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77)
로판 속 공무원 477화(478/945)
올해도 제과 동아리 부스에는 제법 많은 수의 손님들이 몰려왔다. 오죽하면 부스 안쪽에 앉아있던 마르가 도와주겠다는 말을 꺼낼 정도로.
물론 편히 앉아있으라는 말과 함께 단호히 거절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산부 아내를 노동 현장에 투입해? 하늘에서 보던 에넨이 천벌을 내려도 할 말이 없고, 나 자신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 많은 곳에 데려온 것도 불안해 죽겠는데 노동은 무슨.
게다가 손님이 많다고 바쁘다는 결과로 직결되는 건 아니다. 궤변 같은 말이지만 이 부스에서는 통용된다. 여기서는 구매자가 아닌 판매자가 갑이니까.
“부인께서 회임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타일글레헨 백작 각하.”
“하하, 몇 번을 들어도 기쁜 축하로군요. 감사합니다.”
부스에 방문하는 손님 대다수는 나, 트릭시, 혹은 류티스나 라테르, 타니안을 보기 위해 온 손님들이다. 우리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온 손님들이니, 응대가 다소 느려도 불만을 표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부장인 리제도 올해는 편하고 느긋한 부스 운영을 추구하는 상황. 거기다 2년에 걸친 운영 노하우도 결합되었으니, 아무리 많은 손님들이 와도 부원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부원 중 하나가 이탈한 상황임에도 말이다.
‘탈주닌자 새끼.’
당당히 자리를 비운 류티스를 떠올리며 다음 손님과 악수를 나누었다.
분명 부스 진열대를 정리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히 일하고 있었는데, 구석에서 무슨 연락을 받더니 바람처럼 사라졌다. 급히 만날 사람이 있어서 인사만 나누고 오겠다는 말과 함께.
너무도 당당한 탈주에 넋이 나갈 뻔했지만 추포 작전을 펼치지는 않았다. 인력 하나하나가 절실한 상황도 아니고, 류티스가 기행을 저지를지언정 경우가 없는 놈은 아니니─ 굳이 지금 뛰쳐나간 걸 보면 그만큼 중요한 상대가 왔다는 뜻 아니겠나.
그리고 그 상대는 높은 확률로 네르카프 백작일 것이다.
‘괜히 숙부라 부르는 게 아니었네.’
조금 의외다. 네르카프 백작이 아르메인 국왕의 심복이기는 하나, 왕족이 신하를 먼저 찾아가는 건 어지간한 총애와 신뢰가 받쳐주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마 류티스가 상대를 먼저 만나러 간다는 극상의 배려를 보일 줄이야.
그래도 류티스가 자발적으로 네르카프 백작과 붙어있는다면 나야 편한 일이다. 왕족이 바로 옆에 있다면 네르카프 백작이라도 행동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나와 만날 일도 급격히 줄어들 터.
이왕이면 하루 종일 붙어있었으면 좋겠다.
애초에 기대를 하니까 실망을 한다고 하던가.
내가 어리석었다. 그 진리를 잊고 류티스에게 기대를 걸다니. 아무리 78년도 시즌부터 류티스가 순한맛이 되었더라도 류티스는 류티스인데.
“숙부. 이 분이 제과 동아리의 고문을 맡아준 고문 선생입니다. 제국 감찰성 장관이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탈주하고 약 2시간이 흐른 후, 류티스는 네르카프 백작과 함께 부스에 돌아왔다.
‘망할.’
아무래도 내가 소원을 불완전하게 빈 업보인 것 같다. 단순히 하루 종일 붙어있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나와 먼 곳에서’ 하루 종일 붙어있으라는 구체적인 소원을 빌어야 했는데. 설마 내 앞으로 직접 데려올 줄은 몰랐지.
“페르디난트 카리첸 오브 네르카프입니다. 대륙 제일 검을 직접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이, 네르카프 백작이 먼저 악수를 건넸다.
‘어쩌지.’
그런 네르카프 백작을 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인사를 어떻게 받아야 할까.
