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98)
로판 속 공무원 498화(499/945)
공의회. 여명 교단의 추기경급 고위 사제들과 명망 높은 신학자들이 모여 교단의 교리와 규범, 미래를 논하는 회의.
대륙 주류 종교이자 각국의 국교나 마찬가지인 여명 교단인 만큼, 교황이 공의회 개회 가능성을 언급하기만 해도 대륙의 관심이 주목된다. 그야 교단 수뇌부가 한자리에 모여 양보 없는 막고라를 벌이는 것이 공의회이지 않나. 관심이 안 가면 그게 더 이상하지. 오죽하면 공의회는 세속의 전쟁도 멈춘다는 말까지 있겠는가.
그만큼 공의회의 권위는 막강하다. 가장 최근에 열린 공의회가 아펠스에서 크펠로펜으로 제국이 교체되고, 제국력이 아닌 성력이 도입된 시절이었을 정도로 대륙의 역사, 교단의 역사가 급변하는 시기에만 열리는 것이 공의회다.
그렇기에 공의회 개회가 확정되면 대륙의 정계와 외교계는 침묵한다. 지금까지의 상식과 관례는 공의회를 기점으로 무너지기 때문에. 아무리 세속에서 반석 위의 성을 쌓더라도, 공의회의 결과는 성이 아닌 반석 자체를 없애버리기 때문에.
“짐의 재위 기간 때 세계수가 부활하고 공의회까지 개최되다니. 남들이 할 수 없는 경험은 전부 하고 가는군.”
그래서 황제가 해탈한 듯한 표정으로 저런 푸념을 중얼거리는 거다. 작년부터 세계수 부활을 대비하고, 장관들을 소집해 향후 대책을 지시하면 뭐 하나. 교황이 공의회를 선언한 덕분에 모든 준비가 쓰레기로 돌변했는데.
‘이건 어쩔 수 없지.’
황제와 교황이 대등한 존재라도 신과 얽힌 문제라면 교황에게 우위를 양보할 수밖에 없다.
막말로 황제가 세계수의 부활과 콘스탄티나의 재강림을 ‘에넨의 가호와 천명의 굳건함을 상징.’이라고 홍보했는데,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나는 우상이고 세계수는 그냥 큰 나무다.’ 라는 결론을 내리면 황제는 에넨의 총애를 받는 군주에서 이교도 대추장이 되는 거니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됐네. 신혼인 장관을 타국으로 보내는 건 짐도 마음이 편치 않으나, 다른 것도 아닌 공의회가 명분이니 원.”
“부부의 시간은 언제라도 보낼 수 있지만, 공의회는 수백 년 만에 찾아온 대륙의 대의 아니겠습니까. 심려치 마소서.”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순순히 가겠다는 선언에 황제의 표정이 미약하게나마 밝아졌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민망하지만, 마종공과 함께 가는 건 어떻겠나? 마종공도 세계수가 부활하는 자리에 있었고, 엘프 장로의 피를 이은 입장 아닌가. 교황도 반기면 반겼지 꺼리지는 않을 거야.”
“폐하의 따스한 지혜에 황송스러울 따름입니다.”
황제의 제안에 고개를 숙였다. 말이 참고인으로 가라는 거지, 우리가 괜찮다면 신혼여행 간다 생각하고 부부가 나란히 신성교국으로 가라는 말이었으니까.
이건 황제에게도 어마어마한 배려다. 공작이자 제도 방위의 핵심인 트릭시를 잠깐이나마 제국 밖으로 보낸다? 어지간한 각오가 아닌 이상 결정하기 힘든 일이다.
‘신혼여행이라.’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썩 나쁘지는 않다.
아니, 나쁘지 않다 생각하기로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신혼여행─ 이라는 이름의 출장 준비를 위해 출근하고 2시간도 지나지 않아 퇴근했다.
이 유례없는 광속 퇴근에 눈만 깜빡이던 연인들을 모아 사정을 설명했다. 공의회 참고인으로 초청되었으니 조만간 신성교국에 가야 한다고.
