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72)
로판 속 공무원 472화(473/945)
차마 생각해서는 안 될 이름을 태명으로 떠올린 후부터, 내 머리에는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마르크… 아무튼 그 이름 때문에 도저히 다른 태명이 생각나지 않았다.
‘망할.’
참담한 심정에 눈을 감고 말았다.당장 내 머리에서 나가 이 빨갱이. 왜 남의 자식 태명 짓는데 찾아와서 분탕질이야.
“당장 생각하기는 어렵죠?”
그렇게 강제 침묵 상태에 빠진 나를 보며 마르가 쿡쿡 웃었다. 아무래도 첫아이의 태명을 짓는 것이라 고민에 빠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응, 조금 어렵네. 뭐가 좋을지 모르겠어.”
오해지만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머리를 장악한 유령은 빙의 전 세계를 주름 잡던 유령이다. 마르에게 설명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설령 이해하더라도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푸르고도 푸른 피를 타고난 우리 아이에게 그런 이름을 붙이다니. 마르가 정색해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일 아닌가.
“그럼 제가 지어도 괜찮을까요?”
“당연히 괜찮지. 나보다 마르가 더 예쁜 이름을 지을 텐데.”
뒤이은 말에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마르에게 맡기는 게 옳다. 무슨 태명이 나오든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좋겠지.
“첫눈이는 어때요?”
“응?”
하지만 예상 외의 단어가 나왔다.
사람 이름이, 첫눈이?
“어, 그, 음…”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사람에게 붙일만한 이름은 아니지만, 마르의 표정을 보니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저 태명을 원한다는 건데.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기껏 아이디어를 내준 마르에게 ‘그건 좀.’이라며 난색을 보여야 하나? 아니면 우리 아이에게 첫눈이라는 엄청난 이름을 순순히 붙여야 하나?
어렵다. 전자를 택하면 남편으로서 못할 짓이고, 후자를 택하면 자식에게 죄를 짓는 꼴이다.
“푸흡.”
차마 선택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사이, 마르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름이 아니라 임시로 쓸 태명이잖아요. 이렇게 일상 단어를 붙여도 상관없어요.”
내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눈치 챈 마르는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구나. 태명은 진짜 사람 이름처럼 지을 필요가 없구나.
‘다른 태명을 들어봤어야 알지.’
애석하게도 빙의 전 나는 태명이라는 것과 거리가 먼 존재였다. 결혼을 한 적이 없으니 태명을 지을 일도 없었고, 부모가 없는 탓에 내 태명조차 모르고 살았으니까. 그래서태명도 정상적인 이름처럼 지어야 하는 줄 알았다.
민망하다. 이거 여차했으면 평범한 태명을 생각하던 마르에게 페르디난트니 막시밀리안이니 하는 이름을 말할 뻔했잖아.
“겨울에 우리 곁에 찾아온 아이고, 첫눈이 내릴 즈음에 태어날 아이니까요. 첫눈이라는 이름이 좋을 것 같아요.”
“응. 첫눈이, 좋네. 그걸로 하자.”
마르의 부연 설명에 마주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
부디 건강하게, 아름다운 첫눈과 함께 태어났으면 하는 우리 보물. 첫눈이라는 이름을 가지기에 딱이다.
“둘째 태명은 단풍이가 되겠어.”
“네?”
내 말에 눈을 깜빡이던 마르는 이윽고 그 의미를 깨달았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열심히 노력하면 얼추 그쯤이겠지?”
“그, 그렇, 겠죠?”
다행히 싫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
개학을 한 지도 며칠이나 지났다.
이는 에리히가 세라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거리는 모습도 며칠 동안이나 봤다는 의미다.
‘거참.’
연신 검을 휘두르다가 결국 헛웃음이 나왔다. 아카데미 1년 동안 진전이 없던 그 둘의 관계가, 고작 겨울 방학 동안 변화를 이루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안타깝다. 내가 귀국하지만 않았어도 둘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걸 실시간으로 봤을 텐데. 이럴 때는 아르메인의 왕자라는 사실이 아쉽다.
