그저 재밌는 류티스와 달리 이 겹경사에 살짝 당혹감을 느끼는 것 같은 표정.
“시복 기념 선물입니다. 회임 선물은 저도 다음에 준비하겠습니다.”
“과분한 선물이로군. 고맙다.’
라테르가 건네는 만년필을 받아 품 속에 챙겼다.
만년필에 오스티아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것 같았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싶다. 이런 거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그리고 이건 네 거다. 정식으로 후작이 됐다고 들었는데, 졸업하면 제법 바쁘게 지내겠어.”
“하하, 감수해야 할 일이죠. 아무튼 감사히 쓰겠습니다.”
이윽고 라테르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아인테르에게 건네주었다. 앞으로바쁘게 지낼 테니 주는 시계라니. 쟤도 은근히 티배깅 할 줄 아는구나.
그렇게 선물과 덕담이 오고 가며 훈훈한 분위기가 풍겼다.
“크흠, 흠.”
“…….”
딱 5분 정도만.
최대한 유쾌한 분위기를 내던 부원들은 이내 분위기를 유지할 기력이 바닥났는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거나 고개를 돌렸다.
이해한다. 내가 부원들 입장이었다면 같은 행동을 했을 것 같으니.
“왜.”
“아니, 아무것도.”
슬며시 에리히에게 시선을 돌리자 에리히는 퉁명스러운 단답을 내뱉었다.
건방진 행동이지만 이해한다. 저 퉁명스러움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발악이었으니까.
‘사이 좋네.’
에리히에게 착 달라붙어 팔짱을 끼고 있는 세라를 보니 흐뭇했다.
장하다, 우리 예비 제수. 그렇게 남들 앞에서도 당당히 애정 표현을 보이면 기정사실이 되는 거야.
“…고문 선생의 아이가 태어날 즈음이면 새 결혼식이 열리겠군요.”
류티스의 중얼거림에 에리히는 흠칫했고, 세라는 헤실헤실 웃음을 보였다.
장하다, 류티스. 오늘만큼은 나도 네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