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86)
로판 속 공무원 486화(487/945)
예정에도 없던 공작성 생활을 시작했지만 딱히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아카데미 입장에서는 일반 교직원도 아닌 감찰관이 다른 곳에서 얼쩡거려도 전혀 지장이 없으며, 내가 관리해야 하는 부원들은 삼국 호위병들이 열심히 지키는 중이다.
심지어 세르베트 공작령에서도 치안 유지를 위해 은근히 사병들을 풀었다고 한다. 내 입에서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요.’ 라는 말이 나오는 걸 원천 차단하기 위해 노력 중인 것. 이 정도 정성이면 잠자코 성에만 머무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편하긴 하네.’
멍하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공작성 생활로 인한 당혹감과 별개로, 솔직히 몸과 정신이 편하기는 하다.
재작년에는 화려한 광기와 둔치를 뽐내던 부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크라켄을 처리하기 위해 이래저래 바빴다. 작년에는 트릭시의 외조모님과 대면하고 소공작과 놀아주느라 쉴 수 없었다.
허나 올해는 다르다. 나에게 너무 저자세를 보이는 가신들을 제외하면 아무런 고통이나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사실 가신들의 저자세마저 미리 체험하는 부군 생활이라 생각하면 그리 난감한 일도 아니다.
‘이게 여행이지.’
몰려오는 평온함 덕분에 스르륵 눈이 감겼다.
그래, 이게 여행이다. 지금까지 내가 겪은 수학여행은 그냥 수학이었다. 2년이나 잃어버렸던 여행을 마지막 해에 이르러서야 찾은 것이다.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괜찮다. 마지막까지 찾지 못한 것보다는 이게 나으니까.
– 똑똑
“부군 각하, 집사장입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창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햇볕을 쬐며 낮잠이라도 즐기려는 찰나, 문 너머에서 집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분 좋은 졸음이 순식간에 달아났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나를 윗사람처럼 여기는 집사장이 직접 올 정도면 그만큼 중요한 용무겠지.
그리고 공작인 트릭시가 있는 상황에서 공작령 업무 문제로 나를 찾는 건 아닐 테니, 높은 확률로 트릭시와 관련된 일일 거다. 예를 들면 저녁 식사 때 트릭시를 더 신경 써달라거나, 잘 때는 합방을 해달라거나 그런 거.
“예, 물론입니다. 들어오십시오.”
그렇기에 느긋한 마음으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트릭시와 관련된 일이라면 나도 기꺼이 들어줄 생각이다.
기꺼이 들어줄 수 없는 말이 나왔다.
“그, 죄송하지만 한 번 더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산림공원 내부에 공작 각하께서 태어나신 별장이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시면 저희가 문을 걸어 잠그겠습니다.”
본인도 이런 말을 하는 게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인 집사장이었지만, 그래도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
혼란스럽다. 트릭시와 관련된 일이라는 추측은 맞았다. 하지만 설마 이런 내용일 줄은 몰랐다. 아직 20대인 애송이가 쉰을 목전에 둔 노련한 귀족의 생각을 읽는 건 불가능 한 것이었나.
“저희도 감히 두 분을 밀실에 가둔다는 것이 송구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침묵을 지키니, 집사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쩐지 절절한 진심이 느껴지는 항변이라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부군 각하. 이는 카토반 공작가의 미래를 위하여 충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결코 사적인 욕망으로 이러는 것이 아닌─”
“집사장의 충심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트릭시도 집사장과 다른 가신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거라 했으니까요.”
졸지에 사상 검증을 시작하는 집사장의 말을 끊었다. 연장자의 말을 끊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저대로 두면 자아비판까지 할 것 같았다.
“각하께서…”
다행히 내가 말을 끊었다는 것보다는 트릭시의 극찬이 머리에 박힌 모양이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거다. 집사장이 역심 가득한 야망가라 공작과 그 부군에게 ‘그냥 구석에 처박혀 있으십쇼.’를 시전한 것이라면 방금 발언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집사장은 본인이 말한 것처럼 충심 가득한 충신이다. 그런 충신이 공작과 부군을 감금하겠다고?
‘왜?’
진짜 왜? 혹시 켄느에는 신혼부부를 밀실에 감금하는 문화가 있는 건가?
그렇다면 놀라운 문화가 아닐 수 없다. 켄느를 무개성의 도시라고 여긴 내가 부끄러울 정도야. 이런 미친 개성의 도시가 어디 있겠어.
“그래도 당황스럽기는 하군요. 저희를 별장에 가두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물론 이 세상에 그딴 문화는 없기에 직설적으로 해명을 요청했다.
“저, 부군 각하. 실은 그게─”
그리고 뒤이은 집사장의 설명은 실로 눈물겨웠다.
‘종족 차이라.’
집사장의 설명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나와 트릭시는 종족이 다르다.비록 트릭시의 반이 인간이라지만, 나머지 반은 인간이 아닌 엘프지 않나. 인간과 엘프의 결합이 인간과 인간의 결합보다 힘들다는 건 당연한 상식이다.
