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84)
로판 속 공무원 484화(485/945)
세르베트로 향하는 길은 보야르, 체네스로 갈 때보다 편안하고 안정적이었다. 공작령이라는 상징성과 별개로 제국 남쪽 끝, 서쪽 끝에 위치한 두 공작령과 달리, 세르베트는 제도와 바로 붙어있는 지역이니까. 제도로 상경하는 길이 좁고 불편한 건 이상하지 않나.
마차 여러 대가 나란히 달리고도 남는 폭, 돌멩이 하나 보이지 않는 깔끔함, 야생 동물도 감히 모습을 보이지 않는 치안. 마차가 아닌 도보로 이동했어도 아무 문제 없을 환경이었다.
‘또 잠들었네.’
그래서인지 마차에서 몇 번이나 잠에 들었다가 깨는 걸 반복했다.
딱히 잘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제도로 향하는 길은 무수히 많은 공무원들과 영주들의 영혼이 갈려가며 이루어진 작품. 그 도로 위를 고오오급 마차를 타며 달리니 침대도 이런 침대가 없었다. 오죽하면 경치 구경에 열중하던 리제와 린마저 어느 순간 눈을 감았을까.
“깼니?”
“아, 응.”
그리고 트릭시는 모두가 잠든 마차 속에서 홀로 깨어있었다.
민망하다. 아직 어린 둘이 잠들었다면 나라도 트릭시의 대화 상대가 되어줬어야 하는데, 대화는커녕 수면 상대가 되고 말았다.
“미안해. 혼자 심심했지?”
“아니, 괜찮단다. 아카데미에서 세르베트로 가는 건 오랜만이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어.”
내 사과에 트릭시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 곧 켄느에 도착할 테니 준비하렴.”
그 말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자고 있던 리제와 린을 흔들었다.
드디어 수학여행지에 도착했는데 비몽사몽한 얼굴로 내리게 할 수는 없다.
켄느. 세르베트 공작령의 중심지이자 제국 10대 도시 중 하나에 속하는 대도시.
제도와 가장 가까운 대도시기에 온갖 물자와 사람들이 모이는 요충지이나, 정작 켄느만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고개를 기울이게 만드는 미묘한 곳이기도 하다. 솔직히 켄느가 개성이 조금 부족하기는 해.
그래도 어디까지나 개성이 부족하다는 거지, 켄느가 그저 그런 도시라는 뜻은 아니다. ‘제국에 있는 것이라면 켄느에도 있고, 켄느에 없다면 제국에도 없다.’ 라는 말이 괜히 존재하겠는가. 그만큼 켄느의 번영은 제도 다음가는 수준이라 말할 수 있다.
…사실 10대 도시쯤 되면 다 그런 말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그 말의 원조는 켄느니까. 아무튼 켄느가 대단한 거다.
“응?”
그리고 막 잠에서 깨어나 하품을 하던 리제는 켄느의 거리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제도하고 비슷하네요?”
‘오.’
리제의 말에 속으로 감탄했다. 마차 안에서 대충 본 건데도 그걸 눈치채다니.
“켄느는 초대 세르베트 공작께서 만든 계획 도시란다. 제도를 참고하여 만들었으니 제도와 비슷할 수밖에 없지.”
트릭시도 리제의 눈썰미에 감탄했는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트릭시의 말처럼 이 켄느는 허허벌판에 만들어진 신도시다. 켄느가 만들어진 시기─ 즉 아펠스의 모가지를 딴 시기의 크펠로펜은 왕국에서 제국으로 진화한 덕에 적지 않은 혼란을 겪었고, 제도에 과도한 인구 밀집이 이루어져 꽤나 고생을 했었다.
그 밀집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켄느이며, 그것이 켄느가 무개성 도시가 된 서글픈 원인이었다. 당장 인구를 수용해야 하는데 개성이고 나발이고 무슨 소용이야.
“제도가 익숙하다면 켄느에서 길을 잃어버릴 일은 없으니 마음껏 놀렴.”
농담 같은 진담이라 픽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나도 켄느에 처음 왔을 때, 제도랑 유사한 구조 덕분에 편히 돌아다닐 수 있었지.
확실히 계획 도시가 그런 점은 편하다.
***
칼과 아이들이 숙소로 선정한 호텔에서 짐을 푸는 동안, 나는 먼저 공작성으로 향했다.
아무리 아카데미 파견 강사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지만 공작인 내가 호텔에 머무를 수는 없다. 내 눈치를 볼 직원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게다가 영지에 있는 시간보다 제도에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긴 나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영지에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고, 언제 가신들과 만날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나의 시간과 가신들의 시간은 다르니까. 나에게 잠깐이라 생각한 시간도, 그 아이들에게는 평생에 가까운 시간일 수 있으니까.
“각하, 어서 오십시오.”
그렇기에 공작성에 도착하자마자 반겨주는 가신들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아무 걱정 없이 마법에 몰두할 수 있게, 마탑의 탑주로 지낼 수 있게 노력하고 있는 아이들. 만약 이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겠지.
“헌데 각하. 어찌하여 혼자 오셨습니까?”
“으, 으응?”
홀로 감동에 젖어있는 사이, 굽혔던 허리를 다시 올린 집사장이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세히 보니 집사장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집사장의 뒤에 있던 다른 가신들도 말만 하지 않을 뿐, 조금 따가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저희는 카토반 공작가를, 각하를 섬기는 것을 일생의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집사장의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이 아이들의 가문은 카토반 공작가를 지키는 방패나 다름없다는 걸.
“카토반 공작가를 지탱하는 기둥이자 각하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가신. 그것이 저희의 자부심입니다.”
