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00)
로판 속 공무원 500화(501/945)
타니안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교황의 집무실은 생각보다 소박했다.아니,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작고 아담한 편에 속했다.
덕분에 신성교국에 오자마자 문화의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다. 세속의 군주와 귀족들은 자신의 성이 드높고 화려할수록 권위와 권력을 과시할 수 있다 여기나, 정작 황제와 대등한 존재라는 교황은 잘 쳐줘야 부유한 평민 수준의 집무실에서 지내고 있다.
‘검소해서 이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현 교황이 검소한 성격이라 아담한 공간에서 지내는 거라면 그러려니 넘어가겠지만, 이 집무실은 역대 교황들이 사용한 역사 깊은 곳이라고 들었다. 개인의 성향이 아닌 교단의 전통이 담긴 것.
‘과시할 필요가 없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혈연으로 모든 걸 계승하는 푸른 피와 달리, 교황이나 추기경은 철저한 능력 위주 선발이다. 굳이 과시하지 않아도 자신의 존귀함을 만인이 알고 있으니, 집무실쯤이야 작고 소박해도 상관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경이로움마저 들었다. 자신감에서 나오는 소박함이라. 괜히 과하게 치장하는 것보다 훨씬 멋지네.
“귀한 분들이 오셨군요.”
아무튼 우리가 오자 자리에서 일어난 교황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왔다.
“마음 같아서는 이 늙은이가 항구에서 맞이하고 싶었으나, 근래 이래저래 바빠서 말입니다. 덕분에 복자를 앉아서 맞이하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성하께서 바쁘신 건 주께서 알고 온 대륙이 아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리 성하를 뵙는 것으로도 영광일 따름입니다.”
심상치 않은 인사에 떨리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며 마주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만약 교황이 정말로 항구까지 나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무례다.과한 의전은 상대의 정신력을 갉아먹는 무자비한 무례야…
“역시 복자께서는 마음씨가 따스하시군요. 실로 주님의 가르침대로 사시는 분 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웃음을 터뜨리는 교황을 보며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기는 무슨.’
내가 마지막으로 교회에 간 게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한데.
물론 교황도 의례적으로 한 말일 테니 굳이 그런 말을 꺼내 분위기를 망치지는 않았다. 지금은 중요한 것은 교황이 나와 트릭시를 대면하고 있는 상황, 그 자체니까.
“자매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양위식 이후로 처음이지요?”
“벌써 1년 전의 일이군요. 성하께서도 그간 안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나와 간략히 인사를 나눈 교황은 트릭시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정중히 목례를 했다.
‘목례라.’
슬쩍 트릭시에게 시선을 돌리니 트릭시도 교황이 작게나마 고개를 숙인 모습에 철저히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뭔가 있다. 단순히 연장자이자 마법계 거두를 향한 예의일 수도 있으나, 교황이라는 신분을 생각하면 그건 ‘꼭 차릴 필요는 없는 예의.’에 속한다. 그럼에도 먼저 고개까지 숙였다면 우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예정이라는 뜻.
“두 분은 이제 제가 대접할 터이니, 타니안 형제님은 이만 돌아가 보셔도 좋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예, 성하.”
교황의 말에 타니안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아, 귀한 분들을 너무 오래 세워두고 있었군요. 편히 앉으시지요.”
그리고 교황은 웃는 얼굴로 우리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눈빛만은 형형히 빛난 채로.
“감사합니다, 성하.”
그 눈빛을 보고 직감했다. 아무래도 교황이 우리를 초청한 진짜 이유를, 타니안을 안내역으로 붙이며 화려한 의전을 보인 이유를 들을 수 있겠다고.
…그건 그렇고 만나자마자 본론이라니, 나야 편하기는 하지만 좀 당황스럽다. 보통 은근히 탐색전을 벌인 다음에 본론을 꺼내는 게 정석이지 않나? 나이가 많고 직위가 높을수록 정석에서 벗어나는 걸 본 적이 드문데.
‘신성교국도 힘들겠어.’
그 파격적인 행보에 신성교국의 고통을 얼핏 직감할 수 있었다. 연륜과 능력을 두루 갖춘 상사가 파격적이기까지 하면 부하가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신성교국의 사제들에게 애도를 표할 뿐이다.
공의회는 제5차 에네스티예 공의회라는 이름으로 성 토그라 대성당에서 개회되었다.
