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96)
로판 속 공무원 496화(497/945)
아펠스의 만행으로 불타버린 세계수의 부활, 수백 년 간 연결이 끊겼던 신의 재강림.
당장 대륙이 뒤집어지고 여명 교단은 공의회를 개최할 정도의 화려한 기적이었지만, 정작 그 기적을 지켜본 하객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는 건 아니다. 엘프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세계수 앞에서 열정적인 기도를 올렸으며, 나이 좀 있는 엘프는 눈물까지 보였다. 또한 엘프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다른 이종족들도 경외와 축하의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단지 감동만 느낄 뿐, 기겁하거나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정신을 놓지는 않았다.
‘이미 여러 번 예고했으니까.’
세계수의 부활은 갑작스러운 서프라이즈가 아니다. 작년 수학여행부터 지금까지, 잊을만하면 세계수의 부활이 임박했다는 조짐을 간간이 보였다. 이미 엘프와 다른 이종족들 사이에서는 ‘조만간 부활한다!’ 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그 조만간이 오늘이었던 거지.
그나마 동요를 보일 하객이 있다면 극소수의 인간 하객인데, 이 자리에 있는 인간들은 이미 알 거 다 아는 상황이다. 내 연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지의 주인공인 현명공과 이종족 교구의 주교도 세계수 부활 임박을 알고 있었다.
“세상에…”
“허어.”
그렇기에 엘프들보다 놀란 존재가 있다면 우리 부모님이다. 두 분은 세계수에 대한 관심도, 정보도 없었으니까.
물론 이종족 보호 구역으로 오기 전에 세계수로 진화 중인 나무가 있다는 설명은 드렸지만, 언제 부활할지 모르는 세계수랑 아들의 결혼식 중 뭐가 중요하겠나. 덕분에 어머니는 세계수와 그 주변을 떠다니는 정령들을 보며 넋을 놓으셨다.
“당분간 의회에서 지내야겠군.”
그 와중에 철저히 공무원 마인드로 감상평을 내놓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상당히 씁쓸해 보였다.
무슨 심정인지 알 것 같기에 안타깝다. 이번 일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행정부도 제국의회도 난리가 날 터.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들의 결혼식을 즐기러 왔다가 자신의 업무가 10배로 늘어나는 기적을 목도한 것이다.
‘신혼 휴가는 좀 늦게 써야겠네.’
나도 내 미래를 직감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트릭시와 결혼을 했으니 신혼 휴가라는 방패를 쓸 수 있지만, 내가 일조한 세계수 부활 사태를 휴가라는 방패로 피하기는 양심이 아프지.
그러니 어쩌겠나. 제도로 돌아가면 며칠 정도는 바짝 일하자. 다행히 트릭시와의 오붓한 시간은 수학여행 때 가불했으니 급할 건 없다.
– 끄아아아아악! 목은 조르지 마!
“목? 목?”
“어디가 목이야? 어디가 목이야?”
땅의 정령왕의 처절한 비명을 들으며 그렇게 다짐했다.
…음.
“저거 안 말려도 되는 겁니까?”
– 하급 정령이면 모를까, 정령왕 정도 되면 물리력이 안 통해. 일부러 놀아주는 거야.
“그렇군요.”
과연. 일방적으로 시달리는 게 아니라 격한 리액션으로 놀아주는 거구나.
감동적인 모습이다. 무려 왕이라는 이름이 붙은 존재가 자그마한 요정들과 놀아주다니. 이 얼마나 자상하고 온화한 성격인가.
“어?”
“사라졌어! 사라졌어!”
이윽고 실감 나는 비명이 끊기더니 땅의 정령왕은 희미한 빛과 함께 사라졌다.
오, 이번에는 숨바꼭질인─
– …역소환?
‘아.’
불의 정령왕의 말에 급속도로 숙연해졌다.내가 정령들의 생태는 모르지만 역소환이라는 단어를 어느 때 사용하는지는 안다.
소환수가 과도한 충격으로 인해 본래 세계로 돌아갔을 때, 대충 클리셰상 그럴 때 사용하는 말 아닌가.
