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91)
로판 속 공무원 491화(492/945)
크라시우스 물류센터는 서비스 종료다.
다행히 운영에 실패하여 문을 닫은 건 아니고, 인력에 인력을 갈아 넣은 끝에 대륙 각지에서 몰려든 모든 선물을 온전히 보관할 수 있었다. 성공적인 마무리였으나 두 번이나 겪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다들 고생이 많았다. 마탑 업무로도 바쁜 와중에 우리 부부의 사적인 일을 도와준 거니, 그만한 보답은 해야겠지.”
그렇기에 다소 초췌해진 마법사들 앞에서 의례적인 덕담과 보상을 뿌렸다. 솔직히 이것들이 보낸 선물도 적지 않으니 자업자득 같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고급 인력을 공짜로 부리면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감찰성 장관이 탑주님의 위세를 믿고 마법사들을 막 대한다.’ 같은 거. 그런 여론이 마법사들 사이에 생기면 골치 아프지.
물론 나 말고 마법사들이. 트릭시가 그 여론을 듣게 되면 마법사 사회에 세대교체 열풍이 불지 않을까. 자발적 세대교체가 아닌 강제적이라는 게 문제겠지만.
“아닙니다, 각하. 탑주님의 혼인은 마법사들의 경사나 다름없습니다. 그 경사를 위해 부족하게나마 손을 보탠 것인데, 어찌 보답을 받겠습니까.”
내가 은화가 담긴 주머니를 나눠주자, 대표격인 마법사가 손사래를 치며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 딱 원하던 반응이다. 존경하는 탑주의 남편이 자신들을 함부로 대하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정당한 대가를 주면 자신들이 먼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결혼식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준 하객들에게도 식사를 대접하는 법인데, 손을 빌려준 후학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게 말이 되겠나. 진정 탑주를 생각한다면 부담 갖지 말고 받도록.”
그러니 마법사의 사양을 무시하고 주머니를 찔러주었다. 이 마법사도 의례적으로 한 사양일 테니.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당연하게도 두 번의 사양은 없었다.
존경하는 탑주를 도왔다는 자부심과 실질적 보상이 손에 쥐여줬는데, 거절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내가 할 일은 끝나지만 트릭시는 여전히 분주했다.
“아직도 쓰고 있었어?”
“대륙에 있는 마법사 단체 숫자만큼 써야 하니 어쩔 수 없지. 그나마 작은 단체들은 공동 명의로 보내서 하나하나 답장을 보낼 필요는 없단다.”
빙긋 웃으면서도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이는 트릭시를 보다가 조심스레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선물을 받았다면 잘 받았다고 답장 정도는 하는 게 도리. 하다못해 뇌물을 받아처먹는 권신도 뇌물을 준 상대에게 답변을 하는 마당에, 마법계의 원로이자 거두인 트릭시가 침묵으로 일관할 수는 없다.
덕분에 내가 물류센터 총책임자로 구르는 동안, 트릭시는 친히 답장을 작성하고 있었다. 결혼 축하 선물을 보낸 마법사 단체 전부에게.
“다들 기뻐하겠어. 마종공의 손글씨면 보물로 삼을만하지.”
“후후, 그런 말을 들으니 민망하구나.선물의 답례를 편지로 때우는 거잖니.”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편지도 누구의 편지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
“그래서 편지마다 작은 조언도 적고 있었단다.”
?
예상치 못한 말이라 찻잔에 차를 따르던 손이 멈추고 말았다.
편지마다 작은 조언? 다른 사람도 아닌 마종공의 조언?
‘작은 거 맞나.’
나도 모르게 트릭시가 작성한 편지들을 빤히 쳐다봤다.
확실히 단순한 감사 인사 외에도 알 수 없는 수식과 도형 같은 것들이 적혀있었다. 자세히 보니 인사는 2, 3줄로 끝나고, 나머지 공백이 전부 저런 내용이었다.
“단체 이름이나 보낸 선물을 보면 무슨 연구를 하는지 대충 알 수 있지. 그 연구에 대한 개인적 사견이나 경험을 적는다면 나름의 성의 표현은 되지 않겠니?”
“그…”
무언가 대답을 하려 했지만 도로 입을 닫았다.
‘보물 맞네.’
아까는 농담 삼아 한 말이었지만 농담이 현실이 되었다. 저 편지들은 보물이 맞다.
트릭시를 보는 것만으로도, 작은 가르침을 받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기는 것들이 마법사다. 그런데 작은 가르침 수준을 넘어 자신이 일생을 걸고 연구하는 분야에 대해 조언을 받는다? 그 자리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기절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교황이 친필 사인한 성경.’
비유가 조금 이상하지만 대충 그런 걸 받는 기분이 아닐까. 아님 말고.
“그건 그렇지.”
조금 혼란스러운 심정을 뒤로 하고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나름의 성의 표현 수준을 넘어 은총인 것 같지만 넘어가자.
“그런데 저 편지들은 뭐야?”
그리고 슬그머니 주제를 돌렸다.
책상 위에는 트릭시가 작성을 마친 편지 외에도 다른 편지들이 놓여있었다. 다른 편지와 마찬가지로 감사 인사는 적혀있으나, 트릭시의 ‘작은 조언’은 적히지 않은 편지들이었다.
