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79)
로판 속 공무원 479화(480/945)
황제에게 밀약을 체결할 권한을 수여받고 동아리실에 복귀했다. 제국의 국익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협조하라는 애매한 발언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애매함이 반가웠다.
난 전쟁을 제외하면 국외가 아닌 국내에만 머무른 타입이고, 외교와도 전혀 연관이 없던 공무원이다. 그런 공무원에게 상세한 외교 지시를 내렸다면 머리에 과부하가 왔겠지. 아마 황제가 지시하는 도중에 통신구를 내던지고 도망치지 않았을까.
그러니 ‘넘어서는 안 될 선’만 유의하면 충분하다. 다행히 아르메인도 제국이 잘 차려진 밥상을 엎을까 봐 걱정하는 거지, 제국의 골수를 빼먹을 생각은 아닌 것 같고.
“이 정도면 되겠군요.”
“예, 세세한 건 차후에 정하도록 합시다. 괜히 이 자리에서 전부 처리하면 외교부가 쓴소리를 할 것 같군요.”
“좋습니다. 사실 저도 외무성 눈치가 보여 불안했습니다.”
그렇게 네르카프 백작과 머리를 맞대며 큰 줄기를 잡았다. 수행원이나 참모도 없이 고작 둘이서 조약을 체결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나, 나는 황제에게 권한을 받았고 네르카프 백작은 아르메인 국왕의 대리자다. 압도적인 권한은 상식마저 박살 내는 법.
“양국의 우호와 대륙의 안정을 위해 원만한 합의점을 도출한 것 같아 기쁠 따름입니다. 황제 폐하의 자비와 지혜에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평화를 사랑하는 아르메인 국왕 전하께 깊이 감동했습니다.”
거침없이 작성된 문서를 서로 나눠가진 뒤, 악수를 하며 의례적인 덕담을 나누었다.
실제로 이 밀약은 양국의 우호와 대륙의 안정을 이끈 밀약이다. 아무리 제국의 우위를 인정한 아르메인이라도 자신들의 국경과 접한 레온이 제국의 수중에 들어온다면 기겁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제국 역시 국력 2위의 아르메인이 레온이라는 카드를 손에 넣는다면 불쾌할 터.
그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서로 적당히 나눠먹기로 합의를 보았으니 실로 아름다운 약속이라 할 수 있다.
‘당사자 없는 합의지만.’
복잡미묘한 기분이다. 레온 왕국의 운명이 걸린 사안을 레온 왕국이 아닌 제국에서, 그것도 레온 왕국이 모르게 결정했다.
허나 어쩌겠나. 전쟁에서 패하고, 외교도 꼬이고, 왕실도 위태로운 국가가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다면 감내해야 할 숙명이지 않겠나.
그리고 우리가 레온을 강압적으로 병탄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에넨의 곁으로 떠난다면, 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마땅한 계승자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 목표다.
‘마땅한 계승자라.’
문서를 품 속에 넣기 전에 다시 내용을 확인했다. 몇 문장밖에 적히지 않은 간략한 문서이나, 핵심적인 내용은 전부 담고 있었다.
* 크펠로펜 제국과 아르메인 왕국은 레온 왕국의 적법한 왕가, 아스투리아의 후계자가 사망할 경우 레온의 왕좌 공백에 대하여 공동 대응한다.
*아스투리아 왕가의 공백을 대체할 존재는 레온 왕국의 귀족으로 한하며, 이전 왕가와의 혈연을 고려하되 최우선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새로운 레온 국왕 후보자는 양국의 합의로 결정되어야 하며, 일방적 옹립과 폐위는 금지한다.
*왕좌의 공백으로 인한 혼란 수습과 신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양국은 군대를 파견하되, 그 숫자는 상대국과 2천 명 미만의 격차를 유지한다.
*지브로야 강을 기준으로 이남은 크펠로펜 제국군, 이북은 아르메인 왕국군이 주둔하여 소요 사태를 대비하고 신민의 안전을 보장한다. 주둔 기간은 양국의 협의하에 결정한다.
*제3국이 왕좌 공백에 관여하여 혼란을 야기할 경우 공동으로 대응하며, 유사시 급진적 해결 방안을 고려한다.
다시 봐도 짧고 간결한 내용에 웃음까지 나올 뻔했다.
그래, 이는 마땅한 계승자를 세우기 위한 평화적인 약속이다. 단지 ‘마땅한’ 절차에 누군가 방해를 한다면 무력 충돌도 각오했을 뿐.
‘대륙 1, 2위 국가의 공동 무력 대응이라.’
은근히 숟가락을 얹으려던 국가들도 이 밀약을 알게 되면 기겁하고 물러날 거다.
나라 하나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밀약을 체결한 뒤, 아무렇지 않게 네르카프 백작과 부스로 복귀했다.
물론 네르카프 백작은 밀약 때문에 아카데미까지 온 것이니 더 이상 아카데미에 머무를 이유가 없으나,나와 만나자마자 아카데미를 떠나면 의심의 시선만 받게 된다. 그러니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몸을 빼는 게 옳다.
게다가 이왕 온 김에 류티스와 시간을 보내겠다고 하니거절할 수 없었다. 자국 왕자를 가까이서 모시겠다는데 어떻게 말려.
“응? 숙부, 고문 선생. 벌써 온 겁니까? 조금 더 쉬다 오시지.”