그리고 미약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에리히, 그 상도덕도 없는 놈. 1년 동안 보는 사람의 속을 태웠다면 마땅히 그 사람들 앞에서 연애 사실을 공표해야지, 우리가 없는 사이에 진전을 이루었다고? 그래놓고 통신구로 연락 하나 안 줘?
‘심지어 정식으로 교제하는 것도 아니라니.’
계속해서 실소가 나왔다. 이미 반쯤─ 아니, 그 이상 넘어간 것 같은데 순순히 세라와의 교제를 인정하는 게 도리 아닌가.
내가 친우에게 이런 말을 쓰고 싶지는 않으나 건방지기 짝이 없다. 솔직히 에리히가 세라의 애정에 갈등할 자격이 있나? 자기 좋다는 사람이 있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는 게 맞지 않나?
몇 번을 생각해도 탄식이 나온다. 제발 1학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에리히와 세라가 당당한 연인 관계를 이룩하기를. 만약 1학기가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졸업 전까지는 이루기를.
‘못 보고 졸업하면 평생 한이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내가 제국에 올 일이 없다. 그러니 반드시, 반드시 졸업 전에는 일이 끝나야 한다. 그래야 편한 마음으로 귀국할 수 있다.
“저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천천히 심호흡을 하여 답답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찰나, 페로사 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수했다. 나 홀로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는 자리에서 너무 잡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 괜찮다. 잠깐 자세를 가다듬는 중이었어.”
바로 웃음을 흘리며 페로사 경에게 답했다. 페로사 경은 호위 책임자인 빌라르 경의 딸. 괜히 페로사 경에게 이상한 모습을 보이면 빌라르 경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고, 그러면 빌라르 경과 휘하 기사들이 내 눈치를 보며 바삐 움직일 거다.
그건 귀찮은 일이다. 호위가 근처에 있는 것도 신경 쓰이는데, 그 호위들이 내 눈치까지 살핀다? 상상만 해도 답답한 일이다.
“하지만 너무 느긋하게 움직였나 보군. 페로사 경의 눈에도 이상이 보일 정도라니, 앞으로 더 노력해야겠어.”
“아, 아닙니다 저하! 이미 저하께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기사십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 농담을 건넸으나, 페로사 경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이게 아니었나? 동아리에서는 이렇게 말해도 문제가 없었는데.
‘…친우와 부하는 다를 수밖에 없긴 하지.’
조금은 씁쓸했다. 2년 동안 마음이 맞는 친우들과 지내서 즐거웠는데, 그 친우들과 지낼 수 있는 시간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 1년이 지나면 앞으로 재미없는 왕궁에서 딱딱한 기사들을 보며 지내야겠지.
“아부가 너무 심해. 고문 선생이 있는데 누구보다 뛰어난 기사라니.”
“그, 그, 그건… 그, 무력이 강한 것과… 기사의 마음가짐은 별개니…”
“하하! 그건 그렇지!”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딱딱한 기사들 사이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발견했다는 거다.
드물게 내 또래인 기사기도 하고, 젊어서인지 딱딱하고 정중한 다른 기사들과 달리 활발하고 톡톡 튀는 재미를 보인다. 툭 찌르면 그저 송구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라 제 나름의 신박한 반응을 보여준다.
그래서 페로사 경이 근처에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말을 걸게 된다.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기사였기에.
“기사의 마음가짐! 아주 중요한 요소지!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아르메인이 기사 왕국이라 불릴 수 있는 기둥이니까!”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페로사 경의 어깨를 토닥이자 페로사 경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손을 통해 은근한 떨림이 느껴졌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말을 걸면 페로사 경이 고장 날 수도 있으니.
‘아카데미에서 많은 걸 얻고 가는군.’
내가 제국 아카데미에 오지 않았다면 페로사 경을 볼 일도 없었겠지.
