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92)
로판 속 공무원 492화(493/945)
결혼을 며칠 앞두고 황제한테 불려갔다.
안타까운 일이다. 요즘 직접 대면하지 않고 통신구로만 연락해서 편했는데, 방학하기 무섭게 호출을 당했다.
“아우우!”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황태녀 전하.”
허나 대부로서 대녀 얼굴은 자주 봐야 하지 않겠냐는 명분을 들먹여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사실 ‘심심해서 불렀다.’ 같은 미친 명분이어도 거절할 능력은 없지만.
아무튼 호출 명분이 황태녀랑 놀아주기였기에 황제의 호출임에도 불구하고 태양전 집무실이 아닌 황후궁으로 오게 되었다. 그나마 마굴이나 다름없는 집무실은 피해서 다행이다.
“우?”
“전하?”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황후가 건네주는 황태녀를 안자마자 황태녀는 내 턱 부근에서 손을 허우적거렸다.
혹시 침대에 눕혀달라는 건가 싶어서 슬쩍 팔을 내렸으나, 빠우우 같은 소리를 내면서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혼란스럽다. 몇 개월 못 본 사이에 특이한 버릇이 생겼어.
“신경 쓰지 마세요, 장관. 잡을 게 없어서 저러는 겁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황후는 쿡쿡 웃음을 흘리더니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상황 폐하께서도 가끔 황태녀를 안아주시는데, 그럴 때마다 황태녀는 상황 폐하의 수염을 잡아당기고는 했습니다. 장관에게는 수염이 없으니 어딜 잡아야 하나 헷갈리는 것이지요.”
“그, 렇군요.”
일개 신하가 듣기에는 너무 과분한 정보라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상황이 황태녀에게 수염을 헌납했다는 건 예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몇 개월이나 지난 지금까지 수시로 뜯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칼에 찔리면 진짜 푸른색 피가 나올 정도로 냉철하고 근엄한 모습만 보이던 상황이다. 그런 상황이 평범하게 손녀를 안아주고, 무려 수염까지 쥐어뜯긴다고 생각하니 인지부조화가 올 것 같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인가.’
생각해 보면 상황은 부성을 보인 적이 없다. 서자인 장남, 망나니인 적장자, 망나니에게 가려져 공기가 된 막내. 그 셋에게 평등하게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개인적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지도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황제라는 자리에서 내려오자 흔적도 찾을 수 없었던 부성을 조금씩이나마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책임감 때문에 감정을 억눌렀다는 거겠지. 늦었지만 손녀만큼은 온전히 사랑할 수 있어서 다행일 정도다.
“따아!”
“어머나.”
그렇게 닭에게 모이를 주고 있을 상황을 떠올리는 사이, 턱에서 헛손질만 하던 황태녀가 우렁찬 함성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내 멱살을 잡았다.
“나도 못 잡은 걸 황태녀가 먼저 잡는군.”
그러자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황제가 감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뭘 감탄하고 있어 미친놈아. 네 딸이 대부 멱살 잡는 법을 배웠잖아.
‘이런 거 버릇 들이면 안 되는데.’
만약, 아주 만약이지만 황태녀가 신하의 멱살을 잡는 버릇이 생기면 실로 곤란하다. 아무리 선량하고 유능해도 ‘수 틀리면 신하 멱살 잡음.’ 이라는 한 문장이 붙어버리면 폭군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나.
물론 생후 1년도 지나지 않은 아이니 우연히 잡은 거겠지만, 이 우연이 몇 년 동안이나 이어지면 정말 버릇이 될 수도 있다. 제국을 위해서라도 그건 안 된다.
그렇기에 황태녀의 대부로서 굳게 마음을 먹었다. 황제가 이 멱살잡이를 방치한다면 나라도 단호하게 타일러야─
“뺘우우~”
해맑게 웃음을 흘리는 황태녀와 눈을 마주쳤다.
…
‘애가 그럴 수도 있지 뭐.’
