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94)
로판 속 공무원 494화(495/945)
신부가 납치당했다.
내가 생각하고도 무슨 말인지 혼란스럽지만, 신부가 결혼식장에서 납치당했다.
‘몰래카메라인가?’
멍하니 저 멀리 사라지는 엘프 무리를 바라봤다. 엘프들에게 온몸이 붙들려 짐짝처럼 실려가는 트릭시도 애처롭게 나를 쳐다봤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뭐지 이거. 혹시 이제 와서 ‘장로님의 혈족이 인간 따위와 결혼하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 메타에 돌입한 건가? 그럼 많이 곤란한데.
“푸흐, 많이 놀랐지?”
“아, 예, 뭐…”
그렇게 멀뚱히 서있는 나에게 다가온 클라리스는 킥킥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이해해 줘. 엘프에게도 결혼식은 중요한 행사거든. 오랜만에 열리는 결혼식이니 예쁘게 꾸며주고 싶어서 저러는 거야.”
그 말에 트릭시가 사라진 방향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납치가 아니라 조금 과격한 운송이었구나. 마음이 놓였다.
‘중요한 행사라.’
확실히 엘프 입장에서는 결혼식이 희소하고 중요한 행사일 수밖에 없다.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적은 숫자와 압도적으로 긴 수명. 이 두 요소가 결합되면 가뭄에 콩 나듯 결혼식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결혼을 할 사람도 적고, 수명도 수백 년인 종족이니 수십 년에 한 번 결혼식이 일어나도 대단한 수준 아닌가.
게다가 트릭시는 장로의 유일한 혈육이자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가 남긴 딸이다. 그런 귀중한 존재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누구보다 예쁘게 꾸며주고 싶겠지. 이해한다.
‘저기서 더 예뻐지는 건가.’
너무 애처가스러운 생각이지만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수백 년 동안 연륜을 쌓은 엘프들이 작정하고 꾸민 신부? 도대체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이 세상 것이 아닐 정도로 휘황찬란한 드레스를 입고 나올 수도 있고, 아니면 엘프의 전통 의복을 입고 나올 수도 있다.
당연하지만 어느 쪽이든 만족한다. 트릭시라면 뭘 입어도 잘 어울릴 테니.
“아, 우리 트릭시 시부모님 되는 분들이시죠? 이쪽으로 오세요! 장로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한참이나 킥킥거리던 클라리스는 내 뒤에 계시던 부모님을 보더니, 이윽고 외조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활기찬 분들이구나.”
그리고 어머니가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셨다.
“트릭시를 가족처럼 여기는 분들입니다.”
다소 얼떨떨한 목소리였기에 무난한 답변을 돌려줬다. 지금 어머니가 느끼는 감정은 나도 1년 정도 전에 느꼈었다.
그야 대륙 제일의 마법사라고 존경받는 트릭시가 이곳에만 오면 쪼그마한 꼬맹이 취급을 받는데, 그걸 보고도 충격을 느끼지 않는다면 인간의 감정이 없는 로봇이다. 오죽하면 아버지도 침묵을 지키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계시겠나.
그나마 작년 수학여행 때 이 다이나믹한 광경을 본 경험이 있는 연인들과 에리히, 세라 정도만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 두 분도 익숙해질 거라 믿는다.
결혼식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엘프들이 하나둘 외조모님 집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엘프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도 온 걸 보니, 엘프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이종족들도 축하 겸 잔치 구경을 위해 찾아온 것 같았다. 졸지에 다종족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결혼식이 되었다.
‘다양하기는 다양하네.’
내 근처를 맴도는 요정들과 놀아주며 슬쩍 다종족 하객들을 훑어봤다.
판타지의 디폴트 종족인 드워프, 다양한 외견을 지닌 수인, 이종족 보호 구역 내에서도 볼 기회가 적은 인어까지.
‘와.’
인어를 보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반신이 물고기인 인어가 어떻게 육지를 돌아다니나 싶었지만, 거대한 어항에 담긴 것을 미노타우로스와 켄타우로스가 끌어주고 있더라. 너무 획기적인 이동 방법이라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니 이종족 보호 구역은 제법 괜찮게 돌아가는 낙원이 아닌가 싶었다. 다른 종족들이 서로 돕고 웃으며 지내는 곳이라니. 이곳이 낙원이 아니면 무엇이 낙원일까.
“으히힣, 여깃까지온거어언~ 나두 처음가튼데!”
낙원의 주인이 저 모양이라는 게 실로 유감이지만.
본능적으로 나올 뻔한 한숨을 억누르며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어서 얼굴은 보기 싫─
“아! 죠카아아!”
들켰다.
“우뤼죠카! 닷쌔마네 겨론하는거 추카해!”
그 우렁찬 외침에 다른 하객들의 시선도 나에게 쏠렸다.
제발, 제발 조용히 해줘.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종족도 있는데, 제발 그런 모습을 보이지 말아 줘.
“참, 죠카며누리는어디써!?”
마지막 확인 사살과도 같은 말에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러네. 이제 트릭시는 공식적으로 현명공의 조카 며느리가 되는 거네.
제국… 이걸로 괜찮은 건가…?
***
어머니의 친우분들께 수 시간이나 시달린 끝에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붙잡힌 보람은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별장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때와 색다른 분위기를 풍겼으니까.
