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82)
로판 속 공무원 482화(483/945)
세르베트 공작령. 제국의 다섯 공작령 중 하나이자 제도 남서쪽에 위치한 대영지. 수도권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공작령 중 인구와 발전도로는 가장 앞선 곳.
또한 제도와 가장 가까운 공작령인 덕분에 제도 방위를 이루는 기둥 중 하나이며, 실제로 역대 세르베트 공작들은 제국 제일의 마법사이자 제국 최후의 방패라는 명성을 독점하고 있었다. 트릭시가 독보적인 거지, 선대들도 만만치 않은 괴물이었다는 뜻.
아무튼 그러한 중요도로 인해 나 역시 업무 목적으로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정작 트릭시와 연인이 된 이후로는 한 번도 간 적이 없다는 게 아이러니한 점이지만.
그래서 빠른 시일 내에 트릭시와 함께 방문할 생각이기는 했다. 정식으로 부부가 되기 전에 아내의 가신들과 인사라도 나눠야 하지 않겠나.
‘수학여행…’
단지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다.
물론 올해 수학여행 후보지 중 세르베트 공작령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재작년은 보야르 공작령, 작년에는 체네스 공작령을 방문했으니 올해는 다른 공작령에 가겠지.
허나 세르베트 공작인 트릭시도, 울켄 공작의 딸인 마르도 별말이 없길래 올해 수학여행지는 하블렘 공작령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조만간 전승공한테 안부 인사 겸 영지에 놀러 갈 것 같다고 말하려 했는데.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에 조금 당혹스러운 눈으로 트릭시를 바라보자, 마르와 대화를 나누던 트릭시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비밀로 해서 미안하구나. 깜짝 선물 느낌으로 알려주고 싶어서 숨기고 있었단다.”
정말 서프라이즈를 노렸다는 말에 얼떨떨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몇 달 전부터 같이 세르베트 공작령에 가자고 노래를 부르듯 말하긴 했다. 트릭시도 내 열망을 알고 있었으니, 마침 합법적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겠지.
“설마 마르도 알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지금 학생회장을 제가 가르쳤잖아요. 며칠 전에 연락하다 알게 됐어요.”
아쉽다는 듯 덧붙인 트릭시의 말에 마르도 쿡쿡 웃으며 답했다.
트릭시의 함구가 무색하게 마르는 독자적인 연락망을 통하여 공작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하긴. 다른 곳도 아닌 학생회가 수학여행지를 모를 리 없고, 1년 선배이자 공녀인 마르에게 비밀을 유지할 필요도 없었을 터. 학연을 망각한 트릭시의 실수다.
“예전에 울켄에는 방문했었는데, 정작 세르베트에는 가 본 적이 없었네요? 오라버니 영지하고도 가까운 곳이잖아요.”
그리고 놀란 듯 눈을 깜빡이던 리제도 손뼉을 치며 기꺼운 기색을 보였다.
세르베트 공작령은 제도 남서쪽에 위치한 영지지만, 타일글레헨 백작령 서쪽에 있는 영지이기도 하다. 거의 이웃이라고 할 정도로 붙어있기에 느긋하게 마차를 타고 가도 금방 도착할 거리다.
그 정도로 가까운 곳이지만 여러 일정이 겹쳐서 가지 못했는데, 수학여행을 명분으로 가게 되었다니 기쁜 모양이다.
“세르베트에 있는 산림공원이 엄청 예쁘다고 들었는데, 이제야 직접 볼 수 있겠어요.”
“후후, 그런 소문이 퍼졌었니? 영주로서 기쁜 소식이구나.”
뒤이은 리제의 말에 트릭시는 귀를 파닥이며 흐뭇한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단순히 관광지 칭찬을 받아서 보일 모습이 아니다.
‘일개 관광지라 치기에는 의미 깊은 곳이지.’
리제가 말한 산림공원은 전대 세르베트 공작─ 즉 트릭시의 아버지가 마법으로 직접 만든 곳이다. 숲을 사랑하는 엘프 아내를 위하여.
심지어 트릭시가 태어난 곳도 산림공원 내에 있던 별장이라고 하니, 트릭시에게 있어서 그 산림공원은 가족을 향한 애정이 깃든 곳이고, 마법사들 입장에서는 업계 전설이 이 땅에 강림한 성지나 다름없다. 트릭시가 격한 반응을 보여도 이상하지 않다.
“산림공원 내에서도 카토반 가문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단다. 나 혼자 가기는 심심하니 같이 가면 되겠구나.”
“그,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럼. 우리는 가족이잖니.”
훈훈한 대화가 오가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쿠키를 하나 씹었다.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수학여행지가 세르베트 공작령이라면 오히려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일은 아니다. 당장 학생인 리제도 좋아하잖아.
‘선물이라도 가져가야 하나?’
그건 그렇고 예비 부인의 집에 방문하는 건데 빈손으로 가기는 좀 그렇다. 트릭시 대신 영지를 관리하는 집사장에게 감사 선물이라도 보내야 할 것 같은데.
문제는 공작령의 집사장이라면 아쉬울 거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공작령 2인자면 후작도 은근히 눈치를 살필 정도인데, 어지간한 선물은 눈에 차지도 않겠지.
‘…모피라도 보내자.’
그렇게 긴 고민 끝에 북방 주력 생산품을 하나 떠올렸다.
그래, 모피면 딱 적당할 것 같다. 북방 파벌의 수장이 북방에서 나는 물건을 줬다는 상징성도 있고, 모피 자체도 나름 사치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물건이지 않나.