역시 제국 유학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
마르, 첫눈이, 티티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하는 아침은 몇 번을 겪어도 질리지 않는 최고의 시간이다. 아내, 자식, 애완동물의 배웅, 전형적인 일상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만한 구성 아닌가.
비록 첫눈이는 아직 마르의 품에 있어 말을 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이 아빠를 배웅해 준다고 믿고 있다. 분명 그럴 것이다.
“요즘 들어 표정이 밝으시군요. 역시 아버지가 된다는 건 큰 축복인 듯합니다.”
아인테르의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축복이다. 부부에게 있어 자식이 생긴 것보다 행복하고 기쁜 축복은 존재하지 않는다.손주가 생기는 거면 모를까.
“자세가 흐트러졌다.”
“으음.”
그렇기에 관대한 마음으로 은근슬쩍 자세를 푸는 아인테르를 지적해 줬다. 내가 행복한 건 행복한 거고, 네가 굴러야 하는 건 별개야.
“자세는 모든 것의 기본이다. 가끔 실전에서는 교과서적인 자세보다 즉각적인 변동이 더 중요하다고 까부는 것들이 있는데, 그 변동도 결국 자세에서 나오는 거다. 기본도 못 쌓은 놈이 응용이라고 제대로 할 리가.”
하지만 아직 입문자에 불과한 아인테르를 사정없이 쪼는 건 가혹한 일이니, 이 수련을 해야 하는 정당성을 설명해 줬다. 이유도 모르고 고생하는 것과 알고 고생하는 건 느낌이 다른 법.
“명심하겠습니다.”
아인테르도 내 조언에 납득한 듯 땀을 주룩주룩 흘리면서도 파업을 하지 않았다.
‘좋네.’
흡족스럽다. 몸이 힘든 건 입문자니 당연한 일. 중요한 건 힘들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다.
“뭐야. 아직도 하고 있었어?”
“후작을 가르치는 백작이라. 몇 번을 봐도 진기한 광경입니다!”
그 와중에 자기들끼리 대련을 하던 에리히와 류티스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지 않아? 아인테르 정도면 또래 중에서도 괜찮은 편인데.”
그러고는 묵묵히 노력하는 아인테르에게 악마의 유혹을 던졌다.
이 사특한 동생 새끼. 기본은 아무리 단련해도 부족하지 않거늘, 같은 무인이란 새끼가 어딜 감히.
“배운 지 얼마나 됐다고 괜찮다는 말이 나와.”
“고문 선생에게는 며칠만 배운 거지만, 방학 동안에 단련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어릴 때 나름 기초를 다졌다고 하니, 슬슬 본격적인 검술을 배워도 괜찮을 겁니다.”
은근슬쩍 가세하는 류티스의 모습에 한숨이 나올 뻔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인테르는 겨울 방학 동안 황궁에서 단련을 했고, 황궁에 있던 덕분에 황실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알게 모르게 조언을 줬다고 한다. 가르치는 실력은 나보다 그 양반들이 위니 큰 도움이 되었을 터.
심지어 아인테르는 2황자가 개박살이 나기 전, 평범한 황자로 지냈던 시기에 무예를 배운 적이 있었다. 오래 가지 못했지만 아무튼 배운 것은 배운 것. 그 경험이 기반이 되어 아인테르는 빠르게 발전 중이다.
그럼에도 내가 검술이 아닌 자세에 고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검을 잡으면 샌드백이 될 게 뻔한데.’
저 뉴비에 환장하는 고인물 새끼들에게 아인테르를 던져줄 수 없었다.
지금도 에리히와 류티스의 눈에는 기이한 열망이 보였다. 늘 같은 상대와 대련을 하다가 갑자기 신선한 뉴비가 추가된다면 얼마나 두근거리겠나. 하루라도 빨리 검을 섞고 싶겠지.
그래서는 곤란하다. 아무리 아인테르가 빠르게 성장 중이어도 저 둘을 상대로 대련을 할 정도는 아니다.
“아직 때가 아니니 기다려라.”
“쯧.”
단호한 거절에 류티스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고인물 새끼들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