“온 대륙과 모든 민족에게 주의 따스한 광명이 비치니, 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미천한 종들은 주의 고귀하신 뜻을 경배하며 사랑과 평화, 구원의 기치를 널리 퍼뜨리고자 노력했습니다.”
성 토그라 대성당에 마련된 대회의실, 그중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교황은 경건한 표정으로 개회사를 읊었다.
“허나 영원불멸하고 완전무결한 주의 뜻과 달리, 이 미천한 종들은 너무나도 부족하여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주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하여 다시금 변화를 해야 할지니, 172대 교황 발트사크 37세의 자격으로 공의회 개회를 선언합니다.”
그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던 교황과 추기경, 신학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성호를 그었다.
“거룩하신 뜻에 가까워지기 위하여, 주 앞에 숨김없고 솔직할 것을 맹세합니다.”
“””거룩하신 뜻에 가까워지기 위하여, 주 앞에 숨김없고 솔직할 것을 맹세합니다.”””
300에 가까운 인원이 일제히 신 앞에 맹세를 하는 광경은 신앙심이 낮은 내가 봐도 성스러웠다.
…그래, 분명 성스러웠는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27대 교황이신 마텐 4세께서는 미사의 가르침은 티끌만큼의 왜곡도 없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각 지역의 문화를 고려한다고요? 말이 좋아 문화 존중이지 결국 지역마다 다른 가르침을 내릴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건 각지에 퍼진 교구가 원활한 소통이 불가능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마법과 기술의 발전은 대륙을 하나로 묶었고, 문화의 존중이 가르침의 왜곡으로 이어지는 걸 즉각 파악하여 방지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78대 교황이신 제르니시오 8세께서도 변화 없는 가르침은 교단의 정체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라고 우려를 표하셨습니다!”
서로 삿대질을 하며 고성을 내지르는 건 기본.
“급진적이고 과격한 행동에 대한 사과? 그게 필요합니까? 물론 현재의 기준으로 당시의 행동을 바라보면 다소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무시하는 건 너무 성급한 행동입니다. 종교 전쟁 시기는 피와 힘으로서 질서가 유지되었고, 저희가 이교를 무력으로 제압한 것은 특이한 것이 아닌 당연한 행동이었습니다.”
“당시의 행동이 시대상 당연하고도 어쩔 수 없다는 건 인정합니다. 허나 그 당연함이 당대로 끝났습니까? 그때 피를 동반한 승리는 우리의 기반이 되었고, 그 기반을 토대로 교단은 지금까지 나아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교의 후손에게 과도한 배척과 탄압을 가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가했다고 문제가 됩니까? 이교의 후손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교단에 무수한 테러를 가하였습니다. 교단의 안정과 신도들의 평온을 위한 부득이한 선택은 잘못이라고 할 수 없지요. 혹 이교의 문화를 연구하시더니, 이교에 심취하셔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시는 겁니까?”
“뭐요?”
‘너 이교냐?’라는 종교적 패드립은 덤에.
“야 이, 너 사제 학교 몇 기야 이 새끼야!”
“허, 그 나이 먹고 후배들과 동급인 게 자랑이신가?”
어느 순간부터 쌍욕과 비아냥까지 오고 갔다.
‘뭐야 시발.’
공의회라며. 이건 공의회가 아니라 지옥에 온 것 같잖아.
혼란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레 옆에 있던 트릭시의 손을 잡았다. 사랑하는 아내와의 스킨십조차 없다면 도저히 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
“칼, 혹시 요즘 미사도… 다 저런 식이니? 난 교회에 간 지, 조금 오래돼서…”
다행히 트릭시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내 손을 거부하지 않은 채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나도 이해 못 하겠어.”
그런 트릭시를 향해 최대한 따뜻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도 지금 저 광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그게 정상입니다. 사실 저도 저 광경을 보면 가끔씩 놀라거든요.”
그 와중에 저 인외마경 속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있던 타니안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더욱 혼란스럽다. 나름 차기 성자라는 녀석이 놀고 있어도 되는 건가? 저 지옥에 몸을 던져 자신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한 시선을 느꼈는지, 타니안은 픽 웃음을 흘리며 우리 옆에 앉았다.
“개회식 때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주 앞에 숨김없이 솔직하겠다고요. 그래서 체면이나 예의를 따지지 않고 저렇게 속 시원히 말하는 겁니다.”
“아니.”
