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83)
로판 속 공무원 483화(484/945)
세르베트 공작령이 올해 수학여행지라는 걸 알게 된 직후, 위리디아 백작령에서 구르고 있을 집사장에게 새로운 지시를 하달했다. 최상급 모피 100장을 예쁘게 포장해두라고.
안 그래도 바쁜 집사장을 개인적 이유로 귀찮게 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했지만, 집사장은 이미 수십 년이나 지방관 생활을 겪으며 단련된 노련한 관료. 모피 100장 정도는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확보하는 기염을 토했다.
솔직히 시킨 입장에서도 경이로울 정도였다. 집사장이 아니라 행보관이었나?
– 겨울이었다면 다소 시간이 걸렸겠지만, 지금은 날이 풀리고 있는 시기라 모피의 수요가 줄어들었습니다. 덕분에 각하께서 흡족해하실만한 품질로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수고 많았다. 집사장도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몇 장 가져가도록.”
– 감사합니다, 각하. 가보로 여기겠습니다.
아니 뭐 가보로 여길 것까지야.
정중히 허리를 숙이는 집사장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백작령의 집사장이 이런 걸로 허리까지 숙이니 민망할 정도다. 아직 작위를 받은 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충성심이 높은 건가.
물론 아랫사람의 충성심이 높으면 좋은 일이니 굳이 조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긴장이 풀릴 테니까.
‘과장들처럼.’
분명 처음에는 군기가 바짝 들었으면서 어느새 광인 집단이 되어버린 과장들이 떠올랐다. 그 새끼들은 긴장이 너무 빨리 풀렸었어.
“앞으로 집사장에게 줄 것이 많은데, 벌써 가보를 정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아무튼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며 농담 섞인 말을 건네자, 집사장의 허리는 더더욱 숙여졌다.
트릭시 앞에 선 킬라나스 공작이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제도의 저택까지 운반된 모피는 트릭시의 세심한 점검을 받아야 했다.
“부드럽구나. 윤기도 훌륭하고.”
하지만 보기만 열심히 봤다는 거지, 딱히 전문적으로 흠을 찾아냈다는 건 아니다. 애초에 트릭시의 주분야는 마법이지 모피 같은 게 아니잖아.
단지 트릭시도 자신을 대신하여 공작령을 관리하는 집사장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집사장에게 줄 선물이라고 하니까 괜히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다. 영주와 가신 사이의 사이가 좋은 것 같아 보기 좋아.
“선물이라고 하면 기뻐하겠어.”
“그거 다행이네.”
듣고 싶은 대답이었기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나름 희귀한 물건이라고 준비하기는 했지만, 선물은 주는 사람의 의도보다 받는 사람의 취향이 더 중요하지 않겠나. 집사장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집사장의 상관인 트릭시가 ‘마음에 들어 할 듯.’이라고 공인했으니 마음이 놓일 수밖에 없다.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평범한 것보다 색다른 걸 좋아했단다. 북방에서 가져온 물건이라고 하면 모피가 아니라 잡초여도 보관할 아이야.”
심지어 트릭시는 단순한 상관 수준을 넘어, 집사장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본 존재다. 가신의 취향 정도야 사소한 것도 파악하고 있을 터.
“혹시 싫어하는 기색이면 트릭시가 추천한 선물이라고 말할게.”
“후후, 그건 참아주렴. 나도 그 아이에게 원망 받기는 싫단다.”
가벼운 농담을 건네자 트릭시도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
그리고 집사장을 아이라 칭하는 트릭시의 말에 슬며시 혀를 깨물며 이성을 일깨웠다. 이러다 나도 집사장에게 아이라고 할 것 같다.
당연하지만 나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 트릭시가 말하는 집사장은 데오도르 제다스 오브 시칠라 백작. 트릭시의 부재를 훌륭히 커버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 유능한 가신이자, 대대로 카토반 공작가를 지탱한 제다스 백작가의 현 가주.
덤으로 현재 쉰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이다.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
‘아버지보다 연상인 백작에게 아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참사다. 일단 나는 트릭시의 부군이 될 예정이기에 하대까지는 괜찮다. 주인 부부가 가신에게 편히 말하는 건 당연하니까.
그러나 아이 운운하는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발언이다. 바로 사교계 인기 스타가 되는 거지. ‘감찰성 장관의 교만, 이대로 괜찮은가?’ 라는 헤드라인이 박힌 신문이 돌아다닐 수도 있고.
‘끔찍하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미래다. 내가 최연소 부장이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미지 관리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비록 사교계에 활발히 얼굴을 비춘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말이 통하고 상식적인 인간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업무 하나하나도 최대한 세심하게 처리하고 진행했다.그렇게 쌓아 올린 이미지를 한 방에 날릴 수는 없다.
그렇기에 갑자기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긴장감과 사명감이 솟구쳤다.
집사장을 단순한 트릭시의 가신이 아닌, 예비 처가 정도로 생각하고 임하자.
나 홀로 결전 태세에 임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 수학여행 날이 되었다.
“이 마차에 타시면 돼요! 넷이 탈 수 있는 마차예요!”
그리고 어느덧 선도부장으로 진화한 올리비아에게 마차를 하나 배정 받았다.
나, 트릭시, 리제, 린. 올리비아의 말처럼 딱 가족끼리 탑승할 수 있는 마차를.
“고맙다. 회장에게 배려 잊지 않겠다고 전해주고.”
“네! 꼭 전달할게요! 참, 회장도 직접 안내해 드리고 싶었는데, 다른 업무가 많아 그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했어요!”
