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03)
로판 속 공무원 503화(504/945)
공의회 둘째 날 아침.
다르게 표현하면 나와 트릭시의 신혼여행 첫째 날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형제님.”
그 기분 좋은 아침부터 좋지 못한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형제님. 다시 닫으시면 곤란합니다.”
“미안하다. 바람이 불어서 그만.”
불청객의 등장에 반사적으로 방문을 닫아버렸지만, 문밖에서 들리는 타니안의 목소리에 눈물을 머금고 도로 열었다.
서글프다. 이제 내가 할 일도 끝났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관광을 즐기려고 했는데, 아침부터 차기 성자가 온 걸 보면 뭔가 다급한 일이 생긴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저 녀석이 직접 올 리가.
‘무슨 일이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소환할 만한 일이 없다. 콘스탄티나 공인은 확정되었고, 영원한 푸른 하늘도 공인 직전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오늘로 미뤘을 뿐이다. 더 이상 내가 관여할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새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알고 맞는 것과 모르고 맞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지.
“하하, 이른 시간부터 찾아와 죄송합니다. 느긋하게 오면 두 분이 안 계실 것 같았거든요.”
내 공포를 아는지 모르는지, 타니안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걸 드리려고 왔습니다. 교단의 자그마한 성의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성의?”
그 말에 타니안이 꺼낸 물건을 빠르게 훑어봤다.
딱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패, 은으로 만든 것 같은 외관, 그 가운데 그려진 교황의 문장.
“…그건 뭐지?”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 설명을 요구했다.
문장이란 개인이나 가문, 집단, 혹은 국가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그렇기에 특정 문장이 그려진 물건은 해당 문장을 사용하는 쪽에서 그 물건을 보증한다는 것이고, 이는 해당 물건을 소유한 사람의 신원도 덩달아 보장한다는 의미. 과장 좀 보태면 보증의 순한 맛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헌데 일개 추기경도 아닌 교황의 문장이 그려진 패? 이 패가 은이 아닌 썩은 나무로 만든 물건이었어도 국보처럼 여겨야 할 수준이다.
“형제님과 자매님께서 에네스티예 관광을 즐길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설명을 요구하자 타니안은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에네스티예는 실로 아름답고도 경건한, 이 대륙의 둘도 없을 순백의 도시입니다. 결코 후회 없는 관광이 될 것이라 자부합니다.”
물건 설명이 아닌 고향 자랑을 하는 모습에 순간 울컥했지만 참았다. 타니안은 기행을 저지르는 놈이지, 머리가 없는 놈이 아니다. 주제와 어울리지 않는 발언을 한다면 그 또한 본론을 위한 빌드업이겠지.
“허나 이 순백의 도시를 눈에 담기 위한 순례자들은 매일 에네스티예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며칠 전부터는 공의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더욱 늘어났지요. 아마 지금 밖으로 나가셔봤자 관광은커녕 돌아다니기도 버거울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은 타니안이 은색 패를 내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
“그래서 이 패를 드리는 겁니다. 들어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사람이 많다면 관리자에게 패를 보여주십시오. 바로 내부로 안내해줄 겁니다.”
‘오.’
생각보다 무난한 물건이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그 정도라면 기쁘게 받을 수 있다. 만약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면 부담스러웠을 텐데, 놀이공원 프리패스권 정도라면 괜찮지.
“아, 그리고 해당 패를 지닌 인물은 교황 성하와 준하는 인물로 대접받으니, 민간인의 접근이 통제되는 곳도 마음껏 들어갈 수 있습니다.”
?
“뭐?”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다. 누구와 준하는 인물이라고?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디 즐거운 여행 되시길.”
“아니, 잠깐─”
내 애타는 부름에도 불구하고 타니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망할 놈.
“신기한 물건을 받았구나.”
타니안이 돌아간 후, 잠에서 깬 트릭시는 내가 허망히 들고 있던 패에 관심을 보였다.
“작은 패지만 그 안에 신성력이 가득해. 이 은부터 고위 사제들의 축복을 받아 제련된 것 같고, 패로 가공되기까지 무수한 손을 거쳤겠지. 성물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겠어.”
흥미롭다는 듯 패를 만지작거리는 트릭시를 보니 씁쓸한 심정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교황에 준하고 뭐고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어차피 신혼여행이 끝나면 다시는 신성교국에 올 일이 없고, 나는 에넨의 복자이자 영원한 푸른 하늘의 명예 제사장이며 콘스탄티나의 은인이다. 이 패가 없었어도 종교적 권위가 드높은 사람이다, 이 말이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자. 이미 물이 넘치는 잔에 물 한 바가지 더 부었다고 대수일까.
‘망할.’
이렇게 정신승리하고 그러면 버릇되는데.
***
나보다 먼저 일어난 칼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제법 일찍 일어난 편인데, 그런 나보다 먼저 깨어있었다면 칼도 오늘 관광을 기대했다는 거겠지.
“신기한 물건을 받았구나.”
