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99)
로판 속 공무원 499화(500/945)
신성교국으로 떠나기 직전.
“와, 연인 버리고 혼자 도망가는 부장님이다!”
“이왕이면 도망이 아니라 출장이라고 해줘…”
졸지에 유기 위기에 처했던 에리와 피네를 달래기 위해 감찰성 청사로 이동했다.
출국을 코앞에 두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건 다소 부담이 되는 일이나, 이건 무조건 거쳐야 하는 절차다. 만약 지금 당장 출국해야 했다면 어떻게든 출국 시간을 연기해야 했을 정도로.
‘하필 이 타이밍에 이런 일이.’
씁쓸하다. 저택에 상주하고 있는 마르, 나와 함께 출퇴근하는 트릭시, 동아리 시간에 만날 수 있는 리제, 린과 달리 에리와 피네는 업무에 시달리느라 나와 자주 만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방학─ 정확히는 내가 24시간 저택에 머무를 수 있는 신혼 휴가를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신혼 휴가를 쓰기는커녕 아예 제국을 떠난다고 한다. 이날만을 기다리며 버틴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다 못해 억울하겠지.
“그리고 혼자 가는 게 아니라 트릭시랑 가는 거야.”
“그게 더 문제죠! 우리는 방치한 주제에 트릭시 언니만 챙기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볼을 부풀리는 에리. 누가 봐도 일부러 과장된 행동을 취하는 것이지만 지은 죄가 있기에 웃어넘길 수 없었다.
저게 농담이든 과장이든 무슨 상관이야. 진짜 둘을 버리고 튀는 건 맞잖아.
“에리, 주인님이 놀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
더욱 마음 아픈 건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나를 변호하는 피네였다. 차라리 에리처럼 불만을 표하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는데, 서운함조차 보이지 않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보통 친구는 닮는다고 하지 않나? 피네가 에리의 1할만 닮았으면 여한이 없겠다. 그럼 감정 표현도 더 솔직해지고, 자신이 피해를 보면 당당히 항의도 하겠지.
물론 1할보다 높아지면 좀 곤란하겠지만.
“아무리 일 때문이라도 너희랑 같이 있을 시간이 사라진 건 맞잖아. 이건 화낼 일이 맞아.”
일단 피네의 말을 부정하며 조심스레 에리를 껴안아 등을 토닥였다.
괜히 의견 충돌로 인해 둘 사이에 말다툼이라도 생기면 더욱 면목이 없어진다. 잘못한 건 난데 피해는 둘이 보는 꼴이니까. 디바이드 앤 룰도 아니고 연인들 사이에 분탕질을 쳐서 위기를 모면할 생각은 없다.
사실 나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신성교국에서 공의회니 뭐니 소란을 일으켜서 이렇게 된 거지만, 공의회 계기를 되짚어 올라가면 내가 있으니 신성교국만 원망하기도 애매하지.
“미안해. 그래도 내년부터는 너희랑 같이 지낼 수 있으니까 봐줘.”
“그럼 내년부터는 저랑 매일매일 야근해요.”
그 말에 에리의 등을 토닥이던 손이 멈추고 말았다.
매일 야근이라니, 그건 너무 심한 말 아니니? 졸업을 목전에 둔 대학생에게 ‘더 공부해 볼 생각 없나?’ 라는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폭언 같은데.
“부서 창설 직후면 장관님도 바쁠 거 아니에요! 나랑 같이 야근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어느새 부장에서 장관으로 변경된 호칭을 들으며 침통히 눈을 감았다.
내가 죄인인 건 인정하지만 잔인한 발언이다. 지금까지 꼬박꼬박 부장님이라고 부른 주제에 이제 와서 장관님이라고 하다니. 내년부터 신나게 구를 내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것 같아 눈물이 나올 뻔했다.
결정적으로 나를 부장이라 부르던 감찰부 간부마저 장관이라는 호칭을 입에 담으니, 뭔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분이다. 이미 그런 강은 진작에 넘었음에도.