머리카락이 뜯기는 것도 아니고 멱살 정도야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황태녀가 멱살을 잡고 잠이 든 바람에 외투까지 벗으며 긴급탈출을 해야 했다.
“미안하네. 졸지에 장관의 옷을 뺏어버렸어.”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복이라 남는 것도 많습니다.”
피식 웃음을 흘리는 황제에게 살며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내가 뭐 황금으로 치장한 옷을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행정부에서 지급한 감찰부 제복만 입고 다니는데 미안할 것까지야 있겠나.
단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내 옷이 아기인 황태녀에게 병을 옮기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역시 대부라 그런지 너그럽군. 장관은 아이들에게 좋은 아비가 될 거야.”
“과찬이십니다, 폐하.”
뜬금없는 칭찬이었지만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새끼가 무슨 말을 꺼내려고 칭찬부터 하는 거지.
“과찬이라.”
그리고 내 대답에 황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장관이 좋은 아비가 아니면 곤란하지 않겠나. 그러니 과찬이라는 말 대신 영광이라고 하게.”
이어지는 말에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황제가 품은 걱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내 자식들의 가정교육을 판타지로 하거나 독학을 추구한다면, 애석하게도 제국 입장에서는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평범한 귀족도 아닌 차기 제국백과 소공작이 뒤틀린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북방을 제어할 차기 위리디아 백작마저도?
‘아찔하네.’
살짝만 상상했음에도 소돔과 고모라가 얼핏 보였다. 기껏 처리한 2황자가 복사되는 끔찍한 미래야.
“이런, 좋은 말을 하려고 불렀는데 괜히 무거운 말을 꺼냈군.”
“아닙니다, 폐하. 소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켜주신 귀중한 말씀이었습니다.”
뒤늦게 민망하다는 듯 말하는 황제에게 의례적인 답변을 했다.
아니, 사실 의례적인 답변이 아닌 진심이 담긴 답변이다. 자식들을 방치하거나 학대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지만, 내가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엇나가게 한다면 제국 단위의 재앙이라는 걸 깨닫게 해줬으니까.
게다가 나와 트릭시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는 4분의 1이 엘프다. 엘프의 최대 수명이 천년 정도라고 하니, 단순 계산하면 200에서 300년은 산다는 뜻. 그런 아이가 포악한 귀족이 된다면 백성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 있는 말을 꺼냈지만 장관은 크게 괘념치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더욱 마음이 놓였다. 저런 장관이기에 내 걱정이 실현될 확률은 극히 낮다. 적어도 장관이 직접 교육할 크라시우스 2세대들은 폭정이나 교만과 거리가 멀 것이다.
‘그거면 충분이지.’
안심했다. 두 번째 결혼식을 앞둔 장관을 굳이 호출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미혼이던 공작에게 반려가 생기고 후계가 생긴다면 기쁜 일이나, 아이는 낳는다고 끝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장관의 반응을 보니 내가 아니었어도 어련히 잘 했겠다만, 다른 가문도 아닌 공작가와 연관된 문제라 확신을 가지고 싶었다.
“참, 장관. 온 김에 이거나 가져가게.”
그렇게 장관이 나에게 확신과 안도를 주었으니, 이제는 장관을 호출하고 떠본 것에 대한 보답을 줄 시간이다.
“폐하, 이것은─”
“선물일세. 제국백과 공작의 결혼에 황실이 빈손으로 축하해서야 되겠는가?”
품 속에 있던 양 주먹 크기의 오르골을 꺼내 건넸다.
푸른 바탕에 황금 테두리를 둘렀고, 순백의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오르골. 심지어 그 내부도 마나에 민감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니, 이 오르골에 투자된 예산과 기술력은 결코 적지 않다.
‘제법 쓰기는 했지.’
이 오르골 하나에 투입된 예산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공작은 제국 귀족들의 정점이자 천명을 바로 세운 공신들의 후손. 당연히 황실도 그들을 존중하며, 결혼 같은 경사에 정성과 돈과 돈을 쏟은 선물을 주는 것이 관례다. 오죽하면 궁내성에는 공작들을 위한 선물 예산이 따로 준비되어 있겠나.
