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01)
로판 속 공무원 501화(502/945)
교황의 집무실에서 나누었던 대화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교단의 주는 오직 한 분이지만, 대륙의 주는 여럿이라는 걸 인정하고자 합니다.”
낮고 낮은 신앙심을 자랑하는 나조차 놀랄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세계수가 부활하며 콘스탄티나라는 이종족의 신이 재강림하였으니, 여명 교단에서 기존과 다른 입장을 취하는 건 당연하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신과 그 하사품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상황에서 기존 입장만 고수한다? 스스로 모순에 빠져 가라앉겠다는 거지.
하지만 그 다른 입장도 철저한 에넨 위주일 줄 알았다. 종교 전쟁 시기에 무수한 피를 흘려 승리한 건 여명 교단이었다.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륙의 주류 종교로 군림한 것도 여명 교단이었다. 그렇기에 콘스탄티나를 독자적 신격이 아닌 에넨의 하위신, 혹은 수호령 정도로 취급하지는 않을까 생각했었다.
“신을 믿는 신도와 독자적인 문화가 버젓이 눈을 뜨고 있는데, 저희가 무슨 자격으로 정당한 신을 격하하겠습니까. 에넨께서도 콘스탄티나를 존중하셨으니 그 종인 우리가 그 뜻을 따를 뿐이지요.”
그러나 교황은 아니었다. 콘스탄티나를 격하하는 것이 아닌, 다른 신앙 공동체의 신으로서 인정했다. 하나의 독자적인 신격으로서 인정했다.
놀라운 일이다. 물론 콘스탄티나는 인간에 비하면 한 줌이라는 말도 민망한 엘프들의 신이니, 독자적 신으로 인정해도 여명 교단에는 별 타격이 없다. 이제 와서 여명 교단이 이교에 흔들리기에는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까.
그래도 유일신 체제인 여명 교단에서 에넨이 아닌 다른 신을 인정한다는 건 파격적인 선언이다. 당장은 어떨지 몰라도, 훗날 이 선택이 여명 교단의 패권을 뒤흔들 수도 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장이야 콘스탄티나로 끝나겠지만, 차후 다른 신들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저희가 올바른 가르침과 선을 행한다면 이교가 넘쳐도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저희는 이미 백성들의 선택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교황의 부드럽고도 단호한 말에 트릭시도 넋이 나갔었다. 다른 세계 출신인 나도 믿을 수 없는데 트릭시는 오죽했겠나.
“허나 애석하게도 모든 동포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번 공의회에서 세계수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피하고 다른 안건을 먼저 꺼내겠지요.”
세계수가 공의회 안건으로 나오면 콘스탄티나라는 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수백 년 만에 부활한 세계수와 신의 강림은 아무리 강경한 보수파라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명분이니까.그러나 세계수가 아닌 다른 안건으로 언쟁을 지속하면, 적어도 결정을 미룰 수 있다.
최대한 결정을 미루는 사이 논쟁의 여지가 넘쳐나는 안건들로 공의회를 뒤덮는다. 그렇게 다른 안건을 격렬히 논하느라 중립파 추기경들이 지친다면, ‘다른 신을 인정’한다는 폭탄보다 보수적인 방안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 라는 것이 교황의 설명.
즉 시간 싸움이다. 공의회 초반부터 세계수를 밀고 나가면 교황의 승리, 그것이 막히면 보수파의 승리.
‘그래서 이 모양인 거겠지.’
개회와 동시에 인외마경이 펼쳐진 것도 그러한 이유다. 보수파 입장에서는 세계수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에 자신들이 분위기를 주도해야 콘스탄티나가 독자적 신으로 인정받는 걸 피할 수 있다.
마침 교황이 공의회 때 통과시키고자 한 개혁안은 보수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야 즉위부터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주장했는데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지. 덕분에 보수파는 교황, 더 나아가 진보파가 주장한 안건을 먼저 들먹이며 화려한 분탕질을 치고 있었다.
