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88)
로판 속 공무원 488화(489/945)
인생 마지막 수학여행이 끝났다.
정작 수학여행 기간 동안 관광지를 구경하기는커녕 별장에 처박혀 지냈지만, 그것도 나름 여행이라면 여행이지 않겠나. 호캉스라는 단어가 왜 생겼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나와 트릭시의 별장 폐관 생활로 인해 방치된 리제와 린인데, 다행히 우리가 없는 동안 알찬 여행을 즐겼다고 한다. 심지어 가신들도 리제와 린을 단순한 손님이 아닌 트릭시의 가족처럼 대우했다고 하니 그 둘에게도 좋은 추억이 됐을 터.
그래,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완벽하게 끝난 수학여행이다. 그렇게 자신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고 나서야 해프닝이 생기고 말았다.
“이건 세르베트에서 생산한 와인이고, 옆에 있는 건 전대 공작 각하께서 만드신 아티팩트입니다. 그 뒤에는 세르베트의 장인들이 만든 무구로 황실에 납품할 정도의 품질을 자랑합니다.”
집사장이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하는 물건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제 아카데미 숙소로 돌아간다고 하니 갑자기 온갖 물건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더라.
그러고는 부디 받아달라며 사정을 했다. 부군 각하의 하사품까지 받았는데, 가신으로서 어찌 빈손으로 보낼 수 있겠냐는 절절한 설득까지 하면서.
그러니 어쩌겠나. 선물이 하사품으로 둔갑한 건 둘째 치더라도, 괜히 거절하면 통곡할 미래가 뻔하니 순순히 받아줘야지.
‘준 것보다 더 많잖아.’
그래도 끝도 없이 늘어지는 집사장의 설명을 들으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이미 내가 준 하사… 아니, 선물의 가치는 아득히 뛰어넘은 물건들이 튀어나왔다. 제도를 비롯한 제국 중부 지역에서는 보야르 와인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세르베트 와인, 무려 전대 세르베트 공작이 100여 년 전에 만든 아티팩트, 공작령의 상급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구 등등.
경이롭다. 고작 모피 100장을 대가로 이렇게 얻어 가다니.
‘조공 무역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솔직히 조공 보답품을 이만큼이나 퍼주면 국가가 망할 거다.
“그리고 저건─”
“이제 됐습니다. 훌륭한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시종들이 새롭게 들고 온 물건을 설명하려던 집사장의 말을 서둘러 끊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것까지 가져갈 수는 없다. 난 트릭시를 대신하여 공작령을 관리한 가신들에게 얼굴을 비추러 온 거지, 카토반 가문의 살림을 털어먹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기둥서방도 아니고 이게 뭐야.
“나머지는 결혼식 때 혼수품으로 받겠습니다.”
물론 그냥 거절하면 집사장이 납득할 리 없으니 적절한 명분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때까지 소중히 보관하도록 하겠습니다.”
효과는 확실했다. 무어라 반박하려던 집사장의 표정이 급속도로 온화해지더니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던데 진짜인 것 같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던 집사장의 충심도 슬슬 이용할 수 있─
“그럼 이제 루이제 영애와 이리나 영애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아무래도 덜 적응한 것 같다.
이 타이밍에 다른 사람 선물까지 준비했을 줄은 몰랐지.
아카데미 숙소에 도착하니 학생들이 하나둘 마차에 탑승하는 광경이 보였다.
게다가 가장 가까이 있는 놈이 에리히였다. 마침 용무가 있었는데 잘 됐네.
“야.”
“어, 형?”
내 부름에 세라를 안은 상태로 마차에 오르던 에리히가 고개를 돌렸다.
묻고 싶은 게 많은 모습이었지만 참았다. 나랑 트릭시가 뜨거운 시간을 보낸 것처럼 저 둘도 수학여행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나 보지. 남의 사생활을 캐내는 건 가족이라도 예의가 아니다.
“이것도 마차에 실어. 네 거다.”
아무튼 그런 에리히를 향해 일방적으로 물건을 떠넘겼다.
전체적으로 은색을 띠는 검 한 자루와 작은 상자 두 개. 이미 세라를 안고 있어서 남는 손이 없는 에리히였지만, 세라가 눈치껏 대신 들어줬다.
“뭐야 이거. 기념품? 이런 검은 처음 보는데?”
나름 무인인 에리히기에 은색 검을 보며 감탄을 표했다.
확실히 처음 보는 물건이겠지. 딱 황실에 납품할 물량만 생산되는 검인데, 이번만 특별히 잉여분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카토반 가문에서 준 선물. 트릭시의 도련님하고 동서도 왔다고 하니 챙겨주더라.”
그 말을 하면서도 픽 웃음이 나왔다. 집사장은 나, 리제, 린에 이어 에리히와 세라의 선물도 챙겨줬다. 심지어 이 자리에 없는 제노비아의 것까지. 그 정도 세심함은 가져야 집사장을 하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멀뚱히 선물을 들고 있던 세라는 동서라는 말을 듣자마자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검과 함께 들고 있던 작은 상자 쪽으로.
“그럼 이건 저랑 제노비아 언니 거예요?”
“어. 동서가 너희 말고 더 있어?”
내 확답에 세라는 활짝 웃었다. 졸지에 ‘공작가 공인 에리히의 부인’ 이라는 어마어마한 명분을 손에 넣었으니 당연한 일.
그렇기에 조용히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지금은 세라가 온전히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배려해주는 게 맞을 테니.
“반쪽 반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들리는 세라의 목소리에 침통히 눈을 감았다.
내 업보가 동생 부부도 덮쳤다고 생각하니 애석할 노릇이다.
