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90)
로판 속 공무원 490화(491/945)
홀연히 찾아온 첫 번째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식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가셨다.
“제도까지 오셨는데 이왕이면 주무시고 가시지 그렇습니까. 장인어른의 성보다는 못하지만, 이곳도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예상보다 빠른 퇴장이라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마르를 아끼는 장인어른이기에 며칠 정도는 저택에서 머무르시지 않을까 싶었는데, 며칠은커녕 몇 시간 만에 떠나실 줄은 몰랐다.
“됐다. 마르와 손주가 잘 지내는 것도 확인했고, 우리가 저택에 있으면 마르에 집중해야 할 사용인들이 피곤해질 것 아니냐.”
“이미 마르만 전담하는 사용인들은 따로 있─”
“그리고 이번 여름은 마르를 위한 시간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단호한 거절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장인어른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더 권유할 수도 없다.
장인어른의 말씀대로 이번 여름의 주인공은 마르가 아닌 트릭시다. 그런 상황에서 장인어른이 내 저택에 뿌리를 박고 지내면 트릭시에게 갈 관심과 축하가 분산될 가능성이 높다. 장인어른으로서는 같은 공작과 마음이 상할 일은 피하고 싶겠지.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는 한 가족으로서 만나겠군요.”
내가 뒤로 물러나자 장인어른은 트릭시에게 악수를 건넸다.
그 인사에 트릭시도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트릭시를 깍듯하게 대했던 장인어른이 고개를 숙이는 것도 아니고 악수를 건넸다. 이는 장인어른이 트릭시를 ‘연장자 공작’이 아닌 ‘사위의 아내’로 여기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
트릭시로서는 기꺼운 일일 거다. 자신의 나이 때문에 꼬여가는 족보를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는데, 그 족보가 서서히 정상화되고 있지 않나.
“예, 그때가 되면 부디 편히 말씀해주시길.”
장인어른의 손을 마주 잡은 트릭시는 웃는 얼굴로 어려운 요구를 했다.
‘편히 말한다라.’
트릭시의 말에 장인어른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렇게 악수를 하는 것도 큰 각오가 필요했을 텐데, 마종공을 상대로 말까지 편하게 하려면 얼마나 용맹한 심장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타일글레헨에 계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트릭시에게 반말을 하는 걸 연습 중인 만큼, 장인어른도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일 때가 된 거다.
그러니 어떻게든 될 거라 믿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희소 자원에 속한다.
일단 마나를 느끼고 다룰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적은 편이며, 그중에서도 마법을 이해할 정도의 지혜를 갖춘 사람들만이 마법사의 길을 걸을 수 있다. 덕분에 마도강국이라 불리는 유벤 연합왕국마저 전체 인구의 0.1% 정도에 불과한 마법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 0.1%도 조금 부풀렸다는 게 정설이고.
그러나 인구 비율로 보면 적다는 거지, 대륙 전체에 퍼진 마법사 숫자 자체만 보면 그리 적은 편은 아니다.
그리고 그 마법사들이 대륙 곳곳에서 결성한 단체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백야 연구회에서 보낸 선물입니다. 마법계의 거두이신 마종공 각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 나아가실 길에 광명이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오페란트 남매단에서 다량의 포션을 보냈습니다. 이번에 오페란트 공국이 새롭게 개발한 물건으로, 말학으로서 선배께 드리는 작은 성의라고 합니다.”
“마도의회의 명의로 아티팩트와─”
그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단체들이 전부 선물을 보내오고 있었다.
미칠 노릇이다. 이미 제국 내의 지인들, 조국으로 돌아간 부원들의 선물로도 보물고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이제는 대륙 단위에서 온갖 물건이 몰려오고 있다.
그래, 이해한다. 자신들이 존경하는 업계 대선배이자 고인물의 결혼이니 뭐라도 보내고 싶겠지. 만약 남들이 다 보내는데 혼자만 보내지 않으면 밉보일까 겁나기도 할 테고.
그런데 그러면 트릭시의 영지로 보내는 게 맞지 않나? 왜 전부 내 저택으로 보내는 거지? 트릭시가 나랑 동거 중이니 실제 거주지로 보낸 건가?
‘아무리 그래도 개인 저택보다는 공작성으로 보내는 게 맞잖아.’
이 배려 부족한 것들. 이 저택이 한때 후작가의 저택이었다지만, 땅값 비싼 제도의 저택과 공작의 성은 규모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전자보다 후자의 보물고가 더 클 테고.
진리를 탐구한다는 마법사들이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망각하다니. 마종공의 부군은 너희 마법사들에게 실망했다.
“저, 주인님.”
그렇게 멍하니 몰려오는 선물을 구경하던 중, 집사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더 이상 수용할 공간이 없습니다.”
“벌써?”
집사의 말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직 국경도 넘지 못한 선물이 가득할 거라는 게 뻔한 상황에서,벌써 보물고가 포화 상태면 곤란한데.
“이미 보물고는 가득 찼고, 빈방을 임시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부족합니다.”
‘아.’
그리고 보물고가 아니라 저택 자체가 가득 찼다는 확인 사살에 눈을 감고 말았다.
큰일 났다. 남은 방도 없으면 진짜 둘 곳이 없잖아.
“일단 정원에 두고, 어느 정도 쌓이면 텔레포트로 다른 곳에 옮겨.”
