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97)
로판 속 공무원 497화(498/945)
현명공이 최우선 확인 요망이라며 올린 보고서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당분간 퇴근은 못 하겠군.’
그리고 그런 결론을 내렸다.당분간 이 집무실이 내 침실이자 식당이며, 며칠 동안은 황후와 황태녀를 보는 걸 포기해야겠다고.
‘세계수 부활이라.’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떠올리자 다시 웃음이 나왔다. 현명공의 보고서에는 긴 내용이 담기지 않았다. 그저 세계수 부활, 콘스탄티나 재강림, 정령 출현이라는 짧고 굵은 문장만 몇 개 적혀있었을 뿐.
그렇기에 오히려 마음이 평온했다. 구구절절 긴 수식어로 꾸며진 보고서라면 보는 내내 한숨이 나왔겠다만, 이 정도로 짧은 보고서를 보니 ‘올 게 왔구나.’ 라는 생각만 들었으니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이윽고 황망한 마음에 홀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래, 세계수가 부활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세계수에 대한 보고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니고, 이미 작년부터 예의주시하고 있던 안건 아닌가. 세계수의 부활은 내 재위 기간에 일어날 기적적이고도 아름다운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1년 만에 세계수가 부활할 줄은 몰랐다. 신의 시간은 인간과 다른 법이니, 신과 관련된 세계수도 인간의 시간에 비하면 상당히 느긋하게 부활할 것이라 여겼다.
장관에게 부활이 임박했다는 보고를 듣기도 했으나, 그 임박도 5년이나 10년 정도로 추측했었다.
‘역시 신의 뜻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나.’
허나 일개 인간의 추측은 화려하게 빗나갔다. 앞으로 신과 관련된 일은 함부로 추측하지 말고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야겠어.
물론 두 번이나 이런 일이 생기면 과로로 쓰러질 게 뻔하지만.
‘세계수가 하나라 다행이지.’
살짝 한숨을 내쉬며 통신구를 잡았다. 부활 시기는 상당히 의외이나, 다행스럽게도 부활 시 행동 요령은 미리 마련해두었다. 언젠가 일어날 것이 확정된 일에 대해 대비조차 하지 않는 건 나태하거나 지능이 없는 자만이 할 일 아닌가.
– 황제 폐하 만세. 궁내성 장─
“급한 일이니 생략해도 좋네. 바로 장관들을 대회의실로 소집하게나.”
– 예, 폐하. 30분 내로 준비하겠습니다.
“좋군. 그때 보도록 하지.”
빠르고 직설적인 지시에 궁내성 장관은 딱딱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직 세계수 부활에 대한 정보는 공유하지 않았으나, 궁내성 장관이라면 내 목소리만 듣고도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다는 걸 짐작했을 거다. 그런 눈치가 없다면 궁내성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
‘궁내성 장관은 미리 알아두는 게 좋겠지.’
연락을 끊자마자 궁내성 장관의 통신구로 짧은 문서를 보냈다.
장관 서열 1위인 궁내성 장관조차 아무것도 모르는 기색을 풍기면 다른 장관들이 궁내성 장관의 권위에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일평생 나를 모실 행정부 파트너에게 그런 족쇄를 채울 수는 없는 노릇. 내가 신임 황제인 것처럼 현 궁내성 장관도 신임 장관이니, 권위를 세워줄 수 있을 때 세워주는 것이 맞다.
‘권위라.’
통신구를 다시 책상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권위, 좋다. 막강한 권위는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들고, 부족한 권위는 정당한 권력도 무너지게 만든다. 그것이 권위의 힘.
그리고 세계수의 부활은 명백히 내 권위에 도움이 되는 사건이다. 천명을 잃은 아펠스 시기에 불탄 세계수가 크펠로펜 제국 시기에, 내 재위 기간에 부활했다. 천명이 제국과 황실에 있음을 보인 것이다.
‘좋은, 일이다.’