***
장거리 이동 중 휴식은 필수적인 일이다. 아무리 좋은 마차여도 흔들림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으니, 탑승자를 배려하여 몇 시간에 한 번은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사이에 슬쩍 마차에서 내려 외할머니께 연락을 드렸다. 부끄럽게도 요 며칠 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했으니까.
– 트릭시니?
통신구를 작동하자마자 연락을 받은 외할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셨다.
그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셨다.
– 다행이구나. 갑자기 닷새가 넘도록 연락이 없길래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했단다.
양심이 따끔거리는 말씀과 함께.
따뜻한 목소리였지만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아카데미 개학 이후로 최소 사흘에 한 번은 외할머니께 연락을 드리고 있었지만, 하필 사흘째 되던 날이 별장에 들어간 날이었다. 그날부터 칼과 깊은 시간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어 통신구를 잡지 못했으니, 외할머니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지는 않고, 아카데미 생활이 많이 바빴니?
“아, 네, 조금 바빴습니다.”
짧게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 일정 때문에 세르베트에 온 거고, 세르베트에 온 덕에 바빴던 건 맞다. 자세한 설명이 없을 뿐 거짓말은 아니다.
– 그래, 바쁜 와중에도 연락을 줘서 고맙구나. 역시 이 할미한테는 우리 트릭시밖에 없어.
하지만 연이은 미소에 이보다 더할 수 없을 만큼 양심이 아팠다. 나를 유일한 혈육으로서 아끼고 사랑하는 외할머니께 연락도 제대로 드리지 않다니. 이게 패륜이지 다른 게 패륜일까.
“그, 외할머니.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 나한테?
그렇기에 겨우겨우 입을 열며 화제를 돌렸다. 외할머니께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지 않으면 도저히 양심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결혼식 장소를 정했습니다. 제 영지에 있는 별장에서 먼저 하고, 그 뒤에 외할머니 댁에서 올리려고 합니다.”
– 결혼…
내 말에 외할머니의 눈이 잠시 커지더니 조금 복잡한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이해한다. 나에게 인간의 피가 흐르는 것과 인간 세상의 일원이라는 것을 인정하신 외할머니지만, 외할머니는 수백 년 동안 엘프의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분이다. 그런 외할머니 입장에서 백이 조금 넘은 외손녀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떨떠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금방 미소를 지으시는 걸 보면 인간의 상식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시는 것 같지만.
***
잠깐 눈 좀 붙이려는 찰나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너 조만간 결혼한다며?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도로 눈을 떴다. 신물의 기운을 세계수(진급 예정)에 옮긴 이후부터 잠잠했는데, 갑자기 말을 걸 줄은 몰랐다.
‘예, 이번 여름에 진행할 예정입니다.’
일단 영원한 푸른 하늘의 질문에 덤덤히 답했다. 딱히 숨길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 장로가 자랑하더라. 네 부인이 먼저 알려줬나 봐.
‘아.’
뒤이은 영원한 푸른 하늘의 말에 납득했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외조모님과 연락 중이었구나.
– 아무튼 축하해. 얼마 전에 결혼한 것 같은데 벌써 두 번째 결혼이라니. 역시 인간의 시간은 적응하기 힘들어.
그 중얼거림에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유감스럽게도 내 결혼 주기는 신의 기준에서 짧은 게 아니다. 인간 기준에서도 반 년에 한 번 결혼하는 건 미친 속도가 맞다.
물론 굳이 영원한 푸른 하늘의 오해를 정정하지는 않았다. 괜히 진실을 알게 되면 심심할 때마다 놀릴 것 같아.
– …저기, 그런데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나 겨울로 미루는 건 안 되겠지?
‘예?’
그 와중에 난데없는 제안이 튀어나와 반문하고 말았다.
솔직히 나도 더운 여름에 결혼하는 것보다는 가을이나 겨울이 좋긴 한데, 가을은 학기 중이라 곤란하고 겨울은 연말과 신년하례식이 끼어있어서 바쁘다. 거기다 신년하례식이 지나면 리제와 세 번째 결혼을 해야 하니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고.
‘안 될 것 같은데요?’
– 그, 그렇지? 하긴. 결혼식 일정을 갑자기 바꾸는 건 힘들지, 응.
조금 기가 죽은 것 같은 중얼거림에 의문이 들었다. 영원한 푸른 하늘이 신이라고 하기에는 눈물겨운 언행을 자주 보였지만, 그렇다고 의미 없는 말을 한 적도 없다. 아무리 영락했어도 신은 신이다.
‘혹시 여름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래서 슬쩍 질문을 던졌다. 일개 점쟁이 나부랭이가 ‘그날 결혼식 하는 건 피해라.’ 라고 해도 찝찝한데, 무려 신이 직접 결혼식 연기를 언급했다.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 그게…
직설적인 질문에 영원한 푸른 하늘은 잠깐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속삭였다.
– 여름에 세계수가 완전히 부활할 것 같거든…
‘…….’
그 말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왜, 왜 다들 내 거만 노리는데…!
몇 개월 전 콘스탄티나의 목소리를 들었던 당시, 영원한 푸른 하늘의 오열이 생각났으니까.
결국 헛웃음이 나왔다. 내 결혼식 때 세계수가 부활하면 나를 콘스탄티나한테 뺏길까 봐 막는 거구나.
‘애초에 전 여명 교단 신도인데요.’
– 아, 알아! 그래도 두 번째는 내 제사장으로 해줄 수도 있잖아!
처절한 항변에 다시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요즘 시대가 개방적이라지만 종교로 이중 전공을 찍는 건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