“당연히 이해하지. 내가 회장 바쁜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내 말에 히히 웃음을 흘린 올리비아는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빠르게 물러났다.
이상하게 쟤를 보면 감동의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처음 봤을 때는 순무도 언니와 나눠먹는 가난하고 비참한 아이였는데, 이제는 당당한 학생회의 간부로서 아카데미의 중역이 되었다. 졸업만 하면 쟤 언니처럼 내가 낚아챌 예정이니 미래도 보장됐고.
뿌듯하다. 3년 동안 후원한 아이가 밝고 튼튼하게 자라 사회의 힘찬 노예─ 아니, 노동력이 되다니. 내가 아카데미에서 한 일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잘한 일이 아닐까 싶다.
“활기찬 아이구나. 평민 학생들은 알게 모르게 눈치를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저 아이는 그런 게 없어.”
“학생회에 귀족이 많은데도 잘 어울리는 걸 보면 그냥 사교성이 좋은 것 같아.”
그래, 좋아도 너무 좋은 애다. 생각해 보면 나와 처음 만났을 당시에도 자기 언니인 아멜리아와 달리 크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
그게 단순히 사람을 좋아해서인지,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내가 자신을 위협하지 않을 거라는 본능적 직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올리비아의 물렁함과 사교성이 지금의 올리비아를 만들었다.
“그래서 올리비아가 귀족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얘기를 하는 애들도 있어요.”
“흥미로운 얘기네.”
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확실히 평민이라는 제약을 가지고도 저렇게 성공했는데, 시작점이 처음부터 귀족이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부질없는 가정이다. 이미 평민으로 태어난 올리비아가 귀족이라는 시작점에 서는 건 불가능하다. 애석하게도 타고난 피는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니.
허나 제국은 타고난 피를 품은 채 죽어야 하는 곳이 아니다. 능력이 있다면 평민이라는 시작점에 섰더라도, 반환점에서 귀족이 될 수도 있다.
‘둘 중 하나만 작위를 얻으면 되겠지.’
지금도 위리디아에서 열심히 구르고 있을 아멜리아를 떠올렸다. 아멜리아가 위리디아에서 큰 공을 세운다면 남작이 될 테고, 아멜리아의 동생인 올리비아 역시 자동으로 귀족이 된다.
아니, 어쩌면 올리비아가 무예로 공을 세워 귀족이 될 수도 있고. 어느 쪽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아, 일단 타자. 서있는 것보단 앉아서 얘기하는 게 낫지.”
멀어져 가는 올라비아의 뒷모습을 보다 마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제도에 사는 우리가 아카데미까지 와서 마차를 타고 세르베트에 가는 게 맞는 건가. 동선이 많이 이상한데.
그렇다고 아카데미 소속으로서 따로 행동할 수도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
마침내 그날이 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카토반 공작가의 가신들이 100년이라는 세월 동안 꿈꿔왔을 염원의 날이 되었다.
‘내가 집사장일 때에 이런 경사가 생기다니.’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영광스럽게도 공작 각하를 대리하여 공작령을 관리하는 몸으로서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나뿐만 아니라 시종장, 시녀장, 재무감, 호위대장, 서기관까지. 전부 나처럼 격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나. 그러니 지금만큼은, 지금만큼은 이래도 된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부군이라 부를 분이 생기는군요.”
“크흑!”
그 와중에 시녀장의 황홀한 듯한 중얼거림을 듣고 호위대장이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우락부락한 무인이 어린아이처럼 우는 걸 보는 것은 다소 힘겨운 일이나, 아까도 생각했듯 지금만큼은 괜찮다.
‘아버지…’
그 광경을 보다가 다시 눈가를 닦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으니까.
“공작 각하께서는 이 제국에서 누구보다 외로운 분이다. 감히 그분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도, 뒤에서 받쳐줄 수 있는 사람도 없지. 네 할아버지도, 나도, 그리고 너도 그분 입장에서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하다.”
약 10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보다 고귀하고 화려해보이는 각하는 사실 누구보다 외롭고 쓸쓸하신 분이라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분의 공허를 채울 수는 없을 거라고.
“허나 우리는 명예로운 카토반 가문을 섬기는 자들이다. 아무리 그분에게 있어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우리에게 있어 그분은 일생의 주인이시다. 이를 명심하거라.”
그리고 그것을 핑계로 각하를 향한 충성을 잊지 말라고.
“…그래도 아쉽구나. 그분이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을, 평범한 여인처럼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싶었거늘.”
아버지는 결국 마지막까지 그리 말씀하시며 세상을 떠나셨다. 일생을 섬긴 주군이 웃는 걸 보지 못한 안타까움과─ 그럼에도 언젠가는 주군의 행복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품으며.
다행히 그 믿음은 빛을 보았다. 에넨 곁에 계실 아버지도 웃고 계실 거다.
‘카토반 공작가의 사위.’
아름다운 단어다. 100년 동안 공백이었던 공작의 반려 자리에 드디어 누군가가 앉게 되었다.
그것도 현직 제국 장관이자 제국백이라는 부족함 없는 거물이.
‘평민이어도 감지덕지였을 텐데.’
계속 눈물만 나온다. 각하와 감찰성 장관이 연인 관계라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결혼을 앞두고 세르베트 공작령에 방문한다고 하니 그 감회가 새롭다.
오늘부터 난 사지가 찢겨도 감찰성 장관의… 아니, 부군 각하의 지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