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75)
로판 속 공무원 475화(476/945)
결국 마르의 박람회 참석이 확정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끝까지 반대하고 싶었지만 어쩌겠나. 마르가 혼자 첫눈이를 가진 것도 아니고, 나도 절반의 지분을 가진 주제에 격렬히 반대하는 건 보기 좀 그렇잖아.
“임신 극초기와 출산 직전이면 모를까, 평소에 몸을 너무 안 움직여도 문제라고 했어요.”
“그래?”
“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저도 나름대로 알아보고 결정한 거니까요.”
게다가 내가 없는 사이, 마르는 전문가의 조언을 확보했었다.
덕분에 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비전문가가 전문가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건 추한 일이지. 마르와 첫눈이를 위해서라도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옳다.
그래, 임산부라고 집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긴 해. 햇빛도 쐬고, 바람도 맞아야 건강해지는 법 아니겠나. 과도한 실내 생활은 오히려 건강에 악영향을 줄 거다.
“여차하면 마르에게 실드 마법이라도 걸어 줄 테니 염려하지 말렴.”
하지만 내 표정이 씁쓸해 보였는지, 트릭시가 부드럽게 다독여줬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급속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마종공이 걸어주는 실드 마법이라니, 누군가와 부딪히면 상대의 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마르하고 부딪힌 게 잘못이지.’
생각해 보면 뼈가 부러지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그 경우는 쌍방 과실이 아닌, 임산부가 지나가는데 알아서 조심하지 않고 부딪힌 사람의 잘못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올해의 나는 동아리실 지박령으로 지내고 있다.
작년과 재작년의 나도 동아리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히키코모리였지만, 적어도 그때는 감찰관 숙소나 학생회실 같은 제2, 제3의 공간이 존재했다.
그러나 올해는 출퇴근 형식으로 감찰 업무를 수행하기에 배정된 숙소도 없고, 마르가 졸업한 학생회에 놀러 가기도 난감한 상황. 그 덕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아리실에서 숨만 쉬는 날백수가 되고 말았다.
물론 백수 생활이 지겨우니 일을 하고 싶다는 건 아니다. 바쁘게 구르는 것보다는 백수가 더 좋잖아. 심지어 꼬박꼬박 월급도 들어오는 패션 백수인데.
“아르메인, 유벤, 신성교국에서 사람을 보내겠다 했습니다. 그간 자국의 왕족과 성자 후보를 훌륭히 이끌어준 아카데미에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라 하더군요.”
허나 하늘은 내 백수 생활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카데미가 학생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건 당연한 일인데 감사라. 과분한 일이로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감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답하자 교감도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씁쓸하다. 올해는 정말 아무 소란 없이 평화로운 박람회를 즐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다.
‘감사는 개뿔.’
진짜 감사하면 그냥 돈만 아카데미에 보내면 된다. 그도 아니라면 ‘그동안 고생 많으셨으니 나머지는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부원들을 자기들 나라로 끌고 가거나. 그런 게 아니라면 진정한 감사 인사라고 할 수 없다.
애초에 삼국 놈들이 무슨 목적으로 오는지는 뻔하다. 나와 트릭시가 아카데미에 있으니, 박람회라는 개방 행사를 틈타 접촉하려는 거겠지.
‘올해가 마지막 기회니까.’
삼국 부원들이 올해를 끝으로 졸업하면 나와 트릭시도 더 이상 아카데미에 상주할 필요가 없다. 삼국 입장에서는 나와 접촉할 기회가 지금밖에 없다는 뜻. 올해가 지나면 이렇게 개인 자격이 아닌 외교 사절 자격을 달고 제도까지 와야 만날 수 있다.
‘하여간 귀찮게.’
타국 인사와 만나는 건 귀찮은 일이다. 자국 공무원과 대화를 나눠도 피곤한데, 타국은 오죽하겠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제국이 북방을 흡수하며 압도적인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고, 나는 제국의 실세로 등극’당해’버렸다. 그런 입장이니 타국에서 나에게 연줄을 대려는 건 당연한 일. 오히려 타국의 접촉을 과하게 피하면 ‘제국이 강경책을 펼치려는 건가?’ 라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
게다가 그 타국이 아르메인, 유벤, 신성교국이다.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여 고개를 숙인 아르메인, 나와 마르에게 시복이라는 선물을 준 신성교국, 다른 두 나라가 간다고 해서 같이 온 것 같은 유벤. 하나하나 외면하기 어려운 나라다.
“하지만 동아리 박람회는 모든 인물들에게 열린 행사니, 주인으로서 기꺼이 손님을 맞이할 생각입니다.”
내가 피할 수 없는 절망을 인정하는 사이, 교감도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다소 침통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교감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나 맞이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제국 아카데미는 국적을 가리지 않는 교육 기관임을 표방하고 있으며, 동아리 박람회 역시 모두에게 열린 행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주장한 주제에 갑자기 타국인의 입장을 거절하는 건 외교적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외교적 분쟁과 귀찮은 업무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후자가 낫다.
“먼 길을 온 손님들이니 저도 맞이하는 게 마땅하겠군요. 혹 누가 오는지도 알고 계십니까?”