짧은 고민 끝에 사치스러운 방법을 떠올렸다. 이 망할 마법사들이 내 저택에 온갖 택배를 보낸다면 기꺼이 크라시우스 물류센터가 되어주겠다고.
다행히 타일글레헨 백작성, 위리디아 백작성, 세르베트 공작성이 있으니 수용 공간 자체는 널널하다. 하나하나가 저택보다 거대하니 그 세 곳을 동원하면 무리 없이 물량을 소화할 수 있을 터.
문제가 있다면 무수한 선물을 쉴 새 없이 옮겨줄 기사… 아니, 마법사가 부족하다는 거지만,
“마법사는 트릭시한테 빌려달라고 할 테니 걱정 말고.”
“예, 알겠습니다.”
여차하면 마탑 마법사들을 동원하면 되니 괜찮다.
내 사리사욕을 위해 부리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 탑주가 받은 선물을 안전하게 옮기자는 건데 싫어하지는 않겠지.
게다가 보물고에 자리 잡은 선물 중에는 마탑에서 보낸 선물도 제법 많다. 양심이 있다면 바쁜 일이 있어도 달려오지 않겠나.
‘선물로 테러 당하는 건 처음이네.’
살면서 다시는 경험 못 할 진기한 일이다.
***
조만간 칼의 두 번째 결혼식이 열린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서.
처음은 세르베트 공작령 내에 있는 카토반 공작가의 별장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공작성도 아닌 별장에서 결혼식을 한다길래 의아하기는 했지만, 그 별장에서 며느리가 태어났다고 하니 납득할 수 있었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면 그보다 의미 깊은 일은 없을 테니.
그리고 그 후에는 이종족 보호구역 내의 엘프 주거 지구에서 진행한다고 한다. 둘째 며느리의 혈육 중에는 엘프가 있지만, 인간에게 깊은 상처를 입은 분이라 차마 제국으로 나올 수 없다고 하던가. 그렇기에 두 번에 걸쳐 결혼식을 진행하게 됐다.
나는 신랑인 칼의 모친으로서 두 번의 결혼식에 모두 참석하기로 했다. 사실 며느리의 혈육인 분이 꺼려 한다면 엘프 주거 지구 결혼식에는 불참하려 했으나, 다행히 외손녀사위의 가족들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여 참석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으신 분이 인간인 우리를 받아주신 거다. 그래서 엘프인 그분도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선물을 고르고 있었고─
“실례하겠습니다. 탑주님과 타일글레헨 백작 각하의 명으로 왔습니다.”
“…….”
내가 먼저 며느리의 선물더미에 휩쓸리고 말았다.
“탑주님께서 받은 선물입니다만, 며느리의 것이 곧 시어머니의 것이니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마음껏 써주시길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 말에 멍하니 정원 한구석에 쌓인 선물더미를 바라봤다.
‘많다.’
너무 많다. 심지어 나에게 허리를 숙이고 있는 마법사 외에도 다른 마법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정원에 쌓인 선물더미와 비슷한 수준의 선물과 함께.
“못난 시어머니가 받기에는 과분한 선물이지만, 고맙다고 전해주게.”
“예. 반드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머리가 잠시 어지러웠지만 입으로는 평온한 대답을 내뱉었다.
조금, 아니, 많이 과하기는 하지만 결혼을 앞둔 예비 며느리의 선물이다. 이걸 거절한다면 며느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부담감과 별개로 받는 수밖에 없다. 이미 시어머니인 나보다 나이와 직책이 아득히 위인 것을 신경 쓰는 아이지 않나. 그런 아이에게 부담을 주는 건 너무한 일.
‘…아이라.’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어느새 속으로도 둘째 며느리를 아이라고 칭하는 수준이 되었다.
역시 사람은 아무리 낯선 환경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하게 되는구나. 아니면 그 아이가 나를 윗사람처럼 대하기에 마음이 편해진 걸 수도 있다. 내 앞에서 며느리가 아닌 공작처럼 행동했다면 영원히 마음을 놓지 못했겠지.
‘착한 아이야.’
생각해 보면 100년이 넘게 공작으로 군림한 아이임에도 자기 권세를 내세워 난동을 부렸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공작 앞에서 다들 알아서 조심한 것도 있겠으나, 그걸 감안해도 조용히 지낸 아이다. 공작의 권위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낄 정도로.
‘어쩌면 공작이라는 이름이 족쇄였을 수도 있겠어.’
서글픈 결론에 도달하자 쓴웃음이 나왔다. 가족을 잃고 마법에만 몰두한 아이에게 공작이라는 이름은 거대한 족쇄였을 거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고, 자신이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도 막는 성벽이었을 거다.
부디 앞으로는 그 아이가 홀로 거대한 족쇄에 묶인 채 살아가지 않았으면 한다. 훗날 칼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칼과 그 아이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함께할 테니.
“자, 어서 옮기게. 귀한 물건을 밖에다 둘 수는 없으니.”
“예, 마님.”
이윽고 몸을 돌려 시종들에게 지시했다. 어여쁜 며느리가 보낸 소중한 선물을 햇볕 아래에 방치할 수는 없다.
***
크라시우스 물류센터가 가동되고 하루 후.
“주인님.”
“어, 집사. 왜?”
“…마님께서 성의 자리가 부족하니, 이제 그만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
믿었던 세 개의 축 중 하나가 무너졌다.
‘망할.’
이제 위리디아랑 세르베트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