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76)
로판 속 공무원 476화(477/945)
네르카프 백작, 킬라나스 공작,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
이름만 봐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삼인방은 개인 자격으로 아카데미에 방문할 예정이지만, 타국 수뇌부급 인사를 정말 개인 취급하는 건 외교를 포기해야 가능한 미치광이 행동이다. 어디까지나 사절 자격으로 올 때보다 간략히 대해도 된다는 의미지, 무시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덕분에 교장은 교육성의 긴급 지원 예산을 받으며 귀빈들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고, 교감은 교직원들과 학생회를 통솔하며 처절하게 현장을 굴렀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나 역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대제께서는 아펠스의 탐욕과 교만으로 만들어진 죄악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허나 그럼에도 아카데미만은 그대로 유지하셨으니, 이는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가 올바른 교육을 받고 하나 된 이상을 품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미천한 소신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고귀한 뜻입니다.”
– 하늘 아래 대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짐 역시 마찬가지이니 장관은 유념치 말라.
몇 번을 생각해도 황제라는 최고 상사와 영상 통화를 나누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환장하겠다. 아무리 출퇴근 형식이라지만 임산부 아내를 두고 파견 업무를 진행 중인 것도 서러운데, 그 업무지에 거물들이 줄줄이 오는 것도 씁쓸한데, 이제는 황제와 통화 중이다.
‘이걸로 사흘째.’
그것도 3일 연속으로.
– 대제의 뜻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뜻이 마침내 꽃을 피워 오늘날 아카데미가 대륙의 중심에 섰다는 건 알 수 있다. 그러니 장관은 제국의 기둥으로서 중심을 갈망하는 자들을 마땅히 보살피라.
“예,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황제의 말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 얘기도 벌써 3일 연속으로 듣는 거다.
물론 황제가 녹음기는 아니기에 문장 배열이나 단어 정도는 변했지만, 아무튼 뜻은 동일하다.
‘위신 세우기에 딱이기는 하지.’
제국 교육 기관인 아카데미에 타국 왕족이 입학한 것은 제국의 위엄을 드높일 수 있는 일이다. 현장에 있는 교직원들 입장에서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나, 겉으로 보기에는 타국이 제국의 교육 체계가 우월하다고 인정한 꼴이지 않나.
그런데 왕족의 입학에 이어 이번에는 수뇌부까지 아카데미 행사에 방문한다. 이는 제국이 타국보다 우월하다는 이미지에 힘을 실어주는 빅-이벤트.
현장에 있는 교직원들은 더욱 고통스럽겠지만 제국의 위신을 생각하면 분명 긍정적인 일이다. 그래서 황제도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거고.
– 그래, 장관이라면 귀빈들을 훌륭히 맞이할 수 있겠지.장관이 아카데미에 있어 실로 마음이 놓이는군.
“황송하옵나이다. 반드시 폐하의 신뢰에 부응하겠습니다.”
몇 번이나 내 역할을 강조하는 황제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건 듣는 입장에서 짜증 나는 일이나, 황제가 왜 이리 신신당부하는지 알 것 같기에 그저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타국 손님과 엮이면 아카데미 여포로 돌변하는 기괴한 버릇이 있으니까.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자제하라는 강렬한 주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전적이 화려하기는 해.’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여포도 그런 여포가 없었다. 재작년에 있었던 반 대항전 때는 타국 왕족인 류티스의 입에서 피가 나오게 만들었고, 작년에는 손님들 머리 위에서 메테오를 조각냈다. 매년 레전드를 갱신 중이니 황제로서는 올해도 사고가 터지지는 않을까 우려스러울 터.
지금까지는 여차저차 무난하게 넘어갔지만, 세 번째도 무사히 넘어갈 거라는 보장은 없다. 아니, 만약 손님들이 웃어넘겨도 황제가 나를 찢어 죽이려 할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나. 전과범은 입 다물고 따라야지.
– 장관은 언제나 내 신뢰에 부응했지. 허나 장관이 생각하기에 난감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짐에게 말하도록.
“예, 폐하.”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황제에게 매일매일 원격으로 쪼이다 보니 어느덧 동아리 박람회 개최 날이 되었다. 시간조차 조종하는 군주라니, 황제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아카데미는 그대로네요. 달라진 게 없어요.”
“졸업한 지 몇 개월밖에 안 지났잖아. 달라진 곳이 있다면 그게 더 신기하지.”
“그렇네요. 아직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었죠.”
박람회 개최식 직전, 나와 함께 아카데미를 둘러보던 마르는 내 대답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마르를 보니 나도 미소가 지어졌다. 말로는 몇 개월밖에라고 말했지만, 3년 동안 다니던 아카데미를 졸업했으니 그 몇 개월의 공백도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나도 빙의 전 세상에서는 학교를 졸업하면 괜히 마음이 허전하고, 졸업식이 옛날 일로 느껴졌으니까.
이 세상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지만.
“그래도 신기하네요. 학생회에 있을 때만 해도 제가 없으면 아카데미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잘 돌아가고.”
