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95)
로판 속 공무원 495화(496/945)
초목의 신을 순식간에 강도의 신으로 만들어버린 하늘의 분노는 높고도 웅장했다.
– …나도 알아. 내 시대는 이미 지났고, 옛날 같은 세력을 다시 일으킬 능력도 생각도 없어. 이제 대륙은 유목민이 아닌 정주민의 시대니까.
듣는 사람이 절로 애잔해지는 말을 꺼낸 영원한 푸른 하늘은 감정이 격해졌는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그래서 세계수에 박혀서 백수처럼 지낼 생각이었어. 세계수 부활에 일조했으니 콘스탄티나도 나를 쫓아내지는 않을 거고, 세계수를 통해 오고 가는 신성력 일부만 가져가도 신으로 지내는 데는 문제없지.
알고 있다. 처음 영원한 푸른 하늘을 봤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 내가 세계수에 조용히 있어도, 북방에는 나를 기억하는 애들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거야.
본능적으로 떠오른 어느 후작 때문에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참자. 지금 웃으면 영원한 푸른 하늘이 악신으로 타락할지도 모른다.
– 그런데, 그런데 북방에는 나를 신으로서 섬기는 아이가 없잖아…! 아무리 백수여도 신도 없는 신이 말이 되냐고!
‘이상한 일이기는 하죠.’
영원한 푸른 하늘이 빼액 소리치자마자 빠르게 대꾸해 줬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좀 미묘한 상황이기는 하다. 신도 없는 신이 무슨 신이야. 신 호소인이지. 하다못해 사이비 교주도 자기 추종자는 많다.
– 내 신도라고 할만한 애는 너밖에 없어! 내 존재를 믿고, 내 성흔도 있고, 신물도 있고, 소통도 하잖아! 내가 신이라는 걸 증명해 주는 증거는 너뿐이라고!
실로 눈물겨운 말이다. 본인의 신앙을 박살 낸 이교도가 자신이 신이라는 걸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라니.
듣기만 해도 가슴이 옹졸해진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꼬여야 이 지경이 되는 걸까.
–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백수의 유일한 신도를 가져가? 심지어 세계수를 부활시켜준 은신인 내 신도를? 그러고도 초목의 어머니냐!
분통이 터진다는 듯한 외침에 그저 침묵만 지켰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많다. 난 영원한 푸른 하늘의 신도라기보다는 에넨의 신도에 가깝고, 엄밀히 따지면 에넨의 물건을 영원한 푸른 하늘이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 상황에 콘스탄티나라는 새로운 약탈자가 난입한 거고.
아니, 그것보다 약탈자 맞나? 적어도 콘스탄티나는 나를 자신의 신도나 명예 제사장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데? 그냥 세계수를 부활시켜줘서 고맙다고 감사 표현만 했잖아.
물론 그 생각을 영원한 푸른 하늘에게 보이지는 않았다. 난 악신을 만들 생각이 없다.
– 여전히 활기차시군요.
그렇게 적당한 위로의 말을 생각하는 사이, 머리에서 콘스탄티나의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뭔데. 왜 당신도 내 머리에다 말 거는 건데. 내가 뭐 통신 중계기인 줄 아나.
– 야! 내 신도 머리에서 나가! 명예 제사장이란 말이야!
영원한 푸른 하늘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격한 반응을 보였다.
– 당신의 명예 제사장이요? 에넨의 복자가 아니고요?
– 이이이익…!
허나 명치 쪽으로 강하게 파고드는 팩트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 게다가 에넨이 당신에게 신세를 진 적이 많아 당신이 이 아이에게 붙어있는 걸 용인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저도 괜찮지 않나요? 저만큼 에넨하고 친한 신도 없는데 말이죠.
– 넌 엘프랑 요정들하고 놀아! 네 자식들 저기 많잖아!
– 그 자식들을 다시 만나게 해준 아이인데 감사를 표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치열… 하다기보다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성을 내는 대화를 들으며 옆에 있던 트릭시의 손을 잡았다.