그 역시 알고 있다. 이 아이들이 나를 따르는 건 단순한 이익 문제가 아닌 명예와 자긍심이 걸린 문제라는 걸.
그래서 혼란스럽다. 그런 아이들이 갑자기 저런 말을 꺼내는 건 도대체─
“그런 저희니만큼, 각하의 부군께 인사를 드릴 자격은 충분하다 믿고 있습니다.”
‘아.’
뒤이은 집사장의 말 덕분에 가신들의 마음을 깨달았다.
이 아이들, 공작의 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한 거구나.
“…숙소에서 짐을 풀고 있단다. 바로 성으로 오겠다고 했으니 서운해하지 말렴.”
“숙소, 말씀이십니까?”
“그래.”
기특하고도 민망한 마음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 결혼을 열렬히 반겨준다는 것은 기쁘지만, 이렇게 과한 열정을 보일 줄은 몰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결혼은 나만의 일이 아닌 가신들의 염원이 되었구나.
“왜 부군 각하께서 숙소에 계십니까?”
허나 기특한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당혹감이 몰려왔다.
왜 숙소에 있냐니. 그야 놀러 왔다면 당연히 숙소부터…
“당연히 공작성에 계시는 게 마땅하지 않습니까?”
?
“아직 정식으로 혼인을 치른 것은 아니지만, 그분이 각하의 부군이라는 건 온 대륙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헌데 부군 각하께서 공작성이 아닌 외부에서 지내시다니요.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기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물론 칼이 아카데미 감찰관으로서 세르베트로 온 것이기에, 아카데미가 선정한 숙소에 머무는 것이라는 명분은 있다. 그렇지만 집사장의 표정을 보니 그런 말을 해봤자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이미 저 아이 머릿속에서 칼은 내 남편으로서 처가에 온 사람이다. 아카데미나 감찰관이라는 단어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각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희가 직접 부군 각하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단호한 집사장의 태도에 슬쩍 집사장 뒤에 있는 가신들을 쳐다봤다.
당연하게도 다른 가신들의 표정도 집사장과 비슷했다.
내 성에 내 편이 존재하지 않았다.
***
멍하니 마차의 천장을 바라봤다. 마차에서 내린 지 얼마나 됐다고 도로 마차에 타게 됐다.
그것도 카토반 공작가에서 보낸 마차를.
‘이게 뭐야.’
진짜 뭐야.
당혹스러운 기분에 뒷목을 매만졌다. 트릭시가 공작성으로 가는 걸 배웅한 후, 리제와 린이 짐을 푸는 걸 도와주고 있었다. 여벌옷 몇 벌만 들고 온 나와 달리 둘이 가져온 짐은 제법 많았으니까. 여유가 있는 사람이 도와주는 게 맞지.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통신구가 빛을 냈다.
– 칼, 혹시 짐 다 풀었니?
“아니, 아직. 지금 막 시작했어.”
– 그건 다행이구나.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쉰 트릭시는 조금 피곤한 기색을 풍기며 사정을 설명했다.
카토반 공작가의 가신들이 나와 리제, 린이 공작성에서 머무르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카토반 공작가의 시조인 설검공은 작위와 상관없이 손님을 정중히 대접했는데, 정작 가족을 밖에서 지내게 하는 것이 말이 되냐는 이유와 함께.
졸지에 가문 시조가 언급되니 트릭시도 가신들의 뜻을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숙소─ 공작성으로 이동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거고.
‘나는 괜찮은데…’
뒷목을 주무르던 손을 떼고 맞은편에 앉은 리제와 린을 바라봤다.
그래, 나는 괜찮다. 호텔이 아닌 공작성에서 지내게 될 줄은 몰랐지만 큰 문제는 없다. 남편이 아내 집에서 지내는 게 뭐가 이상해.
다만 나와 같이 끌려가는 리제와 린에게 미안하다. 올해가 친구들과 보내는 마지막 수학여행이잖아. 트릭시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는지 공작성 얘기를 꺼낼 때 머뭇거릴 정도였다.
그래도 나와 트릭시의 죄책감과는 달리, 둘은 크게 괘념치 않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공작성을 보는 건 이걸로 세 번째네?”
“아, 그러네? 울켄이랑 체네스도 봤으니 이번에 세 번째야.”
공작성에 가는 걸 갑작스러운 변수가 아니라 업적 달성 정도로 여기는 듯한 대화.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면 가는 내내 마음이 아팠을 텐데.
‘세 번째라.’
그건 그렇고 평범한 백작가 영애, 남작가 영애가 나와 엮이더니 다섯 공작성 중 셋이나 보게 생겼다. 이 정도면 진짜 인생 업적 아닌가.
내가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생각하니 오묘한 기분이다.
공작성 정문에서 마차가 멈추자마자 누군가 마차의 문을 대신 열어주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몸이 굳고 말았다.
“어서 오십시오, 부군 각하! 카토반 공작가의 종이 부군 각하를 뵙습니다!”
“””부군 각하를 뵙습니다!”””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이는 가신단, 그 뒤에서 같이 예의를 표하는 사용인들과 기사들.
심지어 정문에서 건물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군악대가 근엄한 자태로 서있었다.
“와아…”
린의 나지막한 탄성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와아…”
하지만 가신들 앞에 있던 트릭시를 발견하고 나 역시 탄성을 흘렸다.
트릭시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마치 이 참사를 막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운 것처럼.
‘한이 깊었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100년 동안 공작으로 군림한 트릭시도 막지 못하다니. 부군을 향한 가신들의 열망이 얼마나 뜨거웠을지 알 것 같다.
그 부군이 나라는 게 문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