그래서 참았다. 결혼을 한다며 떠난 주제에 세계수를 부활시킨 장관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목 끝까지 치솟는 험한 소리를 필사적으로 참았다.
장관이 결혼식을 위하여 이종족 보호 구역에 있는 날, 그날에 세계수가 부활했다? 남들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난 아니다. 장관이 간 곳에 사고가 터진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장관이 범인이다.
그놈은 그런 놈이다. 내가 그놈을 하루 이틀 보나.
‘…빌어먹을.’
결국 이가 갈렸다. 본인은 신혼 휴가로 도망치는 주제에, 아직 한 살도 안 된 딸이 있는 나한테 이런 일을 떠넘겨?
두고 보자, 장관이 첫아이를 낳아도 자비 없이─
‘음?’
속으로 단호하고 확실한 응징을 다짐하는 사이, 통신구가 짧게 진동했다. 누군가 문서를 보낸 듯하다.
“호오.”
빠르게 내용을 확인하자 절로 감탄이 나왔다.
[ 소신이 비록 신혼이오나, 제국과 대륙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사안에 어찌 개인의 사유를 언급하겠나이까. 속히 제도로 복귀하여 폐하의 근심을 덜어드리는 것에 조금이나마 손을 보탤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장관의 자발적 휴가 연기 및 항복 선언이었다.
감탄스럽다. 본인의 미래에 먹구름이 끼자마자 본능적으로 회피하다니. 장관의 본능은 실로 짐승과도 같았다.
‘휴가 연기는 어쩔 수 없지.’
그래, 소란을 싫어하는 장관이 고의로 세계수를 부활시켰을 리는 없다. 다 사정이 있었겠지. 아니, 애초에 신의 일에 어찌 일개 인간이 개입했겠나.
장관도 피해자다. 피해자끼리 서로 미워하는 건 옳지 못하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결혼식 피로연까지 마치고 서둘러 황궁으로 향했다.
결혼하자마자 신부를 방치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지만, 다행히 트릭시도 마탑주라는 공무원. 같은 공무원인 내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무사히 돌아오라는 배웅까지 해주었다.
그런 트릭시에게 휴가를 기대하라는 말을 남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필 내가 없는 사이에 장관 소집령까지 떨어졌었다고 하니, 여기서 늦으면 늦을수록 황제에게 들어야 할 말이 늘어난다. 아마 지금도 나에게 떠넘길 업무를 실시간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그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세계수를 선물로 줬는데.’
문득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세계수다. 아펠스의 천명 상실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세계수가 본인 재위 기간에 부활한 것이다. 그런 선물을 준 신하라면 세상에 둘도 없을 충신 아닌가? 왜 내가 눈치를 봐야 하지?
물론 개소리다. 내가 황제인데 내 재위 기간에 세계수를 부활시킨 신하가 있다? 나였어도 이득과 별개로 빡쳤을 거다. 솔직히 상황 즉위 초처럼 권위가 절실한 상황도 아닌데, 안 해도 될 업무를 상사한테 짬 때린 거잖아. 공에 대한 포상은 주겠지만 곱게 주지는 않을 거다.
‘망했네 이거.’
소름 돋는 역지사지를 마치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부디 황제가 자비로운 처우를 내리기를.
이미 장관들은 각자의 부서로 돌아갔는지 태양전에는 황제만 남아있었다.
두렵다. 다른 장관들도 있다면 황제의 관심이 분산됐겠지만, 애석하게도 나 혼자 남았다면 황제한테 단독으로 쪼여야 한다.
“장관 왔는가.”
“예, 폐하. 이제야 폐하를 뵙는 무례를 용서하소서.”
덤덤한 황제의 말에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용서라니. 막 결혼식을 마친 장관이 이렇게 온 것만으로도 그 충성심을 증명한 것인데, 짐이 어찌 장관을 탓하겠나.”
그 말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느긋하게 신혼 휴가를 즐겼다면 사지를 찢었을 거라는 말 같았으니까.
