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07)
로판 속 공무원 507화(508/945)
유모라는 직책은 집사장, 시종장과 달리 가신단에 정식으로 속하지 않는다. 가신과 외부 초청인 사이 어딘가에 걸쳐진 중간인, 그것이 유모다.
허나 미묘한 위치와 달리 유모는 어지간한 가신을 능가하는 고급 인력이다. 상식적으로 자기 자식을 돌보는 사람을 아무나 채용할 수는 없지 않나. 신원이 확실하고 능력이 뛰어나며 인성이 좋은 자. 오직 그러한 자만이 유모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유모는 쉽게 찾을 수도, 만들 수도 없다. 새로운 유모를 고용하려면 이전의 유모가 후계자를 성심성의껏 키웠거나, 후계자를 키우지 못했다면 유모 네트워크를 가동하여 인맥에 기대야 한다. 그것이 유모의 세계다.
허나 카토반 공작가는 둘 다 불가능하다. 카토반 공작가에 유모라는 직책이 존재한 건 100년도 더 된 일이며, 공작이 결혼할 생각을 안 하니 차기 유모를 교육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유모의 인맥? 트릭시를 돌본 유모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죽었다.
덕분에 카토반 공작가는 뒤늦게 유모를 찾기 위해 열을 올렸다. 정확히는 유모를 육성할 경력자를. 영광스러운 작은 주군의 유모는 ‘당연히’ 가신 가문에서 배출해야 하니까.
– 유모 경력이 있는 마법사들이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그 결과, 대륙의 마법사 유모들이 광분 상태에 빠졌다. 본인이 유모가 되는 것은 아니나 유모를 가르치는 선생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종공과 조금이나마 연이 생기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환장하겠네.’
상상도 못 한 상황이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카토반 공작가가 구인 공고를 내걸었을 때, 지원자가 쏟아질 거라는 건 예상했다. 아주 티끌만한 야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공작가와 연이 생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 없으니.
하지만 구인 공고를 내건 지 며칠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대륙 단위의 난리가 터질 줄은 몰랐다. 마법사 이것들, 혹시 트릭시 팬클럽 카페 같은 거 따로 만들었나? 거기서 트릭시 관련 소식이 매일매일 올라오는 거 아냐?
‘감히 나를 빼두고.’
그런 게 있다면 부군인 나를 회장으로 추대하는 게 옳거늘, 건방지기 짝이 없다.
…
‘어쩌지.’
현실 부정을 마치고 다시 현실을 직시했다. 판이 이렇게 커졌으면 간단히 일을 처리하기 곤란해진다.
빙의 전 세계에서도 취업을 원하는 면접자를 떨어트리면 위로와 유감의 문자를 보내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집사장의 말처럼 신청서를 제출한 사람이 500명이 넘는다면 거절 답장을 쓰는 데만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원자 중 거물이 끼어있다면 더욱 많은 정성이 필요할 테고.
‘이러면 유모를 추천하기 곤란한데.’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륙 각지의 마법사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운데, 내 추천을 받은 유모가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면 괜한 뒷얘기가 떠돌지도 모른다. 어차피 부군의 지인을 꽂아 넣을 거면 뭐 하러 공고를 냈냐고.
물론 공고를 낼 당시만 해도 유모가 관심을 보일 줄 몰랐고, 유모만큼 능력과 성품을 두루 갖춘 인물이 드무니 꽂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사정을 아는 건 아니다.
사실 뒷얘기가 떠돌아도 상관은 없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이고, 그 사람들도 그저 말로만 끝날 테니까. 하지만 유모가 나와 트릭시의 일 때문에 듣지 않아도 될 험담을 듣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아.’
이윽고 단순하면서도 그럴듯한 방법이 떠올랐다.
‘한 명만 뽑을 필요는 없잖아.’
여럿을 뽑으면 유일한 자리를 유모가 먹었다는 험담을 피할 수 있다. 게다가 학교에 가도 과목마다 선생이 다른 법인데, 유모라고 혼자서 가르치라는 법이 있을까.
“집사장.”
– 말씀하십시오.
“우리 형제를 돌본 유모께서 크라시우스 가문의 시녀장으로 지내는데, 그분을 보낼 터이니 그분과 상의하여 네 명 정도 더 선발하게.”
– 예, 부군 각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 지시에 집사장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단순한 방법이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단순하게 문제를 해결할 때도 있는 법이다.
유모를 포함하여 다섯이나 되는 선생들을 선발하겠다는 기적의 결론.
“한 명에게 배우면 편향된 길로 나아갈 수 있지만, 여럿에게 배우면 스스로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지.”
트릭시는 그 기적의 결론이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집사장에게 바로 지시를 내리기는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부부의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한 거다. 심지어 공작이 멀쩡한 상황에서 일개 부군이 공작의 가신을 부린 것이고.
‘앞으로 조심하자.’
다른 곳에서는 내가 결정권자지만 카토반 공작가에 한해서는 나도 2인자에 불과하다. 경솔한 행동 때문에 트릭시가 서운해 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지.
“그런데 칼, 이왕 다섯이나 꾸린 거 한 명 더 추가하지 않겠니?”
“한 명?”
그리고 트릭시의 제안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트릭시가… 꽂고 싶은 사람이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트릭시가?
‘아는 사람이 있었어?’
굉장히 실례가 되는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다. 직접 지목해서 꽂을 정도면 나름의 정이 있다는 건데, 인간관계에 초탈한 트릭시가 누군가에게 정을 주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꽂아주기를 부탁한 사람의 용기도 대단하다.
