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71)
로판 속 공무원 471화(472/945)
본래 방학이란 학업으로 고생한 몸과 머리에 휴식을 줘야 하는 귀중한 시간이나, 안타깝게도 이번 겨울 방학은 휴식은커녕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고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을 준비해야 했고, 아인테르가 후작위를 받은 것에 대한 축하 선물도 준비해야 했으니까.심지어 고문과 마르게타 공─ 아니, 타일글레헨 백작부인이 시복되었으니 그에 대한 선물도 준비하는 것이 도리. 덕분에 방학 동안 격에 맞고 부담도 가지 않을만한 선물을 준비하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만약 데면데면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라면 적당히 시종들에게 맡겼겠으나, 고문과 백작부인, 아인테르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알고 지낸 지인이다. 그런 상대에게 줄 선물도 대충 정한다면 누구에게 정성을 쏟을 수 있겠는가.
“결혼 선물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좋습니다. 가문과 가문이 이어지는 경사에 소박한 선물을 보내면 도리어 마음이 상하는 법이니까요.”
“후작에게는 가볍게 보내면 될 것 같습니다. 황제의 동생이 타국의 왕자와 너무 긴밀하다는 소문이 돌면 서로 곤란하겠죠. 물론 품질은 고급으로 해야 합니다.”
“시복 선물은 검소한 게 좋지 않을까요? 여명 교단은 사치를 지양하는 편이니 복자가 화려한 선물을 받으면 좀…”
그래도 다행인 점은 레이첼의 조언으로 어떤 선물이 좋을지 기준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시종들과 달리 레이첼은 아카데미 학생이기도 하기에 고문과 아인테르를 직접 본 경험이 있다. 그 덕분에 둘의 성향, 입지에 맞는 선물을 훌륭히 조언해 줬었지.
“과분한 선물이로군. 고맙다.”
“하하, 감수해야 할 일이죠. 아무튼 감사히 쓰겠습니다.”
그 결과, 고문도 아인테르도 만족한 기색을 보이며 선물을 받았다. 역시 레이첼의 조언은 언제나 옳은 결과를 만들어준다.
그렇기에 아카데미에 오자마자 타일글레헨 백작부인의 회임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떠오른 사람이 레이첼이었다. 본국이 아닌 아카데미에 있으니 최고의 선물을 준비하는 건 어렵겠으나, 레이첼이 있다면 적어도 격에 맞는 선물 정도는 준비할 수 있을 테니.
방학 때도 이런저런 조언을 구한 주제에 아카데미에서도 괴롭히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인의 회임을 어찌 그냥 넘어가겠는가.
‘허.’
하지만 레이첼을 조금, 조금 더 괴롭히는 미래가 보였다. 아무래도 회임 선물만 준비하고 끝날 것 같지 않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세라와 팔짱을 낀 상태로 딱딱하게 굳은 에리히를 보니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걸 본 기분이다.
물론 세라가 에리히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미 동아리 내에서도 에리히만 빼고 전부 알고 있었으며, 어쩌면 아카데미 전원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리히만 빼고.
그런데 그런 에리히가 부끄럽고 난감한 기색을 보이고 있다. 눈치라고는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아 세라의 수줍은 접촉에도 웃던 에리히가, 세라의 애타는 눈길에도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리히가 얼굴을 붉히고 있다.
“…고문 선생의 아이가 태어날 즈음이면 새 결혼식이 열리겠군요.”
류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저 모습을 보면 1, 2년 내에 에리히의 혼인이라는 괴랄한 소식을 접할지도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에리히의 파멸적인 눈치를 보고 있을 때는 제발 정신을 차렸으면 했는데, 막상 저러고 있는 걸 보니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저놈이 결혼이라니.’
사실 아직도 쭈뼛거리는 걸 보면 결혼은커녕 정식 연애 단계에도 진입하지 못한 것 같지만, 충격적인 건 매한가지다. 우리 중 최약체라고 생각했던 놈이 어느새 가장 앞서나가고 있다.
자괴감이 든다. 내가, 저 녀석보다 못하다고?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건지.’
진심으로 한탄스럽다.
동아리 시간이 끝난 후, 레이첼에게 연락을 걸었다.
– 하디네르 남작이 말입니까?
미세한 당혹감이 섞인 레이첼의 목소리에 침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녀석 선물도 미리 준비해야 할 것 같다.”
– 세상에.
멍하니 중얼거리는 레이첼의 모습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역시 나만 충격을 받은 게 아니었다. 에리히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전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맞다.
그리고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진 자괴감도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에리히가 극적으로 눈치를 자력 쟁취하는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높은 확률로 보다 못한 고문이 직접 개입해서 억지로 각성시킨 거겠지.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니 반드시 그럴 거다.
…그게 아니면 나는 정말 에리히보다 못한 놈이 되어버린다. 그것만은 싫다.
“그런 놈도 짝이 생기는데.”
나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사실 고문이 개입했든 아니든 에리히에게 짝이 생기기 직전이라는 건 매한가지다. 나와 다르게, 무려 둘이나.
– 저하께서는 왕실과 왕국의 안정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신 겁니다. 하디네르 남작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내 중얼거림에 레이첼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위로를 건넸다.