“시복식 때도 교국에 가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가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 평생 갈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당혹스럽다는 듯 중얼거리는 마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무려 생전 시복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 때도 신성교국에 발을 딛지는 않았는데, 시복식을 아득히 능가하는 대형 사건이 터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대륙인 중 자기가 살아있을 때에 공의회가 열릴 거라 짐작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심지어 단순히 열리는 걸 넘어, 남편이 교황에게 참고인으로 지목당했다. 이건 예상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래도 신학적 토론을 위한 참고인이 아니라 단순한 현장 증명을 위한 참고인이니, 가도 별일은 없을 거라 하더라고.”
일단 조금 굳어버린 분위기를 풀기 위해 긍정적인 말을 꺼냈다. 공의회 개회와 참고인 초청이 의외인 일은 맞으나, 그렇다고 욕이 절로 나오는 변수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내가 주도적으로 뭔가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앉아있다가 물어보는 거에 대답만 하면 되는 거거든. 타국까지 간다는 게 귀찮을 뿐, 힘들거나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내가 나름 복자인데 가면 잘 대접해 주겠지. 너무 걱정하지는 마.”
덤으로 차기 성자가 내 담당 학생이다. 만약 시비를 걸거나 귀찮게 하는 사제가 있으면 역으로 털어버릴 수단은 충분하다.
애초에 교황이 부른 손님한테 시비를 걸 정도로 정신 나간 인간이라면 사제가 되지도 못했겠지만.
“그럼 오빠. 공의회에 참석할 때는 박람회 때 받은 옷을 입고 가면 어때요?”
“박람회 때?”
린의 말에 지금쯤 옷장에 잠들어있을 흰색 의복을 떠올렸다.
확실히 좋은 생각이다. 평소에는 감찰부 제복만 입고 다녀서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신성교국이 준 선물을 입고 신성교국에 가면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겠지.
‘받은 건 난데.’
그런데 조금 민망하다.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에게 시복 기념 선물을 받았던 당시, 린은 동아리 부스에서 활동하느라 그 광경을 직접 보지 못했다. 나중에 전해 들은 사람도 기억하는 걸 당사자가 까먹고 있었어.
“흰색 옷이 조금 낯설긴 하지만… 그게 좋겠지?”
“당연하죠. 이참에 다른 옷도 좀 입어봐요. 맨날 검은 것만 입고 다니고.”
린의 핀잔에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검은색 옷이 뭐 묻어도 티가 나지 않아 편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타이밍에 그런 말을 해봤자 구박만 받겠지.
“아.”
그 와중에 리제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나지막한 탄성을 냈다.
“오라버니가 신성교국에 가면 에리 언니랑 피네 언니는 다음에 만나는 거예요?”
양심을 관통하는 말이라 본능적으로 흠칫하고 말았다.
그러네. 난데없는 해외 출장에 정신이 팔려서 그걸 잠시 잊고 있었네.
‘서운해할 텐데.’
감찰성 창설이 코앞으로 다가올수록 에리와 피네의 업무도 폭증했다. 덕분에 트릭시와의 결혼식 때도 겨우 얼굴을 비칠 정도로.
그래도 내 신혼 휴가에 맞춰서 겨우겨우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는데, 정작 내가 트릭시와 함께 신성교국으로 떠나게 생겼다. 안 그래도 보기 힘든 애들을 엿 먹이는 꼴이지.
“…당장 가는 것도 아니니까, 가기 전에 내가 먼저 찾아갈게.”
그 말과 함께 슬쩍 트릭시를 쳐다봤다.
어쩐지 단둘이 신성교국으로 가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도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는데, 에리랑 피네한테 미안해서 그런 거였구나. 연장자라 그런지 너무나 깊고 아름다운 배려심이다.
애석하게도 귀는 배려심과 별개였는지 아까부터 심하게 파닥였지만 못 본 걸로 했다.
***
“성하,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면 세계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대규모 미사 정도로 수습할 수 있습니다.”