‘나도 엘프는 엘프구나.’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다소 하늘하늘한 옷과 머리에 쓴 작은 화관은 동화에나 나오는 옛날 엘프의 이미지와 흡사했다. 나도 인간 세상의 존재가 아닌 엘프 사회의 일원이 된 것 같았다.
행복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약 100년. 그 시간 동안 내 몸에 흐르는 어머니의 피를 부정한 적은 없으나, 그 피 덕에 남들과 다른 존재로 살아갔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랬던 피가 마침내 동포들의 공간에서, 동포들과 같은 모습으로 꽃을 피웠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모습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부부가 될 수 있다.
“신랑 잡아왔어!”
“결혼식 시작하기 전에 미리 봐야지! 신랑이 결혼식 때 보고 쓰러지면 어떡해!”
그 와중에 몇몇 친우분들이 칼을 붙잡고 달려왔다. 갑작스레 양팔을 붙잡힌 칼은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오.”
나를 보자마자 짧고 굵은 감탄사를 흘렸다.
“별장에서만 결혼식 올렸으면 후회했겠다.”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흘리며 하는 칭찬이었지만, 어떤 장황한 수식어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칼의 진심이 즉각적으로 나온 것 같았으니.
두 번째 결혼식이 시작됐다. 닷새 만에 하는 결혼식이라 그런지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즐거웠다. 닷새 전에는 긴장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칼의 미소를, 하객들의 박수를, 사회자의 말을 빠짐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곳의 주교로 지내면서 부부의 탄생을 축하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복자이신 분의 결혼식 사회를 맡다니, 주님의 종인 자로서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겠지요.”
사회를 맡은 이종족 교구 주교의 말에 하객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주교의 말처럼 이종족들의 결혼은 드문 편이고, 설령 결혼을 한다고 해도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혼인을 한다. 길어야 몇 년 단위로 교체되는 교구 책임자가 결혼식 사회를 맡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헌데 그 극악의 확률을 뚫고 복자인 칼의 결혼식 사회를 맡게 되었으니, 저 주교도 에넨의 관심을 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예, 방금 말한 것처럼 저는 천상의 주를 섬기며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주님이라면, 부부가 사랑을 맹세하는 아름다운 장소에서 신앙을 강요하는 건 원치 않으실 겁니다.”
그렇게 말한 주교는 주교의 상징인 주교관을 벗었다.
“그러니 지금만큼은 여명 교단의 사제가 아닌 이종족 보호 구역에서 친절한 이웃들과 함께 지내는 시민으로 있겠습니다.”
상당히 파격적인 선언에 더욱 큰 웃음소리와 환호가 울려 퍼졌다.
“주교가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복자께서 같이 계시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제가 주께 혼나면 옆에서 변호 좀 해주십시오.”
“하하, 당연히 그래야죠.”
그 말에 칼도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다. 살다 보니 이런 사제도 보는구나. 저 사제가 유독 유별나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이종족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너그러워진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선천적 성격이든 후천적 변화든 대단한 건 마찬가지다. 타인을 위해 신앙을 양보하는 사제가 어디 있을까.그래서인지 세계수도 빛을 내며 감사의 표시를─
…
‘응?’
빛이 난다고?
***
사회를 맡은 주교가 주교관을 벗고 얼마 뒤.세계수(진급 예정)인 나무가 찬란한 빛을 내며 진화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빛이네.’
순간 실소가 나왔다.마르와 결혼할 때 봤던 십자가처럼 찬란히 빛나는,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거대해지며 나뭇잎이 무성해진 세계수를 바라봤다.
저건 엘프가 아닌 내가 봐도 알겠다. 아무리 신중하게 결론을 내리려고 해도 세계수가 부활하려는 모습이 맞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보고 싶었어!”
그 증거로 결혼식이 시작되자 조용히 숨어있던 요정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세계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동시에 눈물을 비처럼 흘리며.
“이게, 무슨…”
세계수를 보다 주교의 중얼거림이 들려 슬쩍 고개를 돌렸다.
빛을 내는 세계수와 자신의 주교관을 번갈아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는 모습. 마치 자기 때문에 대형 사고가 일어난 건가 걱정하는 공무원의 모습이었다.
‘타이밍도 참.’
생각해 보면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다. 여명 교단의 사제가 자신의 신앙을 잠시 벗어두자마자 콘스탄티나의 유산이 부활한다? 노리고 한 거면 천부적인 감독이고, 우연이라면 신의 화려한 부활을 온 세상이 돕는 거다.
– …수백 년 만이군요.
이윽고 싱그러운 목소리가 결혼식장에 울려 퍼졌다. 목소리에 싱그럽다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맞나 싶지만, 도저히 그 단어 말고는 마땅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 제가 놓쳐버린 가여운 아이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
결혼식장이 혼란스러워졌다. 하객들은 동요하고, 요정들은 더욱 기뻐하며, 엘프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세계수로 다가갔다.
– 대륙의 초목을 다시금 느끼는 것이.
끊임없이 자라던 세계수가 성장을 멈췄다. 찬란한 빛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 저의 친우들이, 대륙을 볼 수 있는 것이.
뒤이어 세계수 가지 사이, 나뭇잎 사이에서 무언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붉은 새, 푸른 거북이, 녹색 호랑이, 황색 뱀.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가지각색의 형태를 지닌 것들이 허공을 떠다녔다.
– 그렇기에 오늘은 실로 기쁜 날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세계수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 쟨 초목의 신이 아니라 강도의 신이야.
영원한 푸른 하늘의 씁쓸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