‘양심이 살렸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계수 부활 사태로 고생할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휴가를 연기한 건데, 만약 양심을 따르지 않고 버텼다면 황제에게 뚝배기가 깨진 채 강제 출근했을 거다.
정말 다행이다. 자발적 출근과 강제 출근은 많이 다르지, 아무렴.
“그보다 온 김에 얘기 좀 해보게. 세계수야 근본은 나무니 그렇다 치고, 정령들은 어떻게 생겼나?”
그런 나를 보며 픽 웃음을 흘린 황제는 상석에 앉더니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분명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에서 살아간 존재들이나, 오늘날 정령들은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지. 장관이 그런 정령들을 가장 먼저 목도한 것이 부러울 지경이야.”
“모두 천명을 올바르게 수호하신 황제 폐하의 덕 아니겠습니까. 하늘이 감동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기적은 없었을 겁니다.”
일단 듣기 좋은 말을 내뱉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돌려 까는 말 같지는 않다. 황제 성격상 돌려까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더욱 다채롭고 화려한 말을 할 거다. 고작 저런 식으로 압박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다는 건데…
‘해탈했구나.’
세계수 문제로 머리를 싸맨 끝에 해탈한 거다. 어차피 과로는 확정이니 즐기는 단계에 돌입했어.
“기적이라.”
내 답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적이지.”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자 불안감이 솟구쳤다. 뭐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애초에 황제가 즐기는 단계에 돌입했다는 것 자체도 이상한 일이다. 저놈은 인성과 반비례하는 능력과 지능을 가졌고, 인생의 매운맛도 진하게 경험한 놈이다. 그런 만큼 어지간한 사건에는 미간을 찌푸릴지언정 무난하게 처리하는데, 이미 작년부터 대비하고 있던 일 때문에 해탈했다고?
‘뭔가 있다.’
황제도 정신을 놓게 만든 무언가가.
“장관.”
“예, 폐하. 하명하소서.”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타국 출장 좀 다녀와야겠어.”
“…예?”
그리고 예상치 못한 명령에 얼빠진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니, 갑자기 타국 출장이라니. 아무리 내가 신혼 휴가를 연기했다지만 나름 신혼인─
“교황이 전 대륙에 있는 추기경들을 소집했네. 현재 무슨 업무를 진행하고 있든 중단하고, 즉시 신성교국으로 집결하라는 명이었지.”
…
“공의회입니까?”
“그래. 안 그래도 기회만 보고 있던 교황이 세계수 부활이라는 명분을 놓쳤겠나. 정보를 접하자마자 개회를 선언했지.”
그 말에 황제가 해탈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걸 진짜 열었네.’
조금 놀랐다. 세계수 부활과 콘스탄티나의 재강림이 여명 교단의 공의회로 이어질만한 기적인 건 맞다. 그러나 ‘공의회가 열릴만한 사안’과 ‘실제로 여는 것’은 차이가 크다.
현 교황은 교단의 대대적 개혁을 꿈꾸는 진보 성향 인사다. 그렇기에 호시탐탐 공의회를 개최할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으나, 공의회는 교단 역사에서도 몇 번 없던 대형 이벤트 겸 교단의 가치와 정체성이 격변될 수준의 일. 보수적 성향을 지닌 추기경들의 필사적 반대로 무산되고 있었다.
그렇게 일생의 숙원이 번번이 좌절된 교황은 이’공의회가 열릴만한 사안’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 공의회를 통해 콘스탄티나라는 이신의 위치와 세계수의 가치를 재정립하겠다더군. 유일신 에넨을 섬기는 여명 교단으로서 콘스탄티나라는 이신을 섬길 수 없으나, 세계수를 내린 신을 배척하기도 어렵지.”
이윽고 뒷목을 매만진 황제는 다소 피곤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교황이 공의회의 참고인 자격으로 장관을 초청했네.”
환장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