수석 추기경의 절실한 부탁에 눈을 감았다.마음이 다급했는지 평소 신중한 수석 추기경답지 않게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늦지 않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미 온 대륙에 공의회 개회 선언이 울려 퍼졌다. 대륙 각지의 추기경들은 하나둘 입국하고 있고, 추기경의 대규모 이동에 각국의 지배층도 일제히 침묵했다.
이 상황에서 공의회 개회를 취소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교황의 선언은 한낱 허풍이 되고, 무겁고 드높아야 할 공의회의 이름은 땅에 떨어진다.
그럼에도 비서성 성장이기도 한 수석 추기경이 공의회 취소를 간언하는 건 교황의 이름과 공의회의 권위가 추락하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교단은 나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한 수술로 피를 쏟아 죽을 바에는, 잠시 치욕을 감수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번 공의회가 줄 충격보다는 차라리 권위 손상이 나을 거라는 판단에 막아서는 것이다.
안타깝다. 한때 교단의 개혁을 꿈꾸었던 수석 추기경이다. 전대 교황을 존경하며 언젠가 교단을 바꾸겠다고 당당하게 외치던 수석 추기경이다. 그러했던 수석 추기경이 나이를 먹고, 직위가 높아지며, 더욱 넓게 현장을 보게 되었으나─ 그세월은 열정 넘치던 사제가 현실과 타협하는 정치가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것이 그릇되었다는 건 아니다. 현실을 보지 않고 무작정 이상만을 추구하는 건 교단을 망치는 일이요, 현실과 타협했다는 건 아직 꿈을 품고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말이기도 하니.
그래서 내가 나선 거다. 교황의 지시를 받는 수석 추기경은 현실과 타협해도 된다. 허나 주의 종들의 종인, 가장 마지막에 천상에 도달해야 할 자가 현실에 고개 숙여서는 안 된다.
교황만은, 오직 교황만은 태양을 바라봐야 한다. 설령 그 끝에 눈이 멀더라도, 훗날 우리의 주 앞에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수석 추기경.”
“예, 성하.”
내가 입을 열자 수석 추기경은 깊숙이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희미한 기대가 섞인 표정을 보자 쓴웃음이 나왔다. 누군가의 기대를 부순다는 건 몇 번을 겪든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다.
“모든 공은 우리의 주께서 안배하심이요, 과는 종의 실수일지니.”
“성하…”
“하늘 아래 교단을 향한 모든 원망과 증오는 이 늙은이가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했다. 더 이상 설득의 여지를 두지 않은 말에 수석 추기경도 침통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수석 추기경이 물러났다. 공의회 취소가 불가능하니 공의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하여 움직이려는 모양이다.
미안하고도 고마울 따름이다. 역시 수석 추기경에게도 과거에 품었던 열정이 남아있었다.
‘내가 쓰러져도 그대가 이어나가겠지.’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실패하더라도 내 꿈은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선배들을 보며 개혁의 꿈을 키웠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원망과 증오를 짊어진 채 죽더라도 웃으며 갈 수 있다. 내가 짊어진 만큼 교단은 변화할 시간을 얻을 수 있다. 새로운 개혁가들의 등장을 기다릴 수 있다.
‘지금 성공하는 게 최선이기는 하지만.’
책상에 올려둔 서류를 집어올렸다.
선배들이 꿈꾸었던 이상이, 내가 후배들에게 현실로 물려줘야 할 것들이 적힌 교황의 짐을.
[ …각국의 미사는 해당국의 사제가 해당 지역의 문화를 고려하여 진행하며, 신성교국은 미사가 교리와 어긋남이 있는지를 감독하고 그 이상 관여해서는 아니된다.여명 교단이 종교 전쟁 시절 행한 일체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며, 급진적이고 과격한 행동일 경우 해당 신앙 공동체의 후손에게 정식으로 사죄하고 배상한다.
우리의 주는 오직 에넨임을 잊지말되, 이교의 긍정적 기능을 인정하고 배려한다.
믿음과 선함이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
… ]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사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