허나 카토반 공작가는 100년이 넘도록 경사가 없었다. 오시덴 공작가가 황금공의 맹활약으로 인해 열두 번이나 예산을 털어먹은 것과 대조되는 일.
그렇기에 정해진 예산을 아득히 능가하는 예산을 투입했다. 그동안 카토반 공작가가 받지 않은 선물을 몰아서 준다 생각하고, 제국을 위해 헌신한 장관을 대우한다 생각하며 만들었다.
“…과분한 선물에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폐하.”
장관도 그 오르골의 가치를 알아봤는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마음에 들었으면 됐다.
***
결혼식 하루 전, 미리 세르베트 공작령으로 이동했다.
저번 결혼식 때는 제도에서 제도로 이동하는 거라 당일에 움직여도 상관없었지만, 이번 결혼식은 제도 바깥에서 진행하는 거다. 아무리 텔레포트가 있다 하더라도 미리 가서 준비하는 게 편하다.
결정적으로 대륙 마법계에서 거물이라고 불리는 마법사들이 세르베트 공작령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물론 마법사들이 미치지 않는 이상 트릭시의 영지에서 소란을 일으키지는 않겠으나, 손님이 모여든다면 주인이 자리를 지키는 게 맞다.
“많이도 왔네.”
집사장이 건네준 명단을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단순히 방문한 마법사의 소속과 이름만 적힌 명단임에도 그 두께가 상당했다.
그 와중에 명단 가장 앞쪽에는 킬라나스 공작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래, 이 양반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올 줄 알았지.
“이거 공간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군요.”
“염려 마십시오. 별장 인근의 수풀은 깔끔히 정리하였으니, 한 번에 대규모 인원이 모여도 혼잡하지 않을 겁니다.”
작은 우려를 담아 말하자 집사장은 자신 있게 답했다.
너무 자신감 넘치는 확답이라 신뢰가 갔다. 충성심 넘치는 집사장이 저럴 정도면 진짜 확실한 거겠지.
“가신분들 덕에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겠군요. 감사합니다.”
“감사라니요. 감사는 오히려 저희가 드려야 할 지경입니다.”
그러고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인 집사장은 다시 결혼식장을 점검하겠다며 홀연히 사라졌다.
보면 볼수록 걱정된다. 아직 정식 부군이 아닌 나에게도 저러는데, 정식 부군이 되면 얼마나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일까. 남들이 보면 집사장이 아니라 노예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가신들 앞에서는 입조심 해야겠어.”
앞으로 집사장을 위시한 가신들 앞에서는 흘러가는 말도 조심해야 한다. 여차하면 내가 기억도 못하는 명령이 어딘가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으니.
“…….”
“트릭시?”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리자, 말없이 바닥만 쳐다보는 트릭시가 보였다.
‘긴장했네.’
귀여운 모습이라 픽 웃음이 나왔다. 내일이 결혼식이라고 긴장했구나.
…흐으으음.
“흐야아앗!”
기습적으로 귀를 매만지자 트릭시가 기겁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반응 확실하다. 만족스러워.
“카, 칼! 이게 무슨 짓이니!”
순식간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 트릭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귀를 만지는 것이 엘프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 이후로 트릭시는 귀를 만지는 걸 꺼려했다. 나는 여전히 그 의미를 모르지만, 아무튼 트릭시가 꺼려하길래 자제했고.
“우리 사이에 뭐 어때.”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든, 이제 자제할 필요가 있나? 이미 닷새나 별장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냈잖아. 어떤 의미든 간에 그 닷새보다 뜨거운 의미는 아닐 텐데?
“이제 부부인데.”
당당한 선언과 함께 트릭시의 양 귀를 동시에 매만졌다.
“그, 그만… 제발 그마아아아안…”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트릭시를 보니 만족스러웠다.
그동안 이걸 못해서 너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