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78)
로판 속 공무원 478화(479/945)
레온 왕국. 대륙 중부에 위치한 왕국으로 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화려하게 몰락한 비운의 국가. 그것이 현 레온 왕국의 실태다.
그러나 레온 왕국은 한때 강국으로 분류되는 국가였다.국명에 사자를 박아 넣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한 군사력을 자랑하였고, 전성기 시절에는 아르메인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중부의 패자(覇者). 오죽하면 반 제국 진영의 수장으로서 동부 왕국들을 이끌고 제국과 드잡이질을 했겠나.
심지어 레온이 제국과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였던 시기는 상황이 막 즉위한 시점이었다. 망해가던 제국을 아직 부활시키지 못했던 시기였으니, 레온 입장에서는 제국을 일방적으로 팰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터.
허나 제국은 망해가도 제국이었는지, 아니면 첫째 장인어른이 괴물이었던 건지─ 레온을 위시한 반 제국 진영은 화끈하게 두들겨 맞았고, 그 수장인 레온은 전쟁을거하게 말아먹은 대가로 중부의 패자(敗者)가 되었다.
그 뒤로는 개같이 한 외교의 업보로 이웃국에게 통수까지 맞았고. 지금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환자라는 게 대륙의 평가다.
‘진짜 죽을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고 갑자기 레온의 혈통이 끊긴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나라의 혈통이 끊긴다는 건 왕실의 대가 끊긴다는 것. 그로 인한 혼란과 왕위를 둘러싼 신경전을 생각하면 레온은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새로이 즉위한 왕이 얼마나 능력자인지에 따라 다시 부활하느냐, 관짝에 들어가느냐가 갈리겠지.
‘하나 남아있지 않나?’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레온 왕실에 사람이 귀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나마 살아남은 직계와 방계조차 전쟁을 거치며 다수 전사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래도 현 레온 국왕에게는 왕위를 물려줄 자식이 딱 하나 남아 있다.혈통이 끊어졌다는 건 그 유일한 자식마저 잘못됐다는 거잖아. 다른 사람도 아닌 왕세자를 허투루 관리할 정도로 레온이 미쳐가는 건가?
그리고 그러한 의문을 눈치챈 듯, 네르카프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레온은 무에 대한 숭상이 상당한 국가입니다. 그 영향인지 왕족과 귀족은 전장에 나서는 걸 영광으로 여겼지요.”
알고 있다. 레온 왕실의 구성원이 폭락한 이유도 그것 때문 아닌가.
“그 풍조로 인해 다수의 왕위 계승자들이 전사하였고, 유일하게 전장에 나서지 않은 막내 왕자는 왕세자가 됐습니다.”
‘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왕족이 전부 전장에 나설 정도로 광기에 먹힌 것이 당시의 레온이었다. 그런 레온이니만큼 ‘아무리 그래도 보험 한 명은 남겨야지.’ 라는 생각으로 왕자를 왕궁에 남겨두었을 확률보다, 보내기 어려워서 남겨두었을 확률이 더 높다.
설령 보험을 들더라도 적장자도 아닌 막내를 남겨둘 리가 없다.즉 현 왕세자는 광기 속에서도 전장에 나서지 못할 만큼 문제가 있었다는 뜻.
예를 들면 왕궁 밖으로 나가는 게 고역일 만큼 건강에 이상이 있다거나 그런 거.
‘세라 같은 타입이구나.’
생각해 보면 현 레온 왕국에 왕세자가 있다고만 들었지, 자세한 정보는 알지 못했다. 타국 이야기에 굳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
또한 현 왕세자가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했다면 이미 왕세손이 태어났을 나이다. 그럼에도 네르카프 백작은 혈통이 끊길 예정이라는 말을 했으니, 왕세자는 골골거리고 왕세손은 없다는 뜻. 이 또한 오늘 처음 접한 정보다.
모든 정황이 왕세자의 허약함과 레온 왕실의 위기를 가리키고 있다. 나만 몰랐을 뿐.
‘너무 관심이 없었어.’
조금은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내가 국외보다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편이라지만 조금만 알아보면 금방 알아낼 수 있는 정보를, 바로 추론할 수 있는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름 제국의 장관이라는 놈이 국제 정세에 너무 무지했다.
반성하자. 일개 부장이 아닌 장관이 된 순간부터 나는 제국의 주요 인사가 아닌 대륙의 주요 인사다. 너무 자의식 과잉 같지만 현실이 그런데 어쩌겠어.
…
‘망했네.’
이윽고 민망함은 막막함으로 변했다. 자식을 보지 못한 허약한 왕세자, 확실히 레온의 혈통이 끊길만한 중대한 사유다. 서로 다른 국적의 주요 인사가 만났으니 이웃 국가의 이변에 대해 논할 수도 있다.
허나 네르카프 백작은 단순히 레온이 혈통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발언이 아닌, ‘조만간’이라는 단서를 덧붙였다. 그것도 아르메인 국왕의 비공식 전언이라는 말과 함께.
‘뭔가 알고 있다.’
확실하다. 아무리 비공식이라도 국왕의 말을 대원수가 직접 전달하는 상황이다. 왕세자가 오늘내일한다는 정보를 접했거나, 자신들이 왕세자를 보내버릴 계획이 아니라면 절대 저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왕실의 대가 끊긴다면 그 뒤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뿐이다. 아무리 망해가는 나라라지만 왕은 왕. 보랏빛 제관에 눈이 먼 푸른 피도 널리고 널렸다.