“야근보다는 빨리 퇴근하고 집에서 노는 게 좋지 않을까?”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럼 그러죠 뭐.”
그러자 에리는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당황스럽다. 끔찍한 미래를 눈 앞에서 흔들며 정신을 뒤흔들 때는 언제고, 갑자기 시원하게 넘어가다니.
“진짜 미안해하는 것 같으니까 봐드리는 거예요!”
그러한 심정을 읽었는지 에리는 히히 웃으며 내 품을 빠져나갔다.
“평소라면 뭔 개소리를 하냐고 머리부터 쥐어 박았을 텐데, 말로 설득하려고 했잖아요.”
터무니없는 음해라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내가 언제 머리를 때렸다고 그래. 잘못 건드리면 터질까 봐 꿀밤 마려워도 이 악물고 참았는데.
“고맙다…”
그래도 용서받기는 했으니 넘어갔다. 내년부터는 미안할 일도 없으니 두고 보자.
“저, 주인님.”
그렇게 에리의 용서를 받자마자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피네가 슬쩍 소매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내 사정을 이해하고 변호해 주는 것도 모자라, 에리의 화를 풀어주는 것까지 묵묵히 기다려줬다. 그런 인내와 배려를 보이고도 한다는 것이 고작 소매 잡기? 나한테도 아픈 손가락이 있다면 피네겠지.
“내가 피네하고는 야근할 수 있어.”
농담 같은 진담과 함께 피네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피네는 에리보다 튼튼하니 이 정도는 괜찮을 거다.
“…….”
“피네?”
그런데 이상하다. 사소한 스킨십에도 어마어마한 리액션을 보이던 피네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피네가 스킨십에 내성이 생긴 건 맞지만, 그렇다고 포옹에도 덤덤할 정도로 무감각해진 건 아니다. 혹시 화가 나서 이러는 건─
“흐읍!”
당차고 귀여운 기합 소리와 함께 입술에 무언가 닿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얇은 실선과 함께 무언가가 떨어졌다.
“주, 주인님이… 저희가 화낼 일이 맞다고, 하셔서…”
마르의 머리와 좋은 승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붉게 변한 얼굴,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냘프게 떨리는 눈동자.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우와…”
에리의 나지막한 감탄사가 내 마음을 대변했다.
‘세상에.’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닌 피네가 이렇게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다니. 그동안의 노력이 헛된 건 아니었구나.
“당연히 괜찮지.”
그렇기에 최대한 밝은 미소로 대답했다.
장하다 우리 피네. 앞으로도 이런 모습만 보여주렴.
“나! 나도 할래요!”
그 와중에 에리가 등 뒤에서 온몸으로 태클을 걸었다.
하마터면 출장을 앞두고 허리가 나갈 뻔했다.
신성교국까지는 편하고 안전한 텔레포트로 이동했다.
비록 신성교국의 중심지에는 텔레포트를 차단하는 성법이 시전 되고 있어 근처 항구를 도착지로 삼아야 했지만, 항구에서 중심지까지는 걸어서도 오고 갈 수 있는 거리라 귀찮지는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신성교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작 마중을 위해 나온 인사 때문에 좀 귀찮아질 것 같았다.
“설마 차기 성자가 반겨줄 줄은 몰랐는데.”
“복자께서 그 부인과 함께 오시는데, 어찌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하겠습니까.”
빙그레 미소를 짓는 타니안을 보니 쓴웃음이 나왔다.교황이 공의회 참고인으로 정식 초청한 만큼 고위 인사가 마중을 나올 거라 예상하기는 했으나, 냅다 차기 성자를 보낸 건 너무 과한 의전이 아닐까 싶다.
타니안이 내 담당 학생이자 개노답 부원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서 그렇지, 신성교국을 넘어 대륙적으로도 성자의 위상은 어마어마하다. 오죽하면 교황과 성자는 관례상 확고한 상하관계가 아닌 상호 존중이겠나. 비록 ‘차기’라는 딱지가 붙었지만 타니안이 성자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기도 하고.