혹시 저 단체들은 딱히 연구 주제가 없나?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연구 주제도 없는 단체는 그냥 친목회잖아.
“아, 이 아이들.”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트릭시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디어도 좋고 열정도 좋은데, 방향이 조금 틀어진 아이들을 따로 선별했단다. 이 아이들에게는 따로 논문을 써서 보내주는 게 좋을 것 같더구나.”
“…….”
담담한 얼굴로 파격적인 말을 하는 트릭시의 모습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조만간 혁신을 이루었다는 단체 소식이 들리면 너희인 줄 알겠다…
***
얼떨떨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칼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알고 있다. 단순히 감사 인사로도 충분한 답장에 조언까지 적을 필요는 없고, 조언을 넘어 논문을 만들어줄 필요는 더더욱 없다. 마법적 성취는 스스로 고뇌하며 탐구한 끝에 얻는 것이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내려주는 것이 아니기에.
하지만 이상하게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결정적 카드를 보지 못하고 헤매는 아이들의 시선을 돌려주고, 방향을 잃은 아이들의 발걸음을 고쳐주었다.
이상한 일이다. 100년이 넘도록 이런 일은 없었는데.
‘그때는 칼을 몰랐으니 당연한 건가?’
이전까지의 100년은 홀로 살아온 100년이다.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지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지도 못한 100년이었다.그렇기에 나도 타인을 덤덤하게 대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중이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따뜻함을 배워서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는 걸 수도 있다.
‘네 덕에 마법계가 발전하겠구나.’
웃음이 나올 뻔했다. 네 덕에 내가 변했으니, 마법계가 진보를 이룬다면 그 역시 네 덕분이겠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지경이다. 처음 칼을 봤을 때만 해도 이 아이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제국을 위협했던 역천자를 이긴 강자라고 하길래, 전승공이 그토록 극찬하고 아끼길래, 전쟁에 참전한 마법사들이 기이할 정도의 회복력을 지녔다고 말하길래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었다. 독특한 아이니 그 아이의 피로 연구를 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저 그뿐일 만남이었다. 내 길고 긴 인생에서 칼 역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각하. 실례가 아니라면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하렴.”
“제 피는 어떤 연구에 사용되는 겁니까?”
그리고 피를 제공해주었으면 한다는 요구에 칼은 그렇게 말했었다.
“네 회복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포션을 만들려고 한단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성공적으로 연구가 끝나면 기존 성능을 아득히 능가하는 물건이 나오겠지.”
“그렇군요.”
마법사이자 연구자로서 실험 협조자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 숨김 없이 말하자 칼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제가 누군가를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는 데 일조할 수 있겠군요.”
다소 씁쓸한 표정과 함께.
의외인 반응이었다. 내 연구에 협조하게 된 사람들이라면 보답에 대한 흥미, 혹은 나와 연이 생긴 것에 대한 흥분, 그도 아니라면 단순히 나를 도울 수 있는 것에 대한 기쁨을 보였다. 칼은 단순히 피에 대한 대가만 의례적으로 확인했을 뿐, 그 어떤 경우의 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미약한 흥미가 생겼다. 아무리 참전 경험이 있다지만 스물도 되지 않은─ 그것도 제국백 후계자로서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을 아이가 보일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게 칼이 전쟁에서 겪은 일을 알게 되었다. 가족처럼 생각하던 사람들을 전쟁에서 잃고, 홀로 살아 돌아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안타까웠다. 나도 스물 정도의 나이에 부모님을 잃었다. 부모님과 친우가 같을 수는 없어도, 소중한 사람을 잃은 충격에 위아래는 없지 않나.
그 후에는 대견했다. 내가 저 나이 때는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떠난 사람들을 잊지 못해 폐인처럼 지냈었는데 칼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갔다. 감찰부의 신규 부장으로서, 2황자파를 깔끔하게 지워나갔다.
‘그때부터 마음에 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나와 비슷한 선택지 앞에 섰지만 다른 방향을 택한 너를. 마음의 문을 닫고 타인과 거리를 벌린 나와 달리, 기꺼이 다른 사람들과 나아간 너를.
그럼에도 옛 인연을 잊지 못하고 한참이나 무덤에 머물던 너를.
‘좋게 생각하니 좋은 것만 보였지.’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하여 입가에 손을 댔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처음이고, 누군가를 호의적으로 바라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칼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고, 한 번이라도 더 말을 걸고 싶었다. 나 홀로 칼에 대한 호감을 무럭무럭 키워나갔다.
어느 순간 그 감정이 단순한 호감 수준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종족과 수명의 차이를 떠올리며 자제했다. 부모님의 일을 떠올리며 억눌렀다.
허나 기적적으로 그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그리고 이렇게 됐지.’
물론 칼이 기적적인 수단을 선택할지는 알 수 없다. 나도 어머니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어머니가 홀로 남은 나를 걱정하되 아버지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않으신 것처럼, 나 역시 칼을 만난 걸 후회하지 않으니까.
“트릭시, 잉크 번진다.”
“아.”
칼의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어느새 손이 멈춰서 펜촉이 같은 곳을 누르고 있었다.
“이건 다시 써야겠구나.”
“얼마 안 쓴 편지라 다행이네.”
그 말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냥 미소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