물론 쌍욕이 난무할 정도로 분탕을 칠 줄은 몰랐지만. 공의회가 아니라 뒷골목이라 해도 믿겠어.
“이 자리에 모인 신실한 분들께서 논하는 것이니, 무지한 저조차 그것이 교단과 대륙의 올바른 신앙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할지 감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교황이 발언권을 허락하자마자 입을 열었다.
교황의 뜻이 마음에 들었고, 외조모님을 비롯한 엘프들과 안면을 튼 입장이라 콘스탄티나가 일개 수호령이나 하위신으로 격하되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보는 자리에서 콘스탄티나가 격하되면 무슨 염치로 외조모님 앞에 고개를 들겠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세속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미래를 좌지우지 할 토론에 귀를 기울이고 싶으나, 제국과 신민을 위하여 봉사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기에 빠르게 귀국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교황에게 힘을 실어주는 말을 꺼냈다. 덕분에교황의 표정은 더욱 밝아졌고, 신앙교리성 성장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니 세계수에 대한 안건을 먼저 논의해주시기를 청하겠습니다.”
당당하고 직설적인 요구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일방적인 상황이라면 이런 직설적인 요구는 무례라고 볼 수 있으나, 자신들이 초대한 손님이 ‘나 바쁜데 빨리 좀 해줘.’ 라고 하면 거절하기도 난감하다. 무례고 뭐고 내가 바쁘다는데 어쩔 거야.
“옳은 말씀입니다.”
침묵을 깨고 신앙교리성 성장이 입을 열었다.
가장 걸림돌이 될 인물이 가장 먼저 입을 연 상황이라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말로는 옳다고 하지만 신앙교리성 성장은 세계수에 대한 논의를 최대한 미뤄야 하는 입장. 어떤 언변으로 나를 막아설지 알 수 없─
“바쁘신 분을 모셔놓고 실수를 했군요. 복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세계수에 대한 논의부터 하도록 합시다. 그 어떤 안건이라도 신보다 위에 둘 수는 없지요.”
?
‘뭐야.’
긴장감은 순식간에 당혹감으로 변했다. 시원하게 내 의견을 받아들인 것은 물론, 스스로의 입으로 신을 언급하며 콘스탄티나를 독자적 신으로 여기겠다는 암시를 보였다.
뭐지? 대체 뭐지? 보수파 수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까까지만 해도 콘스탄티나를 막기 위해 온갖 분탕을 치지 않았어?
혼란스러운 마음에 슬쩍 교황을 보자 교황의 표정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
‘좋은 게 좋은 거지.’
그 온화한 표정을 보자마자 마음을 놓았다.내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나보지.
***
복자 타일글레헨 백작의 청을 기점으로 강경 발언을 포기했다. 막아봤자 의미가 없다면 흐름에 올라타는 수밖에 없지. 괜한 고집을 부려서 교단의 역량을 갉아먹을 수는 없지 않나.
“잠시 휴회하겠습니다. 2시간 후에 다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그 와중에 서기를 맡은 교단실록성 성장이 휴회를 선언했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지금도 우리가 강경 발언을 앞세워 공의회를 주도하고 있어야 했다.
‘끝났군.’
모든 계획이 어긋났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금이라도 덜 급진적인 결과를 위해 제동을 거는 것밖에 없다.
그래, ‘덜’ 급진적인 결과를 위해서다. 교단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아갈 것임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의 주를 제외한 다른 존재를 신으로 인정하고, 우리가 피로 그린 승리의 역사를 우리 손으로 지워야 하는 현실.
‘이 역시 주께서 안배하심이겠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의 총애를 받은 복자가 교황의 뜻을 지지한다면 그 역시 주께서 안배하심이 아니겠나. 그렇다면 종으로서 따라야 한다.
“예하.”
“음?”
다소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의실을 벗어나니, 나를 기다리고 있던 보수파 추기경들이 다가왔다.
표정이 썩 좋지 않을 걸 보니 다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피곤할 텐데 조금이라도 쉬고 있지, 왜 이 늙은 놈을 기다리고 있나? 나보다 젊으니 팔팔하다고 과시하는 겐가?”
