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89)
로판 속 공무원 489화(490/945)
수학여행이 끝나고 나니 방학까지는 금방이었다. 재작년 이맘때에는 부원들이 제국에 남겠다 온갖 진상을 부리고, 작년에는 북방에서 소란이 터져 난리였지. 몇 번을 생각해도 올해는 평온이 가득한 해가 분명하다.
물론 방학 직전에 기말시험이 있기는 했지만, 시험은 내가 보는 게 아니잖아. 옆에서 고스트 바둑왕처럼 훈수를 둘 것도 아니니 없는 셈 쳐도 무방하다.
“여름이라 귀국해봤자 할 것도 없는데, 여기 남아도 되겠습니까? 학생으로서 고문 선생의 결혼식 정도는 직접 보고 싶군요.”
“되겠냐.”
그 와중에 망언을 내뱉는 류티스에게 단호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객 중에 자국 황족도 아닌 타국 왕족이 끼어있는 건 모양새가 너무 이상하다.
심지어 이놈이 트릭시의 결혼식 때 하객으로 참여한 선례가 생겨버리면 이후에 있을 네 번의 결혼식 때도 꼬박꼬박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 반년에 한 번씩 오는 타국 왕족?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사적 관계와 별개로 왕족이 타국인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건 좋지 않다. 마음만 받을 테니 그냥 돌아가.”
“그러면 어쩔 수 없군요.”
직설적으로 이유를 설명하자 류티스는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며 납득했다. 아마 이놈도 진심으로 남으려고 한 건 아닌 모양이다.
“대신 이번에도 흡족할 만한 선물을 보내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그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객으로 오는 건 어떻게든 막을 수 있지만, 선물은 일방적으로 보내면 그만이기에 사양할 수도 없다.
게다가 이미 류티스는 마르와의 결혼식 때 선물을 보냈었다. 그때는 보내고 지금은 안 보내면 뭔가 이상하잖아. 괜히 류티스와 아르메인이 마종공을 두 번째 부인이라 업신여긴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다.
그건 곤란하다. 고작 선물 유무 때문에 양국이 어색해지면 그보다 우스운 일도 없다.
“뭐, 제가 뭘 보내든 라테르보다는 못할 것 같지만 말입니다.”
픽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류티스를 따라 나도 시선을 돌렸다.
“왕족이 아닌 마법사로서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제가 감히 대륙의 마법사들을 대표할 자격은 없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겁니다.”
그러자 트릭시에게 깊이 허리를 숙이며 축하를 건네는 라테르가 보였다.
너무 정중하고 깍듯한 자세라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본인 말처럼 왕족이 아닌 일개 마법사로서 트릭시 앞에 섰구나.
“마도의회에서도 선물을 준비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마종의 이름 앞에는 어떤 것이든 무의미하겠지만, 후학들의 작은 성의라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제 개인적인 경사를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데 어찌 그 마음을 가볍게 여기겠습니까.”
라테르의 저자세에 트릭시도 빙긋 웃으며 말을 높였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을 낮춰도 라테르는 왕자고, 지금은 학기 중이 아니기에 일시적으로 강사와 학생의 관계가 풀렸다. 그러니 상호 존대가 적절하지.
“흐으음.”
그 모습을 보던 류티스가 턱을 매만지더니 나를 쳐다봤다.
“왜 그러지?”
“아, 별거 아닙니다. 고문 선생도 100년 정도 더 살면 저런 대접을 받을까─ 그런 생각을 좀 했습니다.”
류티스는 농담처럼 한 말이겠지만 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확실히 간과할 수 없는 미래다. 내가 트릭시처럼 100년 넘게 군림한 업계 고인물이 되면, 타국 왕족들도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일 가능성이 높다.
“단순히 숫자만 보면 마법사보다 기사가 더 많으니, 고문 선생이 더 대접을 받을 수도 있겠군요!”
그러고는 웃음을 터뜨리는 류티스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저놈은 알까. 내 앞에 놓인 수많은 미래 중에 저놈이 말한 미래도 있다는걸.
‘100년 묵은 대륙 제일 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아니, 내가 수명 연장을 선택하면 100년이 아니라 400년 묵은 대륙 제일 검이 되겠지.
적폐도 그런 적폐가 없다.
저택으로 복귀하자 정원사가 뿌려주는 물을 맞으며 헥헥거리던 티티가 반겨주었다.
– 멍!
“네가 웬일로 밖에 있냐?”
조금 놀랐다. 더위를 싫어하는 녀석이 굳이 정원에 있는 걸 보면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진짜 볼 때마다 지능이 의심된다. 저거 어지간한 어린애 수준은 되는 것 같은데.
‘영물을 받아온 건가?’
어느새 무럭무럭 자란 티티가 뒷발로 서는 걸 잡아주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상황이 기를 때부터 의심해야 했는데, 얘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영물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 분명 영물일 거다. 상황이 기르는 다른 동물들도 황궁의 인기스타지 않나. 그것들이 일반 짐승이라면 그건 그거대로 신기한 일이고, 그 속에서 자란 티티만 평범한 아이라면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영물이라.’
때가 되면 티티한테도 좋은 짝을 붙여줘야겠다. 영물이 우리 집에 있다면 대대손손 우리 집을 지키게 해야지.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내 아이들과 함께 뛰어다니는 노란 인절미들을 상상하는 사이, 티티와 놀아주던 정원사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래. 날도 더운데 고생이 많다.”