일단 의전 관례상 제국의 작위 귀족은 왕국의 작위 귀족보다 한 단계 위로 취급한다. 즉 백작 카테고리에 속하는 나는 왕국의 백작인 네르카프 백작보다 위에 설 수 있는 존재.
허나 어디까지나 작위 의전이 그렇다는 거지, 아르메인 왕국 대원수에게 하대를 하는 건 전승공 정도는 돼야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네르카프 백작이 적대적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정중히 인사를 건네는데 막 나갈 수는 없지.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입니다.”
그렇기에 상호 존대로 결정했다. 사실 나보다 나이가 배는 많은 사람에게 반말을 하기도 좀 그래.
“헌데 대륙 제일 검이라니. 너무 과분한 이름이라 부끄러울 정도군요.”
그리고 네르카프 백작이 언급한 대륙 제일 검이라는 칭호에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대륙 제일 검이라니, 그게 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그런 이름이 붙은 건데.
“본래 명성이란 게 그런 거지요.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세간이 그리 부른다면 그것이 자신이 되는 법입니다.”
내 반응에 네르카프 백작은 덤덤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설득력이 넘친다. 이미 아르메인 제일 검이라 불리는 사람의 조언이라 그런가? 어쩌면 저 사람도 아르메인 제일이니 뭐니라고 불리는 것이 부끄럽지만 감내하는 걸 수도 있다.
“맞는 말입니다. 원래 자신이 보는 나와 남들이 보는 나는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보통 후자가 맞는다고 하니, 겸허히 받아들여야지요!”
뒤이은 류티스의 너스레에 픽 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카간의 위용을 온몸으로 겪었던 입장에서는 나 따위가 대륙 제일이라 불리는 게 민망하지만, 카간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지 않나. 꼬우면 카간이 살아남았으면 될 일이다. 아무튼 살아남은 자가 강자인 법이니.
“이런, 다른 손님들이 계시는데 민폐를 끼쳤군요. 실례했습니다.”
“아니요, 별 말씀을.”
류티스를 보며 슬며시 미소 짓던 네르카프 백작은 북적이는 손님들을 훑어보고 한걸음 물러났다. 다른 손님들이 있는 상황에서 나를 오래 붙잡고 있으면 실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아직 몇 마디밖에 나누지 않았지만, 그 짧은 대화만으로도 네르카프 백작의 성격을 대충은 알 것 같다.
‘덩치 큰 류티스는 아니었어.’
진심으로 안도했다. 기사 왕국이라 불리는 아르메인에서도 제일 검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고, 류티스가 숙부라 부르는 존재이기에 괴랄한 성격의 소유자일 줄 알았다. 혹시 류티스가 숙부의 영향을 받고 자란 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허나 덩치 큰 류티스가 아니라 빌라르의 상위 호환이었다. 능력과 성품, 개념을 두루 갖춘 정상인.
‘그런 양반이 조카 농사는 왜.’
물론 말만 조카지, 신하인 네르카프 백작이 왕자를 훈계할 수는 없다. 죄가 있다면 아르메인 국왕에게 있겠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
류티스 저하와 장관의 호의 덕분에 부스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외부 손님인 내가 이리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도 되나 싶었으나, 이미 장관의 부인도 있었기에 그러려니 넘어갔다. 여기서 손님 운운하면 장관의 부인도 걸고넘어지는 꼴이니.
‘허어.’
그렇게 의자에 앉아 손님들을 맞이하는 류티스 저하를 보니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저하께서 이런 잡일을 하시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오직 검만 휘두르던 저하, 무예와 연관이 없는 제과.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서로 엮기 힘든 요소지만 제국 아카데미는 그걸 해냈다.
‘공평한 가르침과 동등한 위치라.’
문득 제국 아카데미가 외치던 표어가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그저 말뿐인 외침이라 생각했으나, 이런 광경을 보게 되니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아르메인의 왕자가 제국의 황족, 유벤의 왕자, 신성교국의 차기 성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제과를 한다. 정말 공평하게 가르침을 받고 동등한 대우를 받는 거 아니겠나.