그리고 부스에 도착하니 빵을 씹고 있던 류티스가 반겨줬다.
“소신은 몸이 튼튼한 것이 자랑인 놈인데, 어찌 저하께서 분주하신 동안 편히 쉬고 있겠습니까.”
그러자 평온한 얼굴로 빵을 먹던 류티스의 얼굴에 머쓱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네르카프 백작은 예의상 한 말 같지만, 편히 쉬고 있던 입장에서 저런 말을 들었는데 민망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하지만 류티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더더욱 이상하고 신기하다. 민망함이라는 감정이 당당함에게 잡아먹힌 것 같은 놈이 류티스인데, 저 류티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진짜 숙부네.’
나도 모르게 네르카프 백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왕족이 아니면서 왕자에게 숙부라 불리는 귀족. 그 숙부라는 호칭은 단순히 왕실의 총애와 드높은 권위에서 나온 호칭이 아닌, 정말로 왕족과 친밀하기에 붙은 호칭이었다.
‘제일 검이라 그런가?’
생각해 보면 류티스는 라테르와 검법라시코를 벌일 정도로 검에 대한 애정이 깊은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어릴 때부터 부친의 절친한 심복(자국 제일 검)을 보고 자랐으니 내적 친밀감이 얼마나 높겠나. 어쩌면 류티스의 롤 모델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네르카프 백작에 대해 복잡한 감정이 솟구쳤다. 무려 류티스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호의와, 그럼에도 류티스를 제국에 방생했다는 원망이.
‘…대원수라 바빴겠지.’
애써 원망을 털어내며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대원수가 왕궁의 시종장도 아니고 어떻게 왕자를 일일이 제어할 수 있겠나. 분명 네르카프 백작도 어쩔 수 없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네르카프 백작이 많이 미워질 것 같다.
네르카프 백작과 머리를 맞대느라 다른 걸 잊고 있었다.
“다시 뵙는군요.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허나 빙그레 미소를 짓는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을 보고 나서야 생각났다.
아카데미에 오기로 한 거물은 하나가 아닌 셋이었다는걸.
“예, 주의 가호하심인지 행복이 가득한 나날이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역시 복자께서는 주의 축복을 받으신 분이군요.”
나 역시 미소로 대답하자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은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은 아니다. 복자로 시복된 이후에 첫눈이가 생긴 걸 알았으니, 정말 에넨의 가호로 행복한 나날만 이어졌다. 비록 오늘은 팔자에도 없던 밀약을 체결하느라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나날이었다.
그러니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이 이 좋은 나날을 이어줬으면 좋겠다. 신성교국에서도 ‘나랑 밀약 하나 맺을래?’ 같은 말을 하면 미쳐버릴 수도 있어.
“마침 두 분이 한곳에 계시니 이 역시 주의 뜻이겠지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들고 있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뭐야 저거.’
그런데 주머니 크기에 비해 나오는 내용물이 제법 컸다. 공간 마법이나 성법이라도 걸린 주머니인가? 추기경이 들고 다닐 정도면 충분히 그럴 법한데.
“교황 성하께서 두 복자님들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아무튼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이 건네는 물건, 흰색 의복과 푸른빛이 도는 십자가를 받았다.
‘오.’
그리고 받자마자 느낌이 왔다. 말만 복자지 에넨과 별 관련이 없는 나조차 ‘이거 귀한 거다.’ 라는 판단이 들 정도로 신성한 기운이 풍겼다.
역시 교황이 주는 물건이라 뭐가 다르긴 다르네. 이 물건들을 쓰면 나도 사제들처럼 성법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의복에는 착용자의 청결을 유지하고 날붙이를 막는 효과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상처에 가져다 대면 가벼운 외상을 바로 치유할 수 있고요.”
진짜 가능하네.
십자가를 매만지던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딱 품에 넣고 다니기 적당한 크기의 십자가인데, 아무리 가벼운 외상에 한해서라지만 자가 치유가 가능하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
“…귀한 선물이군요. 저희가 이런 걸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시복이 결정되면 그 유족분들께 무조건적으로 드리는 물건입니다. 복자이신 두 분이 받기에 마땅한 것들이니, 부디 부담 갖지 마시고 편히 받으시길.”
그 말에 실소가 나올 것 같았다. 여명 교단의 역사가 긴 만큼, 사후에 시복이 된 복자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다. 헌데 그 복자들의 유족들에게 줄 정도로 이런 물건들을 양산할 수 있다고?
물론 마법도 외상 치료가 가능하지만, 이 십자가처럼 치유 전용 아티팩트를 만들지는 못했다. 괜히 여명 교단이 종교 승리를 찍은 게 아니구나.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교황 성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예. 성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을 보며 생각했다.
나랑 마르가 죽은 뒤에 시성 기념 축하 선물이 오면, 적어도 내 자식들이 외상으로 죽을 일은 없겠다고.
“저기, 그런데 형제님.”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안하다. 갑자기 ‘좋은 걸 받으셨으니 좋은 얘기도 나눠볼까요?’ 같은 말을 하면 어쩌지?
“잠깐 타니안 형제님과 대화를 나누어도 괜찮을지…”
‘아.’
급속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이 사람의 용무는 타니안이었구나.
“예, 얼마든지요.”
그렇기에 웃는 얼굴로 답해줬다.
오늘부터 조금 더 신실한 신앙심을 가져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