‘참고인이라며.’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세계수가 부활하는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라 참고인으로 부른 거라 들었는데, 의전을 보면 나에게 단순 증언만을 바라는 것 같지가 않다.
물론 순수한 호의로 타니안을 붙인 것일 수도 있다. ‘난데없이 타국에 온 나를 배려하여 그나마 친한 타니안을 붙인 것.’ 이라는 행복 회로를 돌릴 수도 있다.
헌데 무려 공의회라는 대형 이벤트를 터뜨린 교황이다. 가지고 있는 패 하나하나를 알뜰하게 써야 하는 교황이, 고작 호의를 베풀기 위하여 성자라는 카드를 나한테 배정했다?
‘말도 안 되지.’
그렇게 순수한 사람이라면 교황이 될 수가 없다. 분명 뭔가가 있다.
“우선 마차에 타시지요. 교황 성하께서도 형제님과 자매님을 보고 싶어하셨습니다.”
“그거 영광이군. 어느 귀족이 교황의 초청을 받아 대면할 수 있겠나.”
일단 타니안의 안내에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교황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그렇기에 튀는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잠잠해야 한다.
***
한숨을 내쉬며 통신구를 내려놓았다.
– 고문 형제님과 마종공 자매님이 도착했습니다.
두 참고인을 맞이하기 위해 나갔던 타니안에게서 둘의 입국을 확인받았으니까.
‘이제 시작이다.’
아직 공식적으로 공의회가 열린 것은 아니나, 두 참고인─ 정확히는 복자 타일글레헨 백작이 입국한 순간부터 공의회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신성교국에 입국한 추기경들도 소식을 접하고 빠르게 머리를 굴리겠지.
타일글레헨 백작은 단순한 참고인이 아닌 여명 교단의 복자다. 설령 추기경이라도 살아있는 복자에게는 존중을 표해야 하며, 누구도 그가 주의 총애를 받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세계수의 부활을 목도하였으며, 북방 유목민 출신 귀족들의 수장이기도 하다. 주가 아닌 다른 신과도 연이 깊은 것이다.
‘존재 자체가 변수.’
그래, 존재 자체가 변수인 사람이다. 신앙에 대해 토론하면 반드시 언급할 수밖에 없고, 누구도 명백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 시대에 살고 있다. 타니안의 동아리 고문을 맡고 있다. 실로 절묘하고도 공교로운 일 아닌가.
‘…주께서 안배하심이라.’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다음 서류를 집었다. 수석 추기경으로서 교황 성하를 설득하지 못하였으니, 비서성 성장으로서 성하의 뜻을 실현해야 한다.
때문에 제자인 타니안까지 동원했다. 당연히 교황 성하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만약 이번 공의회가 실패하면 그 여파는 타니안에게도 향할 것이다.
“그것이 옳다면 어찌 개인의 안위를 걱정하겠습니까.”
‘건방진 녀석.’
이윽고 타니안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픽 웃음이 나왔다.어리고 철없던 녀석이 머리가 좀 커졌다고 이 스승을 위로하고 있다. 이 얼마나 건방진 일이란 말인가.
애초에 이 세상 어느 어른이 아이에게 위로를 받겠는가. 이 세상 어느 스승이 제자의 희생을 방관하겠는가.
‘있을 수 없지.’
공의회가 실패하면 내 부탁으로 움직인 타니안에게도 피해가 간다. 그것이 당연한 순리다.
허나 이 공의회가 어디 순리를 따르기에 열린 것이던가. 순리라고 생각한 것을 부수기 위해, 진정으로 옳은 것을 위해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타니안에게 가야 할 피해도 내가 감당하는 것이 진정으로 옳은 것이다. 제자를 위해 스승이 방패가 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차기 성자가 정치적 피해를 감당하는 것이 순리라면, 나 역시 순리를 부수고 그렇게 하리라.
‘…공의회가 성공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최선을 가정하는 것보다는 최악을 가정하는 게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