한숨을 내쉬는 교감의 잔에 차를 다시 채워주며 물었다. 나름 거물들이 올 것 같은데, 적어도 누군지는 알아야 마음의 준비를─
“아르메인은 네르카프 백작, 유벤은 킬라나스 공작, 신성교국은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이 온다고 합니다.”
차를 따라주던 손이 멈추고 말았다.
‘…잘못 들은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당황스럽다. 교감이 말한 세 명은 하나하나가 국가 수뇌부 수준의 거물이었으니까.
네르카프 백작, 아르메인 왕국 중앙군을 총괄하는 대원수이자 아르메인 제일 검. 들리는 소문으로는 아르메인 국왕과 호형호제를 할 정도인 열렬한 국왕 추종자.
킬라나스 공작, 유벤 연합왕국 마도의회 의장으로서 유벤의 정계와 마법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원로. 유벤 국왕의 정치적 파트너로서 유벤의 단일화를 주장하는 구심점.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지난번에 본 그 인물. 그나마 가장 무난함.
‘환장하겠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추기경 겸 성장이 무난한 인물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교장께서도 많이 놀라셨습니다. 각국에서 누구보다 바쁘실 분들이, 직접 시간을 내어 오시는 거 아닙니까.”
“놀라실만하지요. 저도 교감께 듣는 말이 아니었다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교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화려한 라인업을 듣고도 놀라지 않는다면 교장이 인간의 마음을 포기했다는 의미니.
‘개인 자격이라 다행이다.’
이윽고 그 양반들이 사절단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온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개인 자격으로 왔다면 평범한 손님을 맞이하듯 준비하면 되지만, 사절단 자격으로 왔다면 보다 화려하고 세세한 의전이 필요하다. 그건 나와 아카데미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마 외무성에서 최소 부장급이 달려와 진두지휘를 했을 터.
결정적으로 사절단이 제국에 왔다면 그만한 외교 안건이 있다는 뜻인데, 저런 거물들이 물고 온 안건이 결코 가벼울 리가 없다. 상상만 해도 정신이 아찔하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능력이 되는 만큼 손을 보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군요.”
그렇기에 나처럼 정신이 아찔할 교감에게 자그마한 성의를 보였다.
사실 성의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저 거물 트리오가 여기까지 오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건 나도 알고 교감도 아는 사실이니까.
***
후후후.
우후후후후후…
“구후후훗…”
“그만 실실거려라. 보는 사람이 다 징그럽군.”
흘러넘치는 기쁨을 자제하지 못하고 웃고 있으니 알디노 어르신이 구박을 줬다.
평소라면 웃는 것 가지고도 뭐라 한다고 서운했을 테지만, 지금만큼은 어르신의 구박도 아무렇지 않다.
‘아카데미 파견.’
손에 들린 명령서를 보며 계속 히죽거렸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복이 내 손에 들어왔다. 타니안이 신성교국에 오는 걸 기다려야 했던 내가, 타니안이 있는 곳으로 직접 갈 수 있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이! 정당하게!
‘학생인 타니안.’
가슴이 요동친다. 사제복을 입은 타니안이 아닌, 교복을 입은 타니안.사제들 사이에서 기도하는 타니안이 아닌, 친구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타니안.
그런 타니안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에넨께서 교단과 신도들을 위해 고생하는 나를 기특하게 여기신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행복이 찾아올 리가 없어.
‘시기가 좋았어.’
알디노 어르신의 눈초리가 따가워질 때 즈음, 입꼬리를 가라앉히고 명령서를 다시 확인했다.이틀 후, 제국 감찰성 장관과 그 부인에 대한 시복이 진행된다. 그리고 시복이 끝나면 교황 성하의 축복을 받은 십자가와 의복을 복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관례다.
물론 복자는 생전 시복보다 사후 시복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기에 복자 당사자에게 물건을 전달하는 건 몹시 드문 일이다. 대다수 복자의 유족이나 후손에게 전달하는 편이지.
허나 이번에는 복자가 살아있기에 시성성 성장인 내가 직접 움직이게 되었다.
‘역시 복자야.’
겨우 가라앉힌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복자는 실로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가 맞다. 존재 자체로도 타인에게 기쁨을 주다니. 복자가 아니라 성인으로 시성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아.
“구후후후후후훗…”
“…내가 간다고 할 걸 그랬나.”
알디노 어르신의 중얼거림이 들렸지만 가뿐히 무시했다.
이미 교황 성하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가 내려왔으니 내가 타니안을 만나러 가─ 아니, 복자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는 건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 누구도!
***
동아리실에 모인 외국산 부원들과 정보를 공유했다. 느그 나라에서 거물이 올 예정이니 같이 놀라고.
다행히 각국에서 오는 거물들은 부원들과 어색한 사이 같지 않았다. 열렬한 국왕 추종자, 혹은 국왕의 파트너이니 왕자와도 무난한 관계일 터.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도 뭐, 타니안의 추종자 수준인 것 같았으니 타니안을 붙이면 별일 없을 거다.
“오, 숙부께서 말입니까? 누가 온다고는 들었지만 숙부가 올 줄은 몰랐군요.”
네르카프 백작을 무려 숙부라고 부르는 류티스의 말에 흐뭇해졌다. 저 정도로 친밀한 사이를 붙여놓으면 알아서 잘 놀겠지.
그러면 나한테 찾아와서 귀찮게 구는 빈도도 줄어들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