신들의 일은 신들이 알아서 해결하게 두자. 나는 지금 일생에 몇 번 없는 경사를 치르는 중이지 않나.
“칼?”
멍하니 세계수를 보던 트릭시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잊지 못할 날이 되겠어. 그렇지?”
그런 트릭시에게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맞춤을 했다. 비록 하객 대다수의 관심이 세계수의 부활과 콘스탄티나의 목소리에 쏠렸으나, 이 자리가 우리의 결혼식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혼란 역시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결혼식을 빛낸 이벤트가 될 터. 세계수가 건재하는 한, 엘프라는 종족이 존재하는 한─ 이 결혼식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다.
– 나, 난 하늘의 신이야! 옛날에는 유일신이었다고! 그러니 한 명 정도는 연장자에 대한 예우로 양보해 줄 수 있잖아!
– 태양은 따뜻함으로 신도를 보듬고, 초목은 신도의 곁에서 함께 자라죠. 다만 하늘은 신도가 갈망하되 닿을 수 없는 고귀한 장소이니, 어떠한 신도도 없이 고고하게 지내는 것이야말로 하늘다운 모습 아닐까요?
– 그게 무슨 소리야!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털리는 듯한 대화는 애써 무시했다.
– 문명이 발전할수록 태양의 가치는 더욱 커지고, 미약한 씨앗은 시간이 흐르면 푸른 초목을 이루죠. 허나 하늘은 영겁의 시간이 흘러도 드높고 푸를지니, 굳이 순리를 거스르며 변하고자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부드러운 콘스탄티나의 목소리에 제3자인 나조차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말투만 정중하지 ‘네가 몰락한 건 순리니 그냥 얌전히 있어라.’ 라는 말이잖아. 내가 과하게 해석하는 걸 수도 있지만, 적어도 영원한 푸른 하늘의 몰락을 지적한 건 맞는 것 같다.
– …….
너무도 흉악한 말에 영원한 푸른 하늘도 다시 입을 닫─
– 흐으윽…
‘아.’
– 아.
쟤 운다.
하늘의 슬픔은 처량하고도 애잔했다.
– 내가 너희한테 못 해준 것도 아닌데… 너희가 막 신이 됐을 때 텃세 부리지도 않고 잘 대해줬는데…
– 당연히 기억하죠. 당신이 아니었다면 뜻을 펼치기도 전에 쓰러진 신들이 많았을 거예요. 에넨도 말만 하지 않았지 그런 당신을 존경했습니다.
– 지, 진짜?
– 네. 저도 당신을 존경하지만, 오랜만에 본 것이 너무 반가워 경솔하게 놀린 겁니다.
그래도 울린 당사자가 열심히 달래고 있으니 조만간 진정할 거라 믿는다.
그보다 영원한 푸른 하늘의 전성기는 생각 이상으로 화려했구나. 파편적인 정보만 모아봐도 거의 태초의 신, 유일신, 후발 주자들을 보듬은 선배 수준이다. 그런 상황에서 후발 주자인 신에게 ‘너 몰락했잖아.’ 소리를 들으면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이 울컥하겠지.
‘하늘의 몰락은 순리…’
생각해 보면 태양의 가치는 영원히 굳건하고, 초목은 시간이 지나면 대지를 뒤덮는다.
반면 하늘은 뭔가 포지션이 미묘하지. 과거에는 닿을 수 없는 이상향으로 여겨져 숭배받았지만, 인간이 발전하면 결국 하늘을 정복하게 된다. 헌데 하늘은 기껏 정복해도 자원을 뽑아갈 수도 없다.
그래, 이건 영원한 푸른 하늘의 잘못이 아니라 포지션의 문제다. 하늘이 아니라 우주였으면 아직도 잘 나갔을 텐데.
아님 말고.
“얘야.”
“아, 외조모님.”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세계수 앞에서 기도를 드리던 외조모님이 다가오셨다.
