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85)
로판 속 공무원 485화(486/945)
새삼스럽지만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은 아니다. 공후백자남 중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 그중에서도 계승이냐 단승이냐, 계승이라고 치면 영지가 있느냐 없느냐, 또 그 영지는 얼마나 부유한가 등등. 귀족의 위세를 가르는 요소는 많고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카토반 공작가의 가신들은 귀족 중에서도 실세로 손꼽히는 귀족들이다. 고위 귀족으로 분류되는 백작위, 공작을 가까이서 모신다는 명예, 부재중인 공작 대신 공작령의 업무를 본다는 실질적 권한. 이 모든 것이 결합된다면 후작이라도 아랫사람처럼 대하기 난감할 수밖에 없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공작이 헛기침을 하면 바로 대가리 박아야 하니까.
그렇기에 세르베트 공작령에 오기 전, 집사장은 물론 다른 가신들에게도 최대한 정중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었다.
“이리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부군 각하. 신년하례식 때 먼발치에서 뵙기는 했지만,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군요.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집사장이 아랫사람이기를 자처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송구라니요. 시칠라 백작께서 세르베트를 위해 밤낮 없이 노력하신다는 건 익히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제가 먼저 찾아오는 것이 맞지요. 오히려 이제야 찾아와 죄송스럽습니다.”
희미해지는 정신줄을 빠르게 부여잡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집사장 입장에서 나는 상관의 남편이니 정중히 나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숙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가신들의 한과 열망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 생각해 보면 자신들의 주군이 100년이나 가족도 없이 살아온 걸 지켜봤을 텐데, 인간으로서의 안타까움과 가신으로서의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을 거다. 만약 트릭시가 영원히 미혼이라면 카토반의 대가 끊기는 거잖아.
“부군 각하. 부디 말씀을 편히 해주십시오. 어찌 부군께서 일개 가신을 높여 부르십니까.”
내 대답에 더욱 허리를 숙이는 집사장을 보니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다못해내 휘하 파벌원인 북방 백작들도 이렇게 낮은 자세를 보이지는 않는다.
“아직은 조금 어색하군요. 익숙해진다면 편히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기꺼이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다 의례적이고 뻔한 말을 돌려줬다. 아직은 공식적인 부군이 아니니 상호 존대로 가겠다는 말을.
집사장도 그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지을지언정 반발하지 않았다. 어차피 몇 달 후면 공식적인 관계가 맺어지니까. 굳이 그 몇 달을 당겨보겠다고 미래의 부군을 귀찮게 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참, 빈손으로 오기는 민망해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아무튼 집사장이 한발 물러났으니 화제를 돌리기 위해 선물을 언급했다. 선물이라도 줘야 내가 부군이 아닌 손님으로서 왔다는 걸 인지시키지 않겠나. 그래야 이 광전사 상태의 가신들이 조금이나마 진정할 것 같다.
“선물,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이미 난 저들의 머릿속에 부군으로 각인되었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물건을 주든 그것은 손님의 성의가 될 수 없다.
“가보로 여기겠습니다, 각하!”
그저 100년 만에 등장한 최고 존엄 부군의 하사품일 뿐.
망할. 왜 이리 모피 따위를 가보로 여기겠다는 사람이 많은 건데.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래도 트릭시가 꺼낸 모피를 보며 감동의 눈물까지 흘리는 가신들을 보니 차마 쓴소리를 할 수 없었다.
100장이나 가져왔으니 알아서 나눠 가지겠지…
가신들의 열렬한 성원과 환호를 받으며 트릭시의 방으로 이동했다.내가 짐을 풀기도 전에 트릭시의 방에 가겠다고 하니 엄청 기뻐하더라. 그냥 풀 짐이 없어서 그런 건데.
대신 나만 가는 게 아니라 리제와 린도 가겠다고 해서 살짝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그 둘도 트릭시의 가족으로 인식했는지 만류하지는 않았다. 가족 없이 살던 공작님이 새로 생긴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 이건 누구도 못 막지.
“가신들한테 사랑받는 영주였구나. 본받아야겠어.”
그렇게 트릭시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가볍게 농담을 건넸다.
“그러게요. 오늘 처음 본 분들이지만, 저분들이 스승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건 알겠어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리제도 적절히 내 말을 받아줬다. 그럴수록 트릭시의 얼굴은 그보다 더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타들어갔다.
물론 못 본 척했다. 안 그래도 트릭시가 서서히 스킨십에 익숙해진 덕에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졌는데, 이런 기회가 생겼다면 최대한 오래 맛봐야 한다. 그게 도리다.
“확실히 신기하기는 해요. 예전에 기회가 돼서 황금공 각하와 그 가신분들을 본 적이 있는데, 신뢰로 뭉치기는 했지만 철저한 상하관계가 보였거든요.”
그리고 린의 악의 없는 감탄에 트릭시의 귀가 스르륵 내려갔다.
린은 ‘가신들이 가족처럼 여기는 참된 영주!’ 라는 의미의 칭찬이었겠지만, 이미 수치심이 폭발한 트릭시의 귀에는 ‘가신들한테 먹힌 허접.’으로 들렸을 거다. 실로 애석한 일이다.