“방금 외할머니께 연락을 드렸는데, 엘프의 문화를 가르칠 유모가 필요하지 않겠냐고 하더구나.”
“아.”
납득했다. 외조모님이라면 트릭시에게 낙하산 인사를 요구할 수 있지.
아니, 외조모님의 선택이니 낙하산이 아니라 공수부대라고 해야 하나.
“그러네. 엘프의 피가 흐르니 엘프의 문화는 알아야지.”
본능적으로 엘프 주거 지구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나도 트릭시도 엘프의 문화에 무지하여 공개적으로 화끈한 짓을 했던 아련한 기억이.
그래, 그 치욕과 수모를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 부모가 못 배웠다면 자식들이라도 제대로 배우는 것이 맞다.
“아, 그리고.”
갑자기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기 시작한 트릭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외할머니께서… 최대한 빨리 집에 오라고…”
그 말에 나도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머리로는 외손녀를 성인이라고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아직아기 취급하는 외조모님께서 외증손이 셋이나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과연 기쁨보다 먼저 느꼈을 감정이 무엇일까. 감히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
트릭시와의 연락을 끝낸 후.
“후우우…”
속을 달래기 위해 연신 물을 들이켰다. 물의 정령왕께서 하사하신 보물이 담긴 물이니, 속이 뜨거워지는 것 정도야 금방 달랠 수 있을 터.
– 내가 준 건 육체에 효과가 있는 거지, 정신에 효과가 있는 건─
“네?”
– 조심해서 마시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물도 급하게 마시면 체하는 법이지.
물의 정령왕께서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요정들을 등껍질에 태운 채 밖으로 나가셨다.
그 모습을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졸지에 정령왕께 심술을 부리는 꼴이 되었으니.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다시 물을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누구도 죄를 짓지 않았다.
결혼을 하면 아이가 생기는 게 당연하다. 트릭시도 인간 세상 기준으로는 흠잡을 곳 없는 성인이다. 엘프의 피가 섞였다지만 반은 인간이며, 인간 세상에서 살아온 트릭시에게 엘프의 기준을 들이대는 건 옳지 않다.
분명, 분명 그럴 것인데.
‘어떻게 120이 겨우 넘은 아이가.’
아이를.
어떻게 아이가 더 작은 아이를.
“세상이 어찌 되려고.”
무심코 그런 투정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지금의 세상은 세계수가 부활하고, 콘스탄티나께서도 다시 강림하신 아름다운 세상임에도.
이러면 안 되는데. 그 아이들에게는 결혼하자마자 새로운 생명을 가진 기쁜 순간인데. 이러다가 축하해 줘도 모자란 판국에 그 아이들 앞에서 언짢은 기색을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다음에 부를 걸 그랬어.’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트릭시에게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는 본능적으로 집에 오라 했지만, 이성을 되찾고 나니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진정, 또 진정하자. 그 아이들이 오면 함께 웃으며 축하…
‘어떻게 아이가 아이를!’
큰일이다. 아무래도 당장은 힘들 것 같다.
“장로님, 계세요?”
그렇게 홀로 마음속 고통과 다투는 사이, 문밖에서 클라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고통을 나눠가질 상대가 왔다는 것이 반갑고도 미안했다.
***
드디어 뜨겁게 불타오르던 통신구가 잠잠해졌다.
– 이제야 연락이 닿는구만. 그동안 뭐 하고 지냈냐?
“저택에 박혀서 농성했습니다. 나갔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요.”
덕분에 이제서야 장관에게 연락을 걸 수 있었다.
트릭시가 임시 통신구를 만들어줬으니 그때 했어도 무방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장관의 고유 번호를 까먹었다. 솔직히 저 양반도 내 통신구 번호 모를걸.
– 하긴. 조금만 돌아다녀도 다 네 얘기만 들리더라.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장관은 이윽고 끅끅 웃음을 흘렸다.
– 하여간 대단해. 첫째를 가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에는 세쌍둥이라니.
“부럽습니까?”
– 아니.
단호한 대답에 마음이 아팠다. 자식이 많은 기쁨을 모르다니, 당신은 정말 불쌍한 사람이에요.
– 사실 세쌍둥이인 것보다 다음 세르베트 공작이 네 핏줄이라는 게 소름 돋는다. 제국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그 와중에 실로 불경스러운 발언이 장관의 입에서 나왔다.공작가의 후계가 굳건해진 경사 속에서 제국이 잘못되어간다는 듯한 발언을 하다니. 아무리 장관이어도 용서받지 못할 발언 아닌가.
“그 말, 다른 사람들한테 말해도 됩니까?”
– 하고 싶으면 해라.은퇴하면 그만이야.
허나 논리적으로 완벽한 반박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건 그렇지. 내가 장관을 고발하면 장관만 수십 년 조기 퇴직을 하는 거지.
– 뭐, 이미 많이 들었겠지만 축하한다. 마종공 각하께도 축하드린다 전해주고.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제 통신구가 불탄 겁니다.”
– 너도 옛날에는 각하 피해 다니지 않았냐?
이상하다. 오늘따라 장관의 말 하나하나가 명치를 찌른다…
– 아무튼 이제 끊을 테니 잘 숨어 다녀라. 괜히 엄한 곳에서 붙잡히지 말고.
마지막까지 주옥같은 조언을 남긴 장관은 미련 없이 연락을 끊었다.
‘망할.’
아무래도 조만간 장관의 저택에 놀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릭시랑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