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87)
로판 속 공무원 487화(488/945)
산림공원 내에 위치한 별장은어지간한 귀족의 저택보다 거대하고 화려했다.과장 좀 보태면 제도에 있는 내 저택과 좋은 승부를 낼 수 있을 정도로.무려 전대 공작이 부인을 위해 지은 건물이고, 현 공작도 애정을 가지며 아끼는 공간이니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카토반 공작가의 가신들이 나와 트릭시의 감금을 다짐하자마자 급히 별장 상태와 비축 물자를 점검했다고 하니, 아무 준비 없이 맨몸으로 들어가도 5개월은 지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지금이 수학여행 기간이 아니라 방학 기간이었다면 3주나 4주는 있었을 텐데.
‘닷새로는 부족해.’
탁자에 둔 물을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순혈 인간인 마르와 열흘을 노력한 끝에 첫눈이가 생겼으니, 정말 단순하게 계산하면 혼혈인 트릭시하고는 20일을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20일은커녕 열흘의 절반인 닷새? 솔직히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시도라도 하는 게 좋으니 노력한 것일 뿐.
‘언젠가는 빛을 보겠지.’
그래도 언젠가는 나와 트릭시 사이에 보물이 생길 것이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영원히 시도를 한다면 결국 결과가 나오는 법.가능성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아니겠나.
‘둘 다 젊기도 하니까.’
만약 우리가 청년을 넘어 중년에 접어든 나이라면 위험했겠지만, 다행히 나와 트릭시는 혈기가 넘치는 나이다. 안 되면 될 때까지라는 무식한 전법이 통하는 시기다.
그러니 여유를 가지자. 순혈 엘프와 사랑을 나눈 두 번째 장인어른도 몇 년 사이에 트릭시를 만들었는데, 나라고 못할 건 없지.
…
‘여유라.’
슬쩍 뒤에 있는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까지 기절한 것처럼 침대에 엎드려있는 트릭시의 모습을 보니 조금 민망해졌다. 아니, 가끔씩 몸을 떨면서도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진짜 기절 같기도 하고.
‘너무 심했어.’
조심스레 트릭시 곁으로 다가가 엉망이 된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 순간부터 마법을 유지하기도 힘들어졌는지, 트릭시의 자랑이었던 깨끗한 백발도 이래저래 더럽혀졌다.
확실히 내가 생각해도 심하기는 했다. 다짜고짜 별장 문을 잠가버린 닷새 전부터 지금까지, 최소한의 생활시간을 제외하면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사랑을 나누는 것에 기뻐하던 트릭시가 시간이 지날수록 눈물까지 보이며 히끅거렸겠나.
물론 트릭시도 싫어한 건 아니었다. 싫었다면 나를 밀어내거나 텔레포트로 도망이라도 쳤겠지.
단지 트릭시가 상상한 범위를 아득히 초과한 행복을 몰아친 게 문제였다.
“트릭시, 괜찮아?”
아무튼 트릭시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 뺨을 쓰다듬었다.
“…….”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아무래도 억지로 깨우는 것보다는 스스로 일어나는 걸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트릭시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느라 허리를 잡고 끙끙거리기도 했지만, 미약한 물기를 머금은 눈은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인데, 닷새나 그러면 어떡하니!”
그리고 혼났다. 그것도 좀 많이.
인정한다. 아무리 트릭시도 좋아했고 거절하지 않았다지만, 마법 빼면 남는 게 없는 트릭시를 체력적으로 밀어붙인 건 내 잘못이다. 이건 부정할 생각이 없다.
“아무리 내가 멈추지 말라고는 했지만… 이렇게나 할 줄은…”
“미안해…”
비록 트릭시가 자기 입으로 ‘망설이지 말고 마르에게 해준 만큼 사랑해 주렴.’ 이라고 했어도 말이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게 조심할게.”
그렇기에 진심 어린 반성을 담아 고개를 숙였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큰일이다. 말도 안 할 정도면 화가 나도 단단히 난─
“…구,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고…”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순간 하고 싶은 말은 많이 떠올랐지만 트릭시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하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부부의 궁합이 좋으면 보물이 우리 곁으로 찾아올 시간도 단축될 것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자.
***
닷새가 지나고 나서야 별장의 문이 열렸다. 처음 별장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몇 시간만 둘러보다 나갈 생각이었는데, 설마 닷새나 머무를 줄은 몰랐다.
‘벌써 추억이 생겼어.’
힐끔 별장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한 추억이 깃든 장소. 나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한 장소기에 새로운 추억을 더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빨리 더할 생각은 아니었다.
물론 싫지는 않다. 이런 오판은 언제든지 환영할 수 있는 기분 좋은 오판이다. 이제 저 장소는 나 홀로 추억하는 곳이 아닌, 칼도 추억하는 장소가 됐으니까.
“이곳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렴. 100년 동안 나 홀로 지내왔던 곳을, 너로 가득히.”
“카, 칼? 잠깐만, 잠깐만 쉬었다가 하는 건─”
“흐으윽─! 흐아아앗!”
‘으읏.’