저건 솔직한 수준을 넘었잖아. 에넨도 저 광경을 보면 제발 숨기라고 부탁할 것 같은데.
“그리고 추기경들이 모였다면 저 정도 솔직함은 보여야 서로 대등한 토론이 가능합니다.”
순간 목 끝까지 무슨 개소리냐는 말이 솟았다.
내가 토론보다는 일방적 명령에 익숙한 입장이니 뭐라 말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토론이라는 것이 이성적이고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정중한 문답을 나눠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설령 그게 아닐지언정 적어도 이런 지옥은 아니다.
“추기경은 견습 사제부터 시작하여 철저히 능력을 증명해야 오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번에도 내 혼란을 눈치챘는지, 타니안은 평온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신의 뜻을 따르겠다 다짐한 자가 수십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그 길만 걸은 겁니다. 그동안 쌓아온 가치관과 신념의 두터움은 말할 것도 없지요. 평범한 토론으로 자신의 뜻을 꺾을 만큼 물렁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추기경이라는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허어.”
그 말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나름 설득력은 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자신만의 신념이 생기면 보수적이고 굳건해지기 마련이다. 헌데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그것도 혈연의 힘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오른 사람이라면 오죽하겠나. 어마어마한 신념이 있어서 추기경이 된 거고, 추기경이 됨으로써 자신이 옳았다는 확신까지 얻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수백 명이나 한자리에 모였다. 확실히 평범한 토론으로는 누구도 변하지도, 변할 수도 없다. 이렇게 뒤를 생각하지 않는 끝장 토론으로 모든 걸 쏟아내야 겨우 결과가 나올 거다.
…
‘그래도 이건 좀.’
슬슬 주먹다짐까지 할 것 같은 추기경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추기경의 의복이 붉은 건 순교자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사실 공의회에서 흘린 피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불경한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저 꼴을 보다 보니 영…
‘응?’
그러다 특이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묵묵히 상석을 지키는 교황이야 그렇다 쳐도, 상석과 가까운 곳에 앉은 노년의 남성은 팔짱을 낀 채 이 혼란을 관망했다. 모든 추기경들─ 하다못해 성장들도 각자의 주장을 펼치는 판국에 홀로.
“신앙교리성 성장인 페드로 오트바야 추기경 예하입니다.”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타니안의 첨언에 노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교단 내 보수파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분이지요. 교황 성하의 정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군.”
하필 담당 부서도 신앙교리성이냐.그거 옛날에는 이단심문성이었다고 들었는데.
“성하께서도 꽤나 골치 아프셨겠어.”
“그걸 사명으로 여기시는 분입니다.”
타니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었다.
이제 슬슬 교황이 부탁한 대로 움직여야겠다.
***
예상했듯 공의회는 혼란에 빠졌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구려.’
내 좌측 아래에 앉은 신앙교리성 성장을 쳐다보자 성장도 나와 눈을 마주치며 목례를 했다.
하여간 알기 쉽고 대처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개회와 동시에 보수파 추기경들이 일제히 강경 발언을 쏟아내며 공의회는 겁잡을 수없이 혼란스러워졌다. 적어도 며칠 동안은 생산적인 논의 없이 무제한적인 언쟁만 해야 할 정도로.
아마 성장의 목적은 중립파 추기경들에게 개혁 주제에 대한 반감을 키우려는 것일 거다. 서로 쓴소리와 고함이 오고 가면 중립파로서는 그 원인 자체에 학을 뗄 수밖에 없으니.
‘공의회를 막지 못했으니 내부에서 주저 앉히겠다, 라.’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이다. 보수파 추기경들도 엄연히 발언권을 가진 자들. 정당한 권리를 제한하지 않는 한 성장의 계책은 막을 수 없다.
허나 예상한 방법이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대책도 마련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때마침 그 대책이 오른손을 들고 발언권을 청했다.
“물론입니다. 복자께서는 저희가 초대한 귀빈이시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내가 발언권을 허락하자 머리가 뜨거워진 추기경들도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그야 참고인, 그것도 살아있는 복자가 말 좀 하자는데 방해하는 건 너무도 무례한 일이니까.
“저는 세계수 부활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초청 받았는데, 지금 오가는 말은 세계수와 연관이 없는 내용이군요.”
그리고 복자 타일글레헨 백작의 말에 신앙교리성 성장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반면 나와 복자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공의회는 우리가 주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