그걸 잘 알고 있을 아르메인이 제국에게 혈통 운운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조만간 마지막 남은 왕세자마저 에넨의 곁으로 돌아갈 듯하니, 본국은 현명하고 강인한 귀족을 공백이 될 왕좌에 앉혀야 한다 판단했습니다.”
그 왕위 분쟁에 아르메인이 개입하겠다는 뜻이고,
“허나 일국의 왕이 어찌 타국의 왕을 임의로 정하겠습니까. 천명을 수호하시는 제국의 황제 폐하께 지혜를 청하고 싶습니다.”
혼자 먹을 생각은 없으니 서로 입장을 조율하자는 제안이다.
돌아버리겠다. 외교 사절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방문한다고 해서 방심했는데, 설마 이런 제안을 건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보다 왜 이런 제안을 황제가 아닌 나한테 하는 건데.
…아니, 사실 왜 나한테 이러는지 알고 있다. 이 제안을 위해 네르카프 백작이 공식적으로 황제를 알현하면 대륙의 시선이 쏠린다. 제국과 은밀하게 합을 맞추고 신속히 레온을 장악하고 싶은 아르메인 입장에서는 지양해야 할 일.
그렇기에 나다. 이미 동아리 박람회에는 무수히 많은 타국인들이 방문한 전적이 있어 네르카프 백작의 방문도 크게 이상할 건 없고, 나는 2년 전부터 아카데미에 상주한 놈이다. 아카데미에서 나와 네르카프 백작이 만나도 의심을 받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망할 놈의 아카데미.’
결국 침통한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음으로 울고 말았다. 아카데미에 있다는 죄로 별일을 다 겪는구나.
“황제 폐하의 지혜는 실로 대륙을 뒤덮으심이니, 일개 종인 저로서는 감히 그분의 뜻을 대변할 수 없겠군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 대륙의 그 누가 황제 폐하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일단 ‘나한테는 이런 일을 논할 권한이 없어요, 이 개새끼야.’ 라는 말을 곱게 포장하여 돌려줬으나, 네르카프 백작은 내가 말한 대변이라는 단어를 무시하고 굳이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을 돌려줬다.
이 개 같은 거. 대변이야 황제한테 권한을 받으면 되니 묻고 와라 이거지?
“…생각해 보니 차와 함께 먹을 과자가 없군요. 잠시 부스에서 빌려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급한 일은 아니니 느긋하게 오시길.”
시발.
최대한 한적한 곳에 틀어박혀 통신구를 꺼냈다. 오늘만큼 황제가 빨리 연락을 받았으면 하는 날은 없었다.
그리고 내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연락을 받았─
– 우─?
“전하?”
황제 대신 볼이 빵빵한 황태녀가 손을 휘젓는 것이 보였다.
– 오, 마침 대부도 연락을 주었구나. 어서 인사하려무나.
– 아웅!
뒤이어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황태녀에게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이거. 황태녀하고 놀아주고 있던 때에 연락을 건 건가?
– 폐하, 제가 안고 있겠습니다.
– 고맙소, 황후.
다행히 황후도 근처에 있었는지, 통신구를 가득히 메우던 황태녀가 사라지고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 역시 장관이 황태녀의 대부는 대부인 모양이군. 마침 짐이 황태녀와 있을 때 연락을 하다니, 신기할 따름이야.
기분이 썩 좋은지 황제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 기분이 좋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만.
그래서 안타깝다. 저렇게 높이 치솟은 황제의 기분을 순식간에 메다꽂게 되다니. 이게 다 아카데미 때문이다.
“폐하, 송구하오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 말에 황제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낀 것처럼.
***
장관의 보고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턱을 매만졌다.레온 왕국의 왕세자가 위독하다는 건 특무성의 보고를 통해 알고 있다.
바로 오늘 아침에 올라온 보고였으니까.
‘역시 레온에서는 아르메인이 우위인가.’
씁쓸하다. 나는 오늘 아침에 접한 정보를 아르메인 국왕은 진작에 확보하여 비공식 사절을 보내는 행동을 취하였다. 적어도 레온에서의 정보력은 제국보다 아르메인이 위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토벌 전쟁으로 인한 대북방 정보력 붕괴, 그로 인한 정보부의 재배치, 상대적으로 우선순위가 뒤인 레온 왕국, 마지막으로 정보부의 감찰성 합류로 인한 특무성의 일시적 정보 공백.이러한 악재가 겹치고 겹쳤으니 특무성은 활동을 지속하는 것으로도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물론 이런 열세도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쳐야 한다. 정보부가 이탈한 특무성에 새로이 첩보부를 배정할 예정이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장관.”
– 예, 폐하. 하명하소서.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 뒤, 장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국의 국익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협조하라.”
두루뭉술한 지시였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아르메인과 함께 개입하기로 한 이상, 무슨 결과가 나오든 제국에게는 이득이다.
그러니 장관에게 세세한 외교 지시를 내릴 바에는 이게 낫다. 어차피 상대도 전문적인 외교관은 아니지 않나. 지금은 큰 줄기만 잡고, 세세한 협상은 왕실이 실제로 끊기기 직전에 하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