레이첼의 말이 맞기는 하다. 내 능력 때문에 간간이 나를 세자로 삼으면 어떻겠냐는 말이 나오는 판국이다. 그런 내가 대귀족의 영애와 혼인을 맺으면 막강한 지지세력이 생기는 것이고, 세자 교체 여론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렇기에 옛날부터 내 주변인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가문의 위세가 막강한 인물들을,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을, 야심이 상당한 인물들을 하나둘 밀어내고 최소한의 시종과 호위 인력만 남겼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이 제국 아카데미까지 왔고.
생각해 보면 내가 루이제에게 반했던 이유도 루이제의 신분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제국 남작가의 영애와 결혼한들, 유벤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을 테니.
‘설마 마종공의 제자일 줄은 몰랐지만.’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레이첼을 바라봤다.형님의 계승권을 위해 주변을 쳐내고, 나와 함께해 줄 상대조차 본능적으로 안전한 인물을 골랐다. 그렇게 눈치를 보고 납작 엎드리며 살아온 삶이다.
허나 그런 나조차 레이첼은 잘라낼 수 없었다.어린 시절부터 어울린 친구를 차마 버릴 수 없었으니까.
‘어떻게든 레이첼은 곁에 둘 수 있었지.’
다행히 레이첼이 속한 소르타 가문은 딱히 위세가 높은 가문이 아니었고, 레이첼의 능력도 우수할지언정 손꼽히는 천재 수준은 아니었기에 계속 인연을 이어올 수 있었다.
“내 세라는 너인 것 같군.”
– 예?
그 말에 레이첼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런.’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오해하기에 충분한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야 동아리에서 에리히의 ‘연인’이 아닌 ‘소꿉친구’인 세라를 보았기에 이런 말이 나오는 거지만, 레이첼은 방금 에리히와 세라가 연인이 되기 직전이라는 걸 들은 상황이다.
“나한테 소꿉친구라고 할 상대는 너밖에 없지 않나.”
– 아, 예, 그렇죠. 제가 저하께 유일한 친구죠.
유일한 친구가 아니라 유일한 소꿉친구다. 단순한 친구 정도는 동아리 안에도 몇 명 있다.
하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를 겨우 살렸는데, 도로 바닥에 처박을 수는 없─
– 그럼 조만간 레이첼 오스티아가 될 수도 있겠군요.
“뭣.”
자신을 놀라게 한 복수를 하는 것인지, 갑자기 강력한 반격이 튀어나와 몸이 굳어버렸다.
오스티아라니. 레이첼이 내 성을 쓴다는 건…
– 농담입니다.
“당, 연히 그렇겠지.”
픽 웃음을 흘린 레이첼의 말에 최대한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조금 더듬어버렸지만 티는 안 났을 거라 믿는다.
***
퇴근은 인류가 만든 개념 중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개념임이 틀림없다.
“마르!”
트릭시와 함께 저택으로 복귀하자마자 마르가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매일매일 아내를 만날 수 있다니, 텔레포트가 없었다면 상상도 못할 사치야.
“어서 와요, 칼.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 왕!
방에 들어가니 침대에 걸터앉아 미소를 짓는 마르, 마르의 발치에 앉아있던 티티가 반겨줬다.
그리고 뱃속에 있는 우리 아이도 아빠를 향해 인사를 한 것 같다. 아주 미세하게 마르의 배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으니까.
그래, 분명 움직였다. 중요한 건 움직였다고 믿는 마음.
“잘 있었어?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 괜찮아요. 사용인들이 세심하게 신경 써주더라고요.”
그렇게 말한 마르는 양팔을 벌렸다. 조용히 하고 어서 안기라는 듯이.
그 당당하고 직설적인 신호에 최대한 조심히 마르를 안았다. 얼굴과 가슴은 서로 닿을지언정 배는 닿지 않게. 혹시 우리 아이가 아빠한테 눌려서 답답해하면 어떡해.
“우리 아이도 아빠한테 안기고 싶대요.”
“그럼 해야지.”
빠르게 배까지 닿게 했다.벌써부터 아빠 품을 좋아하다니, 효자인지 효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착한 애네.
“참, 그런데 칼.”
“응. 말해.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우리 아이, 태명은 뭐라고 지을까요?”
그 말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계속 아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하나뿐인 보물을 너무 성의 없이 부르는 것 같아요.”
설득력 넘치는 말이라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지금 헥헥거리는 티티에게도 이름이 있거늘, 우리 보물에게 태명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겠나.
“혹시 칼이 마음에 둔 이름이 있나요?”
“나, 나?”
“네. 칼이 아빠잖아요.”
어느새 마르를 끌어안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름, 내 첫 자식에게 짓는 첫 이름.비록 태명이지만 앞으로 9개월 정도는 부를 아름다운 이름.
‘뭐가 좋지?’
애석하게도 당장 떠오르지는 않았다. 최근에 티티 이름을 지을 때 무시당한 것이 트라우마가 된 건가.
그래도 최대한 고민해 보자. 첫 자식의 태명을 짓는 건 마르여도 욕심이 났을 추억이지 않나. 마르는 그 추억을 나에게 양보한 거다.
‘으으으음.’
태명… 첫 자식… 태명… 나와 마르의 아이…
태명… 칼… 마르…
크…
‘아니 시발.’
황급히 혀를 깨물며 생각을 멈췄다.
하마터면 부의 재분배를 주장할 아이가 탄생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