넉넉하게 100장 정도 준비하면 되겠다.
박람회는 아무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밀약을 위해 방문한 네르카프 백작은 그 후로 류티스와 어울리다가 적당히 귀국했고, 킬라나스 공작은 매일매일 트릭시와 마법에 대한 토의를 나누다 성불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은 정말 박람회 구경 온 손님처럼 이곳저곳을 누비다가 사라졌다.
셋이나 되는 거물 중 귀찮은 안건을 들고 찾아온 사람이 단 하나. 아주 양호하고 괜찮은 비율이다. 게다가 그 한 명마저도 들고 온 안건만 귀찮은 것이었지, 밀약 체결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됐었다. 이 정도면 양호한 수준을 넘어서 선녀다.
‘마지막 박람회라고 순한 맛이구나.’
실로 다행이다. 에넨의 복자이자 영원한 푸른 하늘의 명예 제사장이자 콘스탄티나의 은인이 되어서 그런지, 올해 들어 행운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 같다. 이 맛에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건가…
‘저 새끼는 지금까지 무교였나?’
그렇기에 나도 모르게 반쯤 혼이 나간 에리히를 쳐다봤다. 저 동생이라는 놈이 파멸적인 눈치를 소유하고, 그 반작용으로 골골거리는 걸 보면 믿는 신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더러운 무신자.’
이번 동아리 박람회의 인기 스타는 저 무신자였다. 그야 양옆에 여자를 두고 온갖 곳을 돌아다니는 새끼가 있다면 누구라도 시선을 주지 않겠나. 아무리 에리히의 자의가 아니었더라도, 구경꾼들에게 자의냐 타의냐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목격담을 들어보니 에리히를 양쪽에서 포박한 세라와 제노비아는 제법 명확한 스킨십을 했다고 한다. 아카데미 학생과 교직원 앞에서, 제국과 타국의 손님들 앞에서 자신들이 심상치 않은 관계라는 걸 과시한 것이다.
그 화려한 과시로 인해 구경꾼들이 셋을 연인 관계라고 착각한 것은 덤이다. 현실은 연인은커녕 고백 공격을 받고 스턴에 걸린 상황이지만.
“에리히.”
“어, 응?”
점점 흐릿해지는 눈을 한 채 세라의 무릎에 (반강제로) 누워있던 에리히는 세라의 목소리에 황급히 정신을 다잡았다.
“자아, 아앙~”
그리고 강력한 공격에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허나 떨리는 것과 별개로 순순히 입을 벌려 마카롱을 받아먹는 걸 보니, 에리히도 이 상황에 순응한 것 같다.
‘사람도 고칠 수 있었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가망이 없어 보이던 사람도 결국은 변해가고 있다. 크라시우스 가문에 조카는 없고 자식만 가득했을 미래가 변하고 있다.
박람회가 끝났기에 제노비아는 이 자리에 없지만, 작별 인사를 하던 제노비아의 표정이 밝았던 걸 고려하면 제노비아도 큰 진전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믿는다.
“어때, 맛있어?”
“응… 맛있네.”
졸지에 누워서 마카롱을 먹게 된 에리히는 목이 막히는 듯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확실히 누워서 음식을 먹는 건 조금 가혹한 일이지.
하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세라가 에리히를 답답하게 한 횟수보다 에리히가 우리를 답답하게 한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그런데 타니안, 외투는 어디에 둔 거지?”
잠시 에리히를 바라보던 라테르가 자연스레 타니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에리히와 세라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배려라 형으로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께 기념으로 드렸습니다.”
“기념? 교복을?”
“저희에게는 늘 입는 옷이지만, 신성교국에서 자란 자매님에게는 살면서 입어볼 일이 없는 옷이라서요. 다행히 자매님도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타니안의 대답에 라테르는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그래도 박람회까지 와서 교복을 기념품으로 가져가는 게 정상적인가 의문이 든 것 같다.
그래도 의문은 짧았는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막말로 아카데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기념품이라며 들고 갔어도 가져가는 사람 마음 아니겠나. 굳이 제3자가 개입할 일이 아니다.
“그렇군. 혹시 여벌 외투가 없다면 말해라. 언제든지 줄 테니.”
“하하, 감사합니다.”
그 와중에 친구가 입을 옷이 없을까 봐 배려도 해주는 걸 보니, 에리히뿐만 아니라 79년도 부원들은 전체적으로 사람이 된 것 같다.
이쯤 되면 제국 아카데미는 정말 대륙 제일의 교육 기관인 게 아닐까. 무자비하게 남의 나라 교육 기관에 입학했던 왕족들이 보편적 양심을 가지게 되다니, 이보다 훌륭한 교육이 어디 있겠어.
‘이렇게 증명할 필요는 없는데.’
물론 교장조차도 3년이나 타국 왕족, 차기 성자를 학생으로 두며 최고 교육 기관임을 증명하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괜히 이런 식으로 증명했다가 나중에 다른 나라 왕족들도 입학한다고 하면 어떡해.
‘…다른 나라 왕족이라.’
짧게, 아주 짧게 상상했음에도 오한이 들었다.
만약 그런 미래가 온다면 미래의 교장, 미래의 아카데미 감찰관에게 애도를 표할 뿐이다.
“참, 그러고 보니 다음 수학여행 장소가 세르베트 공작령이라 들었는데─”
미래의 누군가에게 애도를 표하는 사이, 어디선가 소식을 주워들은 류티스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 지금은 그냥 수학여행 생각이나 하자. 미래에 생길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일을 걱정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