‘아카데미가 아니라 장관의 능력인가.’
이윽고 여전히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관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수백 년이 넘게 존속한 아카데미는 장관이 동아리 고문으로 활동한 시기에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그렇다면 그건 아카데미의 공일까, 장관의 공일까.
‘흥미롭군.’
나도 모르게 손이 움찔거렸다. 검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능력을 보였다면, 검술 능력은 더욱 뛰어날 터. 마음 같아서는 대련이라도 신청하고 싶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욕구를 억눌렀다.
‘대련이 이루어지면 그거대로 문제지.’
나에게는 아르메인 제일 검이라는 과분한 명예가 걸려있다. 내가 패하기라도 한다면 아르메인의 검이 제국에 꺾이는 걸 보여주는 꼴이다.
나에게 제일이라는 이름이 붙은 순간부터 나의 승패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피가 끓어오를 때마다 그걸 떠올리면 아주 조금은 진정이 된다.
…
‘내가 조금만 젊었더라도.’
진심으로 안타깝다. 살면서 하늘을 가르는 검사와 대련을 할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지금만큼은 전하의 명을 받고 제국에 온 것이 서글프다. 차라리 보지도 못했다면 아쉽지도 않았을 텐데.
***
일단 네르카프 백작을 부스에 박아두기는 했지만, 외부인을 부스 내에 두는 건 우리도 어색하고 백작도 어색한 일이다.
그렇기에 손님이 적어지자마자 백작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어디를 가든 부스보다는 좋겠지.
“외진 곳이지만 시설은 훌륭하군요.”
“신설 동아리라 제법 신경을 써서 만든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다른 학생들도 새로운 동아리 창설을 망설이지 않을 테니까요.”
“과연. 아카데미의 배려는 실로 따뜻하군요.”
그 장소가 동아리실이 될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평온한 안색으로 동아리실을 둘러보는 네르카프 백작을 뒤로하고 선반에 두었던 다기를 집었다. 평소 류티스가 머무는 곳을 보고 싶다는 명분으로 온 백작이니, 어찌 보면 수업 참관을 온 학부모 포지션 아닌가. 학부모에게 차 한 잔 대접하지 않는 선생은 너무 야박하다.
“찻잎이 우려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대륙 제일 검이 타주는 차를 마시는데 그깟 시간이 대수겠습니까.”
그 말에 작게 웃음이 나왔다. 덩치 큰 류티스가 아닐까 걱정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조용한 양반이다.
‘대련을 부탁하면 어쩌나 했는데.’
차라리 아득한 하수의 부탁이면 가르침이라는 명목으로 설렁설렁할 수 있지만, 아르메인 최강자와의 대련은 나도 이 악물고 임해야 한다. 그러면 이기든 지든 그 여파는 결코 가볍지 않을 터.
그래, 생각해 보면 백작도 한 국가의 수뇌부 아닌가. 그런 사람이 자신의 발언과 행동을 가벼이 여길 리가 없다. 내가 너무 과한 걱정을 했어.
“그리고 타일글레헨 백작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이니, 오히려 기꺼울 따름입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저에게 궁금한 것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백작의 말에 농담 섞인 말을 건네자 백작도 옅게 미소를 지었다. 무해한 사람과의 대화면 얼마든지─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아르메인 국왕 전하의 말씀이며, 이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전언입니다.”
“…예?”
갑자기 이상한 말이 귀에 꽂혔다. 아르메인 국왕의 말? 비공식 전언?
‘이런 미친.’
본능적으로 귀를 막을 뻔했다. 백작이 뒤이어 할 말을 듣는 게 너무 두렵다. 평온한 얼굴로 그딴 폭탄을 터뜨리는 법이 어디 있어.
“조만간 레온의 혈통이 끊어질 것입니다.”
“…….”
하지만 내가 귀를 막기 전에 백작의 입이 먼저 열렸다.
‘시발.’
차라리 대련을 하는 게 좋았을 정보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