그런 추기경들을 향해 농담을 건넸다.
“이대로 끝내실 겁니까?”
허나 혼신의 농담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답은 딱딱했다.
말세다. 나보다 젊은 것들이 이렇게 재미없고 무뚝뚝하다니.
“그럼 뭐 어쩌겠나. 성하께서 복자까지 포섭했을 줄 누가 알았겠어. 하여간 수완도 좋으시지.”
“예하!”
“귀 안 먹었네.”
퉁명스러운 대답에 추기경들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럼 선현들께서 쌓은 영광을 우리 손으로 분해하고, 그 파편을 이교와 나눠야 한다는 겁니까?”
“자네.”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유일한 주를 부정하고, 다른 주를 세워야 하는 겁니까?”
씁쓸한, 동시에 울분에 가득 찬 말에 다시금 쓴웃음을 짓게 되었다.
저 심정을 어찌 모르겠나. 나도 같은 마음으로 성하의 주장을 반대한 것인데. 이 대륙과 만민의 유일한 주이신 에넨과 겨룰 수 있는 이신을 인정하고, 선현들이 피를 흘리며 쌓은 영광을 우리가 부정하게 생겼는데.
“그것이 주께서 안배하심이네.”
그래도 따라야 한다. 주의 총애를 받은 복자가 성하의 뜻을 지지했다. 복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세계수가 부활했다.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니라면 무엇이 주의 뜻일까.
“그리고 자네들도 보지 않았나. 중립을 지키던 추기경들도 성하의 뜻을 지지하기 시작했네. 이젠 우리는 명분으로도, 수적으로도 밀려.”
“그건…”
“다수결을 부정하지 말게. 저들도 우리처럼 주를 향한 경외와 신도들을 위한 헌신의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이야. 우리가 저들을 설득하지 못했다면, 저들의 의견에 순응해야지.”
순응이라는 말에 불만을 보이던 추기경들도 하나둘 단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다수결에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토론을 한단 말인가. 토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살림이라도 차리라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우리가 성하의 개혁안을 반대하는 건 주의 드높은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다. 헌데 반대를 위해 교단을 반으로 찢는다고? 도리어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꼴이다.
만약 분파나 독립 운운하는 놈이 나오면 내가 앞장서서 그놈의 파문을 성하께 건의할 것이다. 교단을 위해 추기경이 존재하는 것이지, 추기경의 독단을 위해 교단이 망가지는 건 있을 수 없다.
“알았으면 다들 돌아가서 쉬게. 이제 세계수에 대한 안건 하나만 끝나갈 뿐이야. 아직 남은 안건이 한가득이지 않나.”
“예, 예하.”
터덜터덜 돌아가는 추기경들을 보며 몸을 돌렸다.2시간의 휴회 동안 나도 고민해야 할 것이 많다.
‘다음 교황직은 포기해야겠어.’
과분하게도 차기 교황 후보 중 하나로 이름이 거론되고 있으나, 공의회가 성하의 뜻대로 마무리 될 조짐이니 포기하는 게 옳다.
공의회가 통과되면 진보파의 의견대로 개혁이 추진될 텐데, 보수인 내가 차기 교황이 되면 개혁안이 잘도 진행되겠다. 교단이 변화해야 할 중요한 시기를 망친 무능하고 고집 센 교황으로 역사에 남을 터.
그건 싫다. 꼴통 노인네로 기록되는 건 내 행보가 그러했으니 인정하지만, 교단을 망친 교황이 되고 싶지는 않다.
‘결국 당신이 이기는구려.’
웃음이 나왔다. 성하는 전대 교황의 개혁에 지친 추기경들이 잠깐 쉬어가기 위해 뽑은 교황에 불과했다. 그런 교황이 공의회를 이끌어내다니, 인생 참.
‘복자는 대체 어떻게 설득한 건지.’
결정적인 패배 요인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주께서 교황 성하를 굽어살피시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