“이거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어디서 길러야 할지 모르겠네. 제도나 타일글레헨에서 기르면 원망 좀 듣겠는걸?”
“그, 그, 그건…”
미래의 자식을 언급하자 침묵 상태였던 트릭시도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제대로 된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정말 애석한 일이다.
***
부군 각하께서 친히 하사하신 북방산 모피 100장.
그 영광스러운 하사품은 모든 가신들과의 합의 끝에 각 가문당 1장씩 가져가고, 남은 건 공작성의 보물고에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부군 각하의 하사품은 카토반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빛나리라.
“그래서 이제 어쩝니까?”
경건한 마음으로 보물고에 모피를 보관한 후, 가신들이 모인 회의실에서 호위대장이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와 부군 각하께서 세르베트에 방문할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인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막연한 말이었지만 심적으로 공감이 되는 말이다. 마탑주인 공작 각하는 물론, 부군 각하는 감찰성 장관이시다. 제도가 아닌 세르베트 공작령에 두 분이 동시에 올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가신으로서 두 분을 위해 무언가 해드리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가짐. 호위대장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카토반의 은혜를 잊은 우둔한 자일 것이다.
다만 호위대장이 이제 어쩌냐는 말로 운을 뗀 것처럼, 너무 막연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뭐 이런 경험이 있어야 의견이라도 내지…”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전무하다.
가신으로서 주군 부부의 원활한 부부 생활을 돕는 것, 섬기는 가문의 핏줄이 널리 퍼지게 하는 것은 가신의 의무. 그런데 그 의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선대와 선선대의 가신들 역시 주군 ‘부부’를 섬긴 적이 없다. 약 100년 전에 전대 공작 각하께서 하늘로 돌아가신 후로 카토반 가문에 부부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아는 게 없다.’
곤란하다. 사실 주군 부부의 생활을 돕는 방법은 철저히 구두로 이어져야 할 정보다. 공작령 업무를 위한 공식 서류에 주군의 사생활을 언급하는 건 민망한 일이니까.
그 여파로 인해 지금의 무지가 생겼다. 부부 없는 생활이 100년이나 이어졌으니 구두로 이어지던 정보는 진즉에 끊길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아버지께서도 아는 게 없으셨겠나.
“…….”
“…….”
“…….”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의욕은 앞서지만 지식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수치스럽다. 우리는 제국─ 아니, 대륙 제일의 마법 명가인 카토반의 가신이다. 그런 우리가 다른 것도 아니고 지식이 부족하여 움직일 수 없다니. 차마 선조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그렇게 부끄러운 침묵이 이어지는 사이, 서기관이 입을 열었다.
“…저희가 할 수 없다면 각하께서 움직이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각하께서?”
서기관의 말에 절로 반문이 나왔다.
각하께서 움직이시기를 바라야 하다니. 그게 더 어려울 것 같은 건 둘째 치고, 결국 우리는 무엇도 하지 못한다는 거 아닌가.
“산림공원은 전대 공작 각하께서 친히 조성하셨고, 그 안에 있는 별장에서 공작 각하께서 탄생하셨죠.”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계속 경청했다. 서기관이 이상한 말을 할 사람은 아니─
“그곳에 두 분을 넣고 문을 걸어 잠급시다.”
…
아무래도 서기관이 근래 미쳐버린 모양이다.
“오.”
“의미 깊은 공간에 단 둘만 있는다라.”
더욱 끔찍한 것은 다른 가신들이 저 미친 발언에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거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신들이 단체로 약이라도 먹은 건가? 아니면 내가 무언가 잘못 먹어서 귀가 망가진 건가?
“서기관. 그건 너무 급진적인 방안 아닌가.”
일단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문을 걸어 잠그다니. 공작 각하의 능력이면 금방 빠져 나올 수도 있고, 그걸 제외하더라도 너무 과격한 방식이다. 이 세상 어느 가신이 주군을 가둔단 말인가. 역사에 나오는 역적도 아니고.
그러한 정당한 지적에 서기관은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부군 각하의 첫 번째 부인께서 이미 회임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네만,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지?”
“각하께서는 지금부터 노력을 하셔도 늦습니다. 마지막 부인보다 늦게 회임을 하실 수도 있어요.”
그 말에 광기에 휩싸였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방금 서기관의 발언은 지금의 주군과 미래의 주군을 동시에 언급한 발언. 결코 가벼이 넘어가서는 안 된다.
“서기관. 발언을 삼가게. 각하의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고, 두 분의 관계도 양호해. 그런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겐가.”
“각하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각하와 관련된 건 맞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고는 서기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이런 말을 해야하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운 것처럼.
“공작 각하와 부군 각하는… 종족이 다르지 않습니까. 전대 공작 각하의 사례를 생각하면 회임은 가능하겠으나,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서기관의 말에 다시금 침묵이 맴돌았다.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그랬었지.’
종족이 달랐었지.
전대 공작 각하와 부인께서도 결혼부터 회임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렸었지.
‘…그래도 혼혈이신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작 각하의 반은 인간이다. 그러니 전대와는 다르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
“그럼 오늘이라도 당장 걸어 잠가야겠군.”
“예.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지요.”
아니 제발.
결론이 왜 그렇게 흐르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