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80)
로판 속 공무원 480화(481/945)
타지에서 만나는 고향 친구는 언제나 반가운 법이다.
“어서 오십시오,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 오시는 길이 불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걱정해주신 덕에 아주 편하게 왔어요. 타니안 형제님은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물론이지요. 2년 동안 머무른 곳이라 그런지, 이제는 집처럼 느껴집니다.”
설령 그 친구가 업무 목적으로 온 추기경이어도.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이라.’
동아리 박람회 때 추기경이 올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고문 형제님과 그 부인되시는 자매님께서 생전 시복이라는 명예를 얻었으니, 관례에 따라 복자에게 지급되는 의복과 십자가를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현직 제국 장관 겸 살아있는 복자를 만나야 하는 상황이라면 추기경급 인사가 오는 것이 옳다. 오히려 그 아래가 온다면 무례하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자매님이면 더할 나위 없는 인사지.’
그런 의미에서 시성성 성장인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이 제국에 방문한 것은 교단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우다. 교단의 수장인 교황 성하께서 직접 오실 수도 없고, 수석 추기경인 스승님도 자리를 비우기 힘든 상황이니.
게다가 내 입장에서도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이 반갑다. 다른 추기경분들은 나이가 지긋하셔서 대하기 조금 어렵지만, 자매님은 어린 시절부터 나를 동생처럼 돌봐준 누이다. 어차피 누군가를 봐야 한다면 더 정겨운 사람이, 나이 차이가 적은 사람이 반가운 법.
“후훗.”
“자매님?”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자매님의 웃음 소리가 들려 고개를 기울이고 말았다.
“아, 죄송해요. 형제님이 교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색다른 기분이어서요.”
쿡쿡 웃음을 흘리는 자매님의 말에 나도 미소를 짓고 말았다.
신성교국에는 사제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이 존재한다. 허나 아카데미처럼 교복을 입지 않고 견습 사제복을 입으니, 신성교국 출신인 자매님은 교복을 처음 보는 걸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에는 사제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는다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나. 당사자도 그럴 정도니 자매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은 안목을 넓힐 수 있는 귀중한 기회입니다. 자매님도 한 번 입어보시겠습니까?”
내 제안에 자매님은 웃고 있던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네?”
그러고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으니, 자매님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의아한 반응이다. 내가 뜬금없는 제안을 한 건 맞지만 저렇게 놀랄 정도인가? 기껏해야 외투만 어깨에 걸치면 충분한데.
“저, 저도 내년이면 서른인데 교복이라뇨.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아.’
이윽고 자매님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 덕에 의아함이 가라앉았다.
자매님은 자기 자신을 나이라는 틀에 가둬버린 것이다. 자신은 서른에 가까운 나이니 교복을 입을 자격이 없으며, 괜히 남들에게 못 보일 꼴만 보이는 거라고.
하지만 너무 과도한 걱정이다. 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제들은 과분하게도 그분의 힘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쓸 수 있기에,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귀족들처럼 젊은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굳이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이를 알 수 없다.
“그럼 저에게만 보여주시죠. 그러면 이상하게 여길 사람도 없겠군요.”
그래도 틀에 갇힌 사람을 강제로 꺼내는 건 가혹한 일이니 적당한 타협점을 제시했다.
애초에 자매님에게 입히려는 것도 내가 입고 있는 외투 정도지, 본격적으로 입힐 생각은 없으니까. 나한테 여학생 교복 같은 건 없다.
“혀, 형제님, 한테만…”
내 말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자매님은 아주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주께서도 지혜는 지식이 아닌 경험에서 나오는 거라고 하셨으니까요.”
“옳은 말씀입니다.”
어느새 당혹감을 밀어낸 자매님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
천상에 계시는 주여. 저는 당신이 자비롭고도 온화하며, 이 세상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며, 그 아름답고 숭고한 가르침을 대륙에 전파하는 우리를 기특히 여기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 압니다. 당연히 알고 말고요.
그렇기에 저에게 이런 축복을 내리시는 걸 테니까요.
‘타니안의 교복…’
점점 몽롱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극도의 행복과 기쁨도 사람을 기절시킬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너무 행복하다. 교복을 입은 타니안,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타니안을 본 걸로도 사흘 철야 기도를 올릴만한 일인데─ 무려 타니안이 입고 있던 외투를 받았다.
그것도 자신에게만 보여달라는 말과 함께.
‘타니안만 아는 내 모습…’
히죽거리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마침 부스에 방문한 손님들이 없어서 타니안과 외진 곳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타니안과의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역시 자매님에게는 조금 크군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팔짱을 꼈다. 이러면 입고 있는 외투를 가져가지 못할 테니.
“그, 그런가요? 저는 괜찮은 것 같은데.”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타니안도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그냥 큰 것 같다는 소감만 말한 거지, 도로 가져가려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대로 도망칠까?’
순간 그런 유혹이 머리를 감싸안았다. 이대로 신성교국까지 도망치면 이 외투는 내 소유가 되는 거 아닐까? 타니안이 2년 넘게 입었던 옷이 내 손에 들어오는 거 아냐?