“미안하구나. 너희를 위한 결혼식인데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어.”
흥분에 가득 찼던 외조모님이 귀를 축 늘어뜨릴 정도면 진심으로 민망하고 미안한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세계수가 엘프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신의 부활은 제가 봐도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길조가 연이어 생긴 걸 보니 외조모님 말씀대로 오늘이 길일인가 봅니다.”
정작 내가 아무렇지 않게 답하자 외조모님의 안색이 조금은 밝아지셨다.
사실 외조모님의 죄책감과 별개로 우리는 정말 괜찮다. 트릭시는 반은 엘프다 보니 세계수의 부활을 반겼고, 나도 아까 생각한 것처럼 이 혼란도 우리 결혼식을 빛낼 요소라 생각 중이다. 득이면 득이지 실이 되지는 않는다.
“…저, 그런데 외조모님.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말하렴.”
그나마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건 뭡니까?”
외조모님의 머리 위에 선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붉은 새였다.
생긴 건 대충 매 비스무리한데, 자세히 보니 깃털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전부 불꽃이었다. 저 미친 새대가리가 남의 부인의 외조모 되시는 분 머리에 불을 올리고 있는 거다.
그래도 다행히 외조모님의 머리에 불이 붙지는 않았다. 신기하기도 하지.
“아, 이분.”
내 질문에 외조모님은 무려 존칭으로 대답하셨다.
불안하다. 대체 저 매가 뭐길래 엘프의 지도자인 외조모님이 존칭을─
“불의 정령왕이시란다.”
“예?”
왕…? 저 매가?
상상도 못한 정체에 슬며시 붉은 매를 바라봤다. 세계수가 부활하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것들이니 정령이나 그 유사품일 거라고 추측하기는 했지만, 설마 왕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내 시선에 매도 부리를 열었다.
– ▷§▥@▣※◎
?
뭐야 시발. 뭐라고 말하는 거야 이거.
상상도 못 한 존재가 상상도 못 한 말을 내뱉자 멍하니 눈만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저거 정령들의 언어인가? 아무리 정령왕이라도 인간들이 지내는 세계에 왔으면 인간 세계 언어로 말하는 게 예의 아니냐?
그런 내 반응에 매가 부리를 도로 다물더니, 다시 열었다.
– 궔뙮댖쁥랪묃얎?
…
‘번역기 깨졌나?’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그 후로 몇 번이나 의사 소통에 오류가 있었지만, 여차저차 제대로 된 언어가 매의 부리에서 나왔다.
– 이제 좀 멀쩡하나?
“아, 예…”
– 흐으, 미안하다. 이 세계에 오는 건 오랜만이라 어떤 언어를 썼는지 헷갈렸어. 다시는 못 올 줄 알고 반쯤 잊어버렸거든.
매─ 아니, 불의 정령왕의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까지는 별 괴상한 언어를 써서 돌연변이 매 같았는데, 사람의 말을 하는 걸 보니 정령왕이라는 게 실감이 갔다.
– 그건 그렇고, 콘스탄티나가 한 말을 들어보니 네가 세계수를 부활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하던데?
“우연이었습니다.”
– 원인이 어떻든 결과가 중요한 거지. 고맙다, 정령계는 지루해서 미치는 줄 알았어.
날개를 파닥이며 내 머리로 옮겨 앉은 불의 정령왕은 마치 알을 품는 듯한 자세로 주저 앉았다.
따뜻하다. 온몸이 불꽃인 주제에 딱 기분 좋은 따뜻함이 느껴진다.
– 저 녀석들도 너한테 고맙다고 할─
– 키에에에에엑!
불의 정령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세계수, 정확히는 세계수 근처를 맴돌던 뱀 모양의 정령이 요정들에게 붙잡힌 채 줄다리기의 줄로 전락하고 말았다.
– 쟤가 땅의 정령왕이다.
“저런.”
귀한 분이 어쩌다 저런 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