정원사의 어깨를 토닥이며 작은 덕담을 건넸다. 여름에는 실내에서 일하는 것도 피곤한데 저택 밖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건 얼마나 고역이겠나.
그렇다고 한창 식물들이 자라나는 여름에 정원 관리 일을 멈추라고 할 수도 없으니, 이런 덕담과 보상을 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점심이니 낮잠이라도 자다가 좀 선선해지면 다시 나와라. 그러다 쓰러지겠어.”
“괜찮습니다. 저만 고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너만 밖에서 쓰러질 것 같으니 이러는 거지.”
쓸데없이 고집부리는 정원사의 어깨를 잡은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 식사에 와인이라도 얹어줘야 순순히 눈을 감을 것 같다.
마침 세르베트에서 와인도 한가득 받아왔으니 한 병 정도 주면 되겠네.
‘멀쩡하면 두 병.’
정원사와 알코올 중에 누가 더 강한지 승부다.
***
점점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아카데미 방학식이 이즈음에 끝나니, 아무래도 칼이 돌아온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쪼르르 밖으로 나간 티티처럼 정원에서 반겨주고 싶었지만, 한 주 한 주가 지날수록 불러오는 배가 신경 쓰여 차마 나가지 못했다.
정확히는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했다.
“마님! 홀몸도 아니신데 밖으로 나가신다니요!”
“이 더위에 마님과 소가주님을 고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부디 편히 쉬고 계십시오!”
조금만 움직이려고 해도 사용인들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와 만류했다. 쉬고 있을 때는 안 보이던 사람들이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 건지.
물론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장시간 외출은 나도 최대한 자제했지만, 하녀들이 동행한다면 저택 밖에서 산책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펑퍼짐한 옷을 입어도 배가 부른 것이 티가 날 정도로 시간이 흐르니, 사용인들이 내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막연히 임산부라고 여기는 것과 실제로 배가 부른 것을 보는 건 다른 걸까?
‘…다르기는 해.’
슬며시 배를 쓰다듬었다. 사실 당사자인 나도 기분이 다르다.
내 품에 아이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루가 다르게 배가 커지는 것을 보면 신기할 수밖에 없다.
이 안에 아이가 있다. 내 보물, 나와 칼의 첫 아이가.
“아.”
그러던 중, 첫눈이가 발길질을 하는 게 느껴졌다.
엄마가 자기 생각을 하는 걸 알아챈 건가? 똑똑하기도 하지.
“마르, 나 왔어.”
그런 생각을 하며 슬며시 미소를 지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칼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베아트릭스 언니와 루이제, 이리나, 마지막으로 티티까지.
‘동화에 나오는 가족 같네.’
마치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동화 속 가족의 모습 같았다.
“어서 와요. 첫눈이도 아빠가 보고 싶었대요.”
…그 가족은 일부일처의 형태였지만, 형태가 중요한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말자.
***
방학이 되고 나니 저택이 만남의 장소로 돌변하고 말았다.
다행히 익숙한 감각이라 딱히 낯설지는 않았다. 마르와 결혼하기 직전에도 이랬었지.
“오, 오오오…”
그리고 내가 방학을 맞이했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첫 번째 장인어른이셨다.
‘초대장도 안 보냈는데.’
감격한 듯 마르의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장인어른을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장인어른은 내가 초대장을 보내면 오겠다고 하셨는데, 초대장 종이를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오셨다.
혼란스럽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초대장 예약이라도 했던 건가? 아니, 딱히 그런 기억은 없는데.
“미안해요, 사위. 너무 갑작스럽게 왔죠?”
그러한 심정을 눈치챈 듯, 장인어른과 함께 오신 장모님께서 입을 여셨다.
“이해해 줘요. 막내인 마르를 유독 귀여워했는데, 이번에는 막내가 막내 손주까지 품었다고 하니 어쩔 줄 몰라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참은 것도 신기할 정도로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고마워요. 사위가 마음이 넓어서 다행이에요.”
쿡쿡 웃음을 흘리는 장모님의 말에 슬쩍 장인어른께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느냐?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고? 침대가 낯설다면 울켄으로─”
“괜찮아요, 아버님. 저도 첫눈이도 건강히 지내고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장인어른은 평소의 엄격 진지 근엄한 분위기와 달리 작은 손수건으로 연신 눈가를 닦으며 마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과연. 저게 부성이구나.
‘내 미래.’
기분이 복잡미묘했다. 나도 내 딸이 손주를 임신했다고 하면 저럴 것 같기는 한데, 그 광경을 미리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예습이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
“그러고 보니 입맛은 요즘 어떻더냐. 임신을 하면 좋아하던 것도 못 먹는 경우가 잦은데.”
“안 먹던 게 생각나는 경우는 있지만, 좋아하던 건 여전히 잘 먹고 있어요.”
“축복받은 경우구나. 에넨께서 복자를 귀엽게 여기시는 모양이야.”
흡족히 고개를 끄덕인 장인어른은 그 뒤로도 마르의 배에서 손을 떼지 않으셨다.
뭔가 내 거를 뺏긴 것 같은 기분이라 오묘했다.
‘내가 먼저 뺏은 거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차마 장인어른을 밀어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