“방금 물리력은 안 통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 정령계를 벗어난 게 오랜만이라, 아무래도 좀 약화된 상태로 넘어왔던 것 같다.
머쓱한 듯 중얼거리는 불의 정령왕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즉 방금 역소환당한 땅의 정령왕도 이름만 왕이었지, 하급 정령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는 거다. 그러니 요정들에게 목이 졸려 튕겨버린 거지.
– 끄아아아아악! 목은 조르지 마!
땅의 정령왕의 애절한 유언을 떠올리며 속으로 명목을 빌었다.
그냥 실감 나는 연기인 줄 알았는데 진심 가득한 도움 요청이었구나. 우린 그런 것도 모르고…
땅의 정령왕은 금방 복귀했다.
– 세계수가 없어서 걱정했는데, 요즘 요정들은 힘이 좋네…
그것도 처음에 봤을 때보다 더욱 거대한 모습으로.
분명 처음에는 사람 팔 정도 되는 길이였지만, 다시 나타난 땅의 정령왕은 거의 2M에 이르는 길이를 자랑했다. 두 번이나 목이 졸려 역소환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여과 없이 보였다.
– 힘이 좋더라도 왕이라는 녀석이 요정한테 당하다니.
– 다시 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었는데, 혹시 울고 온 거 아닌가요?
거북이 모양을 한 물의 정령왕, 호랑이 모양을 한 바람의 정령왕의 말에 땅의 정령왕은 분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보다 왜 울고 왔냐는 말을 부정하지 않는 건데. 진짜 울고 온 거냐고.
…사실 나였어도 울었을 것 같기는 하다. 수백 년 만에 인간 세상으로 오자마자 요정에게 목이 졸려 역소환이라니. 정령왕이 그런 수모를 당할 거라 상상이나 했겠나.
– 너무 놀리지 마라. 설마 우리한테 물리력이 통할 줄 누가 알았겠어.
– 흠.
– 그건 그렇죠.
불의 정령왕의 중재에 물의 정령왕과 바람의 정령왕은 납득한 듯 한발 물러났다.
다행히 넷의 사이가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냥 친구를 합법적으로 놀릴 명분이 생겨서 참지 못했을 뿐.
– 그건 그렇고─
그렇게 조리돌림이 끝나자 물의 정령왕의 고개가 외조모님 쪽으로 향했다.
– 라파엘라 너도 오랜만에 보는군. 그동안 많이 늙었어.
“마지막으로 뵌 것이 300년도 더 된 일이니까요.”
– 그걸 감안해도 고생한 것이 보여서 하는 말이지.
옅은 미소를 짓는 외조모님을 향해 물의 정령왕은 입을 오물거리더니 무언가를 뱉었다.
푸른색 구슬이었다.
– 물통에 물과 함께 넣어둬라. 꾸준히 마시면 잔병 하나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다.
상당히 기묘한 모양새로 준 물건이지만, 무려 정령왕이 준 것이라 그런지 효과는 확실했다. 무병장수가 가능한 물이면 엘릭서가 따로 없네.
“감사합니다, 왕이시여.”
– 감사는 우리가 해야겠지. 더 이상 이 세계와는 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네 덕에 다시 왔으니까.
슬쩍 고개를 저은 물의 정령왕은 아장아장 걸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왕이라는 존재에게 아장아장이라는 표현을 붙여 유감이지만, 이 악물고 거대화한 땅의 정령왕과 달리 물의 정령왕은 여전히 작은 사이즈였으니까.
– 정확히는 너희 덕이겠다만.
“외조모님이 아니었다면 시작도 못했을 일입니다.”
– 적당히 겸손도 차릴 줄 아는군. 너도 하나 줄까?
그러고는 다시 입을 오물거린 물의 정령왕은 퉷하고 구슬을 뱉었다.
아니, 저거 저렇게 막 뿌려도 되는 물건이었나. 무병장수 아티팩트를 1분 사이에 두 개나 뿌리네.