그렇게 몇 분 정도 더 걷던 마르가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무슨 심정인지 알 것 같다. 마르가 학생회 부회장, 회장을 역임하며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내가 잘 알고 있다. 공녀로서의 사명감 때문인지 어떤 일이든 가볍게 처리하지 않았고, 같은 사안도 몇 번이나 확인하며 빈틈이 없게 노력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노력을 하며 이끌어온 학생회가, 아카데미가 자신이 없어도 평화롭게 운영되고 있다. 지난 3년간 괜한 노력을 한 게 아닐까 공허감이 올 법도 하지.
“마르가 후임 회장을 잘 가르친 덕분에 돌아가는 거야. 인수인계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런 마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건 진심이다. 사람의 능력은 자리에 있을 때만 돋보이는 게 아니다. 자리를 떠난 후의 여파까지 그 사람의 유능을 판단할 수 있는 요소다. 자신이 자리를 떠나도 문제가 없을 만큼 깔끔하게 업무를 처리하고, 자신의 후임을 완벽히 가르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덕분에 나와 장관이 전대 감찰부장을 보내고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자리에 있을 때도 욕이 절로 나오던 새끼가 인수인계도 못 하고 가버렸으니까. 심지어 감찰부장 자리를 메꾼 장관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재무성 장관으로 승진하는 악재가 터져서 나 홀로 처절하게 굴렀었다.
“그리고 마르는 아카데미보다 더 중요한 곳을 관리하고 있잖아.”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마르는 이윽고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맞아요. 지금 전 크라시우스 가문의 안주인이죠.”
다행히 살짝 우울해졌던 기분이 다시 좋아진 것 같다.
***
아카데미 본관을 올려다봤다. 부유하기로는 대륙 역사상 제일 가던 아펠스 시절의 유산이라 그런지, 거대하면서도 화려함이 여과 없이 느껴지는 건축물이었다. 저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금화가 녹아내렸을는지.
“대원수 각하.”
“알겠다.”
한참이나 본관을 바라보다 옆에 있던 빌라르 경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옮겼다. 본관 같은 걸 볼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지금은 전하의 명을 수행하는 것이 우선.
그리고 명을 수행하기 전, 손님으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
“우리가 먼저 도착한 건가?”
“예, 각하. 킬라나스 공작과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좋군.”
빌라르 경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라도 빨리 접촉해야 할 대상이 있는데,주인과 인사를 나누는 중인 손님이 있다면 시간만 낭비하는 꼴. 다소 서둘러서 온 보람이 있다.
‘이게 무슨 고생인지.’
온갖 그림과 조각상으로 장식된 복도를 지나며 복잡한 속내를 다스렸다.
내 나이도 이제 쉰에 가깝다. 용맹무쌍한 전하의 장병들을 관리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있다. 그런 내가 아르메인의 변방도 아니고, 타국인 제국까지 방문했다. 부관에게 맡기고 온 서류의 산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올 일.
“내가 우리 아우님이 아니면 믿을 사람이 없어. 아우님이 바쁜 건 잘 알고 있지만, 부탁하네.”
허나 전하께서 친히 부탁을 하시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간 김에 류티스 녀석이 뭐하고 지내는지도 좀 봐주고. 그 녀석이 그래도 아우님 말은 잘 들으니.”
게다가 류티스 저하의 안부를 살피라는 명도 받아버렸으니 도저히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흐음.
“저하께서는 어디 계시지?”
“제과 동아리 부스에 계십니다. 허나 각하께서 오신다는 걸 알고 계시니, 언제든지 나올 수 있게 준비해두겠다고 하셨습니다.”
빌라르 경에게 저하의 위치를 묻자 즉각 답이 돌아왔다.
“신하로서 왕자 저하를 귀찮게 할 수는 없지. 내가 직접 인사를 드리러 갈 터이니 따로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
그런 빌라르 경을 향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왕족은 언제나 신하들의 경배와 찬양을 들어야 하는 자. 아무리 국왕 전하께옵서 황송하게 나를 동생처럼 여겨주시고, 그 자식분들도 나를 숙부처럼 대하시지만, 그렇다고 감히 그분들을 오라 가라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과분한 신뢰를 받는 신하로서 더욱 경외를 보여야 한다. 그것이 왕실과 조국을 향한 예의.
“저, 그것이.”
허나 빌라르 경은 말을 흘리며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왜 그러는─”
“숙부!”
질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필요 없었다.빌라르 경이 난색을 표한 이유를 바로 알게 되었으니까.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자 절로 고개가 돌아갔고, 그곳에는 류티스 저하께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각하께서 도착하기 직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허어.”
절로 탄식이 나왔다. 저하를 가까이서 모시는 빌라르 경이니 내 정보를 즉각 저하께 전달할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저하의 행동력은 엄청나다. 언제든 나올 수 있게 준비해두겠다고 하던 분이 벌써 본관까지 오셨다라.
‘심심하셨군.’
아마 부스에서 할 일이 없기에 그냥 직접 오신 것 같다.
저하의 성격이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돌려보내는 김에 접촉하면 되겠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저하께 고개를 숙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저하를 부스로 돌려보내는 김에 감찰성 장관과 접촉하면 되겠지.
“어서 오시죠, 숙부! 숙부를 이 제국 땅에서 보다니, 반갑기 그지없군요!”
“소신도 저하를 이국에서조차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그전에 저하의 활력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히는 게 먼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