그 와중에 내가 자는 사이 누군가 다녀갔는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물건이 칼의 손에 들려있었다.
간단히 살펴보니 해가 되기는커녕 유용한 물건이었다. 교황의 초청을 받고 온 손님에게 흉악한 물건을 줄 정도로 신성교국 사람들이 경우 없는 사람들은 아니니까. 그렇기에 적당히 훑어보고 칼에게 돌려줬다.
“이제 나가자. 기껏 일찍 일어났는데 방에만 있으면 억울하잖아?”
“후후, 그러자꾸나.”
물론 평소였다면 새로운 물건을 진득이 관찰했겠지만, 지금은 칼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야 할 때. 고작 물건 따위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혹시 갈 곳은 정했니?”
“아니. 일단 돌아다니면서 결정하려고. 어딜 가든 다 처음 보는 거니 즉흥적으로 정하는 것도 좋을 거야.”
숙녀와의 오붓한 시간을 아무 계획 없이 보내겠다는 선언이었으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칼과 느긋하게 길가를 걷고, 평범한 시민처럼 이리저리 누비고 다닐 수 있을까. 설령이곳이 에네스티예가 아닌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어도 행복했을 거다.
“기념품으로 살만한 것도 찾는 게 좋겠구나.”
“어, 응. 그러자.”
내 말에 칼이 잠깐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속으로 하던 생각을 내가 먼저 꺼냈으니 놀랐겠지. 칼은 아닌 척하면서도 배려심이 넘치니, 나와 신혼여행을 즐기는 기간 동안 다른 아이들이 떠오를만한 발언은 피하려고 했을 거다.
고마운 배려지만 먼저 선수를 쳤다. 부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 칼의 뜻. 그렇다면 부인으로서 남편의 뜻을 돕는 게 옳을 터.
…그리고 이렇게 해야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칼이 나를 생각해 줄 거라는 계산이 살짝 끼어있었다. 부부 사이에 머리를 써서 민망하지만,이런 계책 정도는 괜찮겠지.
‘치사하거나 비열한 방법도 아니니까.’
실제로 나를 보는 칼의 표정도 아까보다 더욱 밝아졌다.
아무리 성지여도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 마종공 각하! 이리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설마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각하를 뵙게 되다니, 실로 주께서 보우하심이군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관광객 중 일부는 나를 보자마자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빠르게 허리를 숙이며 온갖 찬양의 인사를 늘어놓았다.
익숙한 느낌이다. 제국에서도 외출을 할 때마다 이런 일을 겪었었지. 그래도 에네스티예라면 마법사보다 신실한 신도들이 더 많을 테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신실한 마법사라는 융합체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하온데 각하. 이 미천한 후학은 위대하신 각하를 뵙는 것만으로도 실로 영광이오나, 어찌하여 제도가 아닌 성지에 계시는지…?”
이윽고 조금이나마 이성을 되찾은 한 마법사가 타당한 의문을 표했다.
저 마법사의 말처럼 나는 제도, 아무리 넓어봤자 제국에만 머물렀다. 그랬던 내가 타국에서 모습을 보이니 신기하겠지. 우리가 공의회 참고인 자격으로 초청받은 건 아직 대외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그건─”
“본작이 황제 폐하께 청하여 신혼여행을 온 거다. 제국의 기둥인 부인이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성지에 올 수 있겠나.”
내가 답을 하기도 전에 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부군 각하?”
칼의 목소리에 오롯이 나에게 쏠렸던 관심이 칼에게 분산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미처 부군 각하께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괜찮다. 마법사들에게 있어 부인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이런 것도 이해하지 못하면 마종공의 남편으로 살 수 없지.”
웃음 섞인 대답에 긴장했던 마법사들도 하나둘 표정을 푸는 것이 보였다.
조금 신기했다. 마법사들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다니. 확실히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내 남편인 칼은 귀한 사람이 되었구나.
“헌데 방금 말한 것처럼 신혼여행 중이라서 말이야. 부인도 후학의 인사 정도는 기꺼이 받을 수 있지만, 그 이상 시간을 할애하는 건 곤란할 것 같군.”
“물론입니다!”
“어찌 후학으로서 존경하는 선배의 시간을 방해하겠습니까!”
“이해해 줘서 고맙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칼은 마법사들의 어깨를 일일이 토닥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마법사들도 황송스럽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누가 보더라도 상하관계가 명확히 확립된 모습.
“하마터면 마법사들하고 단체 여행할 뻔했네.”
정작 윗사람의 면모를 보인 칼은 픽 웃음을 흘리며 내 허리를 껴안았지만.
“나 잘했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나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럼. 역시 날 생각해주는 건 남편밖에 없어.”
칼의 뺨에 입술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살짝 아쉽다. 보는 눈만 적었다면 뺨에 입술을 맞추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곳을 노렸을 텐데.
“잠깐 카페라도 들어가 있자. 보는 눈이 많으니 좀 피해야지.”
그래도 칼의 제안 덕분에 아쉬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역시 내 마음을 아는 건 남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