– 참 신기한 일이야. 못 보던 사이에 라파엘라에게 외손녀가 생기고, 그 외손녀의 남편이 우리의 은인이라니.
– 그 신기함이 이 세계의 매력 아니겠어요?
– 그렇지. 우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그런 면모에 반한 거였지.
어느새 아련한 추억에 빠진 정령왕들을 두고 외조모님과 시선을 교환했다.
일단 결혼식을 공식적으로 끝내고, 가족들끼리 얘기하는 건 외조모님 댁에서 해야겠다.
***
결혼식이 끝났다. 자리를 빛내준 하객들은 덕담을 남기며 각 종족의 주거지구로 흩어졌고, 사회를 맡았던 주교도 바쁜 걸음으로 돌아갔다. 세계수의 부활은 다른 이종족들과 여명 교단으로서도 가볍게 여길 수 없으니 당연한 일.
덕분에 결혼식장에 남은 건 세계수의 부활을 축하하며 요정, 정령들과 춤을 추는 동포들뿐이었다.
“피로연은 이따가 하자꾸나.”
“네, 외할머니.”
그 열정적인 광경에 나와 인간 하객들은 외할머니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 지금 분위기에서 피로연을 해봤자 그게 내 결혼식을 위한 피로연이겠나. 세계수 부활을 위한 축하 연회지.
이 상황이 불쾌하지는 않다. 칼의 말처럼 오늘의 기적은 결혼식을 빛낸 아름다운 일화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게다가 춤을 추고 있는 동포들이 나를 귀여워하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 흥분이 가라앉으면 내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것이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졸지에 아들의 결혼식이 뒷전으로 밀린 시부모님이지만,
“살면서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습니까. 세계수의 부활은 모든 종족과 대륙의 복이니, 피로연이 잠시 연기되는 것 정도는 흠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기쁜 날에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아버님은 외할머니께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하셨다.
“게다가 닷새 전에도 피로연을 즐겼는데, 두 번째 피로연이 밀렸다고 투정을 부리는 건 염치가 없지요.”
“후후, 그런가요? 너그럽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 나름의 농담에 외할머니도 미소를 지으셨다.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나 시부모님의 마음이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버님은 도리어 외할머님을 위로하고 계신다.
– 요즘은 호랑이를 보기 힘들다고요? 멋지게 생긴 아이들이라 그 모습으로 지내는 건데.
“아펠스의 마지막 황제가 호피를 좋아해서, 전 대륙에 있는 호랑이의 씨가 마르다시피 했습니다. 동물원에 남은 개체들로 겨우 명맥을 이어나간다고 하더군요.”
– 또 그것들이 문제군요. 하여간 이상한 일이 생기면 죄다 아펠스 때문이니.
심지어 어머님은 요정들의 손길을 피해 도망친 정령왕들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안면을 트셨다.
신기한 일이다. 정령이라는 존재를 처음 본 어머님이, 무려 정령왕이라는 고귀한 개체와 평범히 대화를 나누고 계신다. 혹시 조상 중에 정령사가 계신가?
너무 뜬금없는 발상이지만 연구해 볼 만은 하다. 이 세상에 이유 없는 결과는 없으며, 어머님의 가문인 아라스 백작가는 제국 건국 이전부터 나름의 성세를 자랑한 가문 아니던가. 그렇다면 세계수가 불타기 전에 정령과 연이 있을 수도 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진지하게 새로운 연구 주제를 정하는 사이, 칼이 내 허리에 팔을 두르며 입을 열었다.
“오.”
이윽고 정령왕과 대화를 나누는 어머님을 보며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머니가 정령하고 친할 줄은 몰랐네. 우리 집에도 세계수가 있었나?”
그 말에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설마 저 광경을 보고 그런 농담을 할 줄이야.
“우리 애가 할머니 피를 물려받으면 훌륭한 정령사가 되겠어.”
그러고는 자연스레 내 배를 쓰다듬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손길이라 귀가 떨렸다.
“카, 칼. 아직 애가 생긴 것도 아닌데 너무 성급한─”
“언젠가는 생길 거잖아. 아니야?”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