하지만 참았다. 아무리 탐이 나는 물건일지라도 물건을 위해 사람의 미움을 받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
‘한 번의 행운에 만족하자.’
너무 욕심을 부리면 얻은 것도 잃게 될 거다.
…
쓰으으으읍─ 후우우… 쓰으으으으으읍─ 후우우우…
최대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당연히 타니안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러자 숨과 함께 외투에 희미하게 밴 타니안의 향기가 느껴졌다. 최고의 향기다.
‘계속 입고 있으면 내 옷에도 배겠지?’
좋아. 최대한 버티자.
***
점점 부스에 방문하는 손님이 줄어들었다.동아리 박람회에 방문할 정도로 활동력 넘치는 손님들이라면 작년이나 재작년에 진즉 인사를 나눴을 거고, 하다못해 올해 있었던 결혼식 하객으로도 왔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덕분에 부원들을 부스에 잡아두지 않고 방생했다. 류티스는 네르카프 백작과 함께 보냈고, 타니안도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과 산책이라도 하라며 내보냈다. 설마 혼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자국 인사와 같이 다니는데 사고를 치지는 않겠지.
에리히는 내가 네르카프 백작과 수군거리는 사이에 제노비아한테 잡혀갔더라. 세라도 같이 사라졌으니 잘 놀고 있을 거라 믿는다.
‘쟤들도 보낼까.’
아직 부스에 남아있는 아인테르와 라테르를 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미 부원 중 넷이나 사라졌는데 쟤들도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리고 라테르를 쫓아내려던 내 음모를 눈치챘는지,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손님이 왔다.
“라테르 저하.”
부스 앞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정리하던 라테르에게 한 노인이 다가왔다.
흰머리가 섞인 청발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수염을 쇄골 부근까지 기른 노인.
“킬라나스 공작?”
아카데미에 오기로 한 마지막 거물이었다.
“이 늙은이가 이제야 저하께 인사를 드립니다. 최대한 서둘러 왔지만, 요즘은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더군요.”
이미 아르메인 왕국과 신성교국의 인사가 자신보다 먼저 왔다간 것을 알고 있는지, 킬라나스 공작은 라테르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아무리 타지에 있는 왕자라도 공작께서 언제나 전하와 왕국을 위해 애쓰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요. 이리 와준 것으로도 기쁩니다.”
“허허, 저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물론 킬라나스 공작이 언제까지 오겠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먼저 온 국가가 이기는 경쟁 레이스도 아니었으니 라테르는 직접 킬라나스 공작의 손을 잡고 다독였다.
그 광경을 보니 미약한 긴장감이 샘솟았다. 왕자가 존대를 할 정도로 존중받는 공작─ 그것도 마도의회의 의장이 직접 아카데미까지 왔다. 네르카프 백작처럼 어마어마한 사안을 들고 왔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물이다.
‘제발.’
본능적으로 품 속에 있던 십자가를 매만졌다.
에넨, 영원한 푸른 하늘, 콘스탄티나. 제발 아무나 나를 보고 있다면 킬라나스 공작은 그냥 놀러 온 거라고 해줘. 대륙 강대국들과 연달아 밀약을 맺는 건 내 멘탈이 못 버텨.
“저하. 실례가 아니라면 저하의 친우분들과 인사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몇 명은 이 자리에 없지만… 곧 돌아올 겁니다.”
기도 메타에 돌입한 사이, 라테르와의 인사를 마친 킬라나스 공작이 슬쩍 입을 열었다. 말로는 라테르의 친우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나와 트릭시 같은 제국 주요 인사를 뜻하는 건 나도 알고 라테르도 안다.
“이드라펜 후작, 아인테르 리브노만입니다. 제국 생활에 익숙지 않은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죠.”
“그렇군요. 역시 리브노만의 피를 이은 분답게 자비롭고도 선량하신 분입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렇기에 라테르는 아인테르를 먼저 킬라나스 공작에게 소개해 주었다. 일단 아인테르는 후작이라는 것과 별개로 황제의 동생이니 명목상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윗사람이다.
그리고 아인테르 다음은,
“마종공 각하. 직접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공작인 트릭시다.
“저 역시 귀공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유벤에 없어서는 안될 기둥이라고요.”
거의 90도에 가까운 모습으로 허리를 숙이는 킬라나스 공작에게 트릭시는 온화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일국의 공작이자 원로라는 입장을 고려하여 상호 존대를 택한 모양이다. 하긴, 왕자도 존대를 하는 상대에게 반말로 응대하면 조금 그렇긴 하지.
“오오, 그렇습니까? 이 늙은이의 인생에 다시없을 과분한 영광입니다.”
정작 존대를 듣는 킬라나스 공작이 자신을 아랫사람처럼 여기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그냥 온 거구나.’
그래도 폴더폰처럼 허리를 숙이는 킬라나스 공작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에게 올 생각을 하지 않고 트릭시에게 붙어있는 걸 보면 딱히 나한테 용무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 그거면 된 거야… 평범한 손님은 언제든 환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