갑자기 닷새 동안 있었던 기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부끄럽다. 칼이 나를 안고 침대에 누웠을 때만 해도 당당히 도발한 주제에, 마르가 부러워 그만큼 해달라고 한 주제에 결국 칼에게 완전히 먹혀 꿈틀거리는 게 전부였다니.
‘나, 나는 마법사니까.’
파르르 떨리는 귀를 애써 진정시키며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아니, 합리화가 아니라 명백한 진실이다. 칼은 대륙에서 제일가는 검사고, 나는 육체 단련과 거리가 먼 마법사다. 그런 내가 칼에게 밀리는 건 당연한 이치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뜨고,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마르는 열흘도 버텼는데.’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도 떠올라 스르륵 귀가 내려갔다.그 아이는 어떻게 열흘이나 버틴 거지? 나는 고작 닷새로도 이 모양인데.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부끄럽다. 마법이라도 쓸 수 있는 나와 달리 마르는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칼을 상대해야 했다. 그러고도 나보다 두 배나 긴 시간을 이겨냈다.
만약 나도 마르처럼 칼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냈다면… 카토반 공작가의 소공작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트릭시.”
“아, 응. 듣고 있단다.”
무심코 배를 쓰다듬다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혹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킨 건가? 역시 닷새로는 부족했다며 다시 별장으로 들어가는 건가?
두려움과 기대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래도 경험이 있으니 처음보다는 더 오래 버틸 수 있겠─
“이 별장이랑 공원, 장인어른께서 정성 들여 만드신 게 느껴지더라.”
생각한 것과 다른 평범한 칭찬이었지만 뿌듯했다. 아버지의 노력이 칼에게 닿았다는 것이니.
“그래서 말인데. 트릭시가 괜찮다면 여기서 결혼식을 올리는 건 어떨까?”
“결혼식?”
“응, 여기서.”
그리고 뒤이은 말에 눈을 깜빡이며 칼을 바라봤다.원래 내 결혼식은 세르베트 공작령에 있는 대성당에서 올릴 예정이었다. 제도의 성 파로나스 대성당은 마르의 추억이 깃든 곳이니, 그곳에서 혼인을 하는 건 마르에게 큰 실례다.
그렇기에 기존 결혼식 장소에 큰 애착은 없었다. 단순히 내가 세르베트 공작이고, 영지 내에 대성당만큼 적절한 장소도 없어서 정한 장소니까. 어차피 중요한 건 나와 칼이 정식으로 부부가 된다는 것이지 않나.
‘이곳에서 결혼식…’
그러나 이곳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곳에서 칼과 정식으로 부부가 된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거다.
그럼에도 별장 결혼식을 언급하지 못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귀족이 성이나 성당이 아닌 일개 별장에서 결혼식을 치른 전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 이 별장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곳이지만 하객으로 올 사람들은 아니다.성도 아닌 별장에서 결혼식을 진행한다면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들이 의아함을 느낄 터이니, 괜한 소란을 일으킬 바에는 평범하게 진행하는 것이 맞다.
“그래도, 될까?”
하지만 어느새 내 입은 칼에게 다시금 확인을 구하고 있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냐고. 고작 별장에서 결혼식이라는 중대한 행사를 진행해도 되겠냐고. 나 때문에 너까지 따가운 시선을 받아도 괜찮겠냐고.
“당연하지. 갑자기 장소를 바꾸는 만큼 서둘러 준비해야겠지만, 늦지는 않을 거야.”
그 말에 칼은 밝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칼을 향해 활짝 웃었다.
***
트릭시의 귀가 쉴 새 없이 파닥거렸다. 그만큼 결혼식을 별장에서 진행하자는 말이 기쁜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섬기는 공작이 귀까지 파닥이며 행복한 모습으로─ 심지어 정말 닷새가 지나서야 나타난 상황에 가신들은 열렬한 함성을 내지르며 우리의 복귀를 반겨줬다.
“어서 오십시오! 혹시 별장에서 지내시는 동안 불편한 곳은 없으셨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덕분에 닷새 동안 오붓한 시간을 보냈지요.”
직설적인 확언에 가신들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거나, 눈가를 닦는 등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실로 다행입니다. 전대 공작 각하께서도 천상에서 흐뭇해하시겠지요.”
그나마 집사장만이 혼란 속에서 유일하게 이성을 차리고 있었다. 역시 공작령 2인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참, 그러고 보니 집사장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트릭시와의 결혼은 별장에서 진행할 생각입니다.”
허나 그 말에 집사장마저 이성을 잃고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가슴이 절로 훈훈해지는 광경이다. 가신들이 이렇게나 주군을 사랑하다니, 다른 영지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 아닌가.
“2주! 2주만 주시면 모든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아뇨.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이 조금 과한 것 같기도 하지만, 역심보다는 사랑이 낫지 않나 싶다.
‘아이가 생기면 볼 만하겠어.’
언젠가 태어날 카토반 공작가의 아이들을 상상하며 웃음을 흘렸다. 아마 유모 자리를 두고 가신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겠지.
적어도 우리 아이가 사랑을 덜 받고 자랄 걱정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