실제로 전대 세르베트 공작이 트릭시를 보는 데 수년의 시간이 걸린 걸로 기억한다. 그나마 트릭시는 순혈이 아닌 혼혈이라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지만, 인간과 다른 피가 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말 송구하오나, 두 분을 공작 각하께 의미 깊은 공간에 머무르게 하여…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오붓한 시간을 보내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다시 고개를 숙이는 집사장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가신으로서 공작가의 후대를 생각하는 거? 훌륭한 일이다. 혼혈 엘프인 공작의 회임 속도를 우려하는 거? 그럴 수 있다. 빠른 회임을 위해 공작 부부를 밀실에 가두는 것? 과격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밀실에 가둔다면 비밀리에 가두는 게 맞지 않나?
그러한 의문을 눈치챘는지, 집사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희 능력으로는 도저히 두 분을 가둘 수 없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부군 각하께 협조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이해합니다만, 그럴 거면 제가 아닌 트릭시에게 말해도 되지 않습니까?”
“종족의 차이를 누구보다 신경 쓰고 계시는 건 각하실 겁니다. 그런 각하께 어찌 회임이 힘들 테니 별장에 계시라는 말을 꺼내겠습니까.”
그 말에 집사장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저런 말을 듣는다면 거절할 수 없다. 트릭시가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 나에게 왔다는 건데, 이 얼마나 배려심 넘치는 가신들이란 말인가. 미래의 부군으로서 그 열망을 받아들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제가 트릭시를 잘 설득해서 별장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오늘의 자비와 관용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내 확답에 집사장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절로 흐뭇해지는 광경이다. 내 작은 선택으로 인해 충신들이 기뻐하다니.
“한 닷새 정도는 별장에서 나오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예?”
“마음 같아서는 그 이상도 노력하고 싶지만, 수학여행 일정을 고려하면 닷새가 최대치입니다.”
진심으로 아쉽다. 수학여행 때문에 세르베트에 온 게 아니라 방학 중에 왔다면 그 이상도 가능했을 텐데.
“아니, 그…”
집사장도 다소 아쉬웠는지 잠시 말을 더듬거렸다.
다 이해한다. 그래도 지금은 닷새로 봐줬으면 한다.
***
부군 각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이셨다.
그 따뜻한 다독임에 마음이 놓였다. 서기관의 광기 어린 의견과 다른 가신들의 동조에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아무리 내가 집사장이라지만 모든 가신들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막을 수는 없고, 집사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이 광기 가득한 의견을 부군 각하께 말씀드려야 했다.
내가 생각해도 미친 발상이라 부군 각하께 쓴소리를 듣는 것도 각오했는데, 부군께서는 가신들의 투정을 기꺼이 받아주셨다.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다.
“한 닷새 정도는 별장에서 나오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 감격이 당혹으로 바뀌는 건 한 마디로 충분했다.
“…예?”
나도 모르게 반문을 하고 말았다. 닷새라니, 그게 무슨.
‘하루만 계셔도 감지덕지인데.’
아니, 사실 하루가 아니라 다섯 시간이어도 만족할 수 있었다. 닷새는 감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래서인지머리가 잠시 새하얘졌다. 공작 각하께서 태어나신 별장에서 두 분이 닷새나 계신다니.
‘소공작님.’
순간 감동의 눈물이 흐를 뻔했다. 어쩌면 이 땅에 카토반 공작가의 소공작님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설령 이번 닷새 동안 성과가 생기지 않더라도, 부군 각하께서 보이는 의지와 열정을 생각하면 언젠가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반드시.
***
켄느 인근에 위치한 산림공원─ 정확한 지명은 ‘아리아드네 정원’인 나의 보물.
아버지와 어머니가 좋아했던, 내가 태어났던, 가족의 추억이 깃든 장소이자,이제는 새로운 가족과 함께 추억을 쌓아갈 장소.
그 장소에서 칼과 손을 잡은 채 걷고 있었다.
‘다 같이 가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괜히 뒤를 돌아봤다. 원래는 다 같이 공원에 올 예정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칼과 단둘이 오게 되었다.
“죄송해요. 마차를 너무 오래 타서 그런가, 침대에 누우니 뒤늦게 피로가 몰려와서요.”
“저도 아까부터 몸이 찌뿌둥해서… 오늘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정말 아쉬웠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 억지로 데려올 수도 없었다. 내 욕심 때문에 그 아이들이 몸살이라도 걸리면 그보다 부끄러운 일은 없으니.
물론 리제와 린이 회복하고 올 수도 있었지만, 두 아이가 자기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며 적극적으로 등을 떠밀었다.
‘좋기는 하지만…’
칼과 단둘이 즐기는 시간, 좋지 않다면 당연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 두 아이의 아픔으로 이루어졌다면 씁쓸할 수밖에 없다. 그 아이들이 멀쩡해지면 그때는 내가 양보하자.
“저기야?”
“아, 그래, 저기란다.”
갑작스러운 칼의 목소리에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저기서 내가 태어났단다.”
이윽고 칼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공원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카토반 공작가의 별장. 아무리 못해도 매달 한 번은 가족과 함께 놀러 갔던 추억의 장소.
칼과 함께 저 별장을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려야 했던 장소였는데, 이제는 새로운 가족과 함께 오게 되었구나.
“그럼 들어가볼까? 마법계의 전설이 시작된 곳이잖아.”
“후후, 그러자꾸나.”
과장스러운 칼의 말에 웃음을 흘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별장에 들어가자마자 칼이 문을 잠가버렸다.
“이제 내 허락 없이는 여기서 못 나가.”
“으, 으응?”
반론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선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