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08)
로판 속 공무원 508화(509/945)
카토반 공작가의 구인 공고가 마무리되었다.
그야 공작가의 가신들이 눈에 불을 켜고 신청서를 확인했으며, 나와 에리히를 기른 경력자 유모까지 전문가의 시선으로 가신들을 도왔으니까. 열정과 능력이 결합되어 선발 자체는 금방 끝났다. 그저 탈락한 인원들에게 거절과 위로의 답장을 작성하는 게 오래 걸려서 문제였지.
아무튼 선발된 인원 중 반은 막 유모 자리에서 은퇴한 중년 여인이었고, 나머지 반은 후임 유모도 여럿 기른 노파였다. 적절한 밸런스인 것 같으니 교육에 문제는 없을 거라 믿는다.
“끊긴 전통을 다시 만들어 줄 귀빈들이니, 성에 모이면 작은 연회라도 여는 게 좋겠군.”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귀빈들의 나이를 고려하여 화려함보단 차분함과 웅장한 분위기를 조성하겠습니다.
딱 주제만 던졌는데도 알아서 내용을 채우는 집사장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집사장을 볼 때마다 AI 좋은 자동 사냥을 돌리는 기분이야. 너무 편해.
“연회는 우리도 참여할 테니 알아두게.”
– 예, 부군 각하.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집사장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통신구를 다시 품 속에 넣었다.
언제나 성실하고 깍듯한 집사장에게는 미안한 말이나, 지금 중요한 건 집사장이 아니니까.
“칼.”
살짝, 아주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트릭시가 입을 열었다.
“아, 응. 가자. 외조모님이 기다리시겠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성과 본능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을 외조모님을 봬야 한다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엘프 주거 지구 입구에 도착했다.
텔레포트를 사용하면 바로 외조모님 자택에 도착할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일부러 먼 곳에 떨어졌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세상에, 세상에.”
“진짜야, 어쩜 좋아.”
엘프 주거 지구를 걸을 때마다 근처에 있던 엘프들이 수군거리는 게 여과 없이 들렸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비록 엘프 중에서는 외조모님께만 임신 소식을 알렸으나, 이곳은 관광지인 이종족 보호 구역이다. 대륙 전체에 트릭시의 임신 소식이 퍼졌으니 다른 엘프들도 관광객들을 통해 임신 사실을 접했을 확률이 높다.
“정말 셋이야. 가장 최근에 쌍둥이가 태어난 것도 아펠스 시절이었는데, 갑자기 세쌍둥이라고?”
“콘스탄티나께서 결혼식 때 강림하셨었지. 그때 축복을 받은 것 같은데?”
결정적으로 엘프들은 마법에 특화된 종족이다. 즉, 트릭시의 몸을 보기만 해도 트릭시의 몸에 새로운 마나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다는 뜻.
내가 어리석었다. 외조모님이라는 사자 한 마리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하이에나 무리에 투신한 꼴이잖아.
“그런데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저 아이 이제 120 조금 넘지 않았어?”
“엘프 기준으로 보면 문제기는 한데, 인간 사회에서 자란 아이잖아. 게다가 순혈이 아닌 혼혈이고.”
“그, 그런가?”
하지만 침통하고 수치스러운 순간 속에서도 귀는 활짝 열어뒀다. 엘프들의 대화를 들어야 현재 엘프들의 여론, 그와 비슷할 외조모님의 심정을 알 수 있을 테니.
‘괜찮네.’
그리고 여론은 다행히 우호적 중립이었다.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납득하는 엘프는 없었지만, 적어도 우리를 손가락질하거나 혀를 차는 엘프도 없었다. 그저 ‘조금 그렇기는 한데 인간 기준이면 뭐.’ 라고 납득하는 수준.
현재 엘프들은 대부분 제국 건국 이후에 태어난 젊은 피라고 들었는데, 그 덕분인지 상대적으로 개방된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정말 다행이야.
“우리 아이가 따가운 시선을 받을 일은 없겠구나.”
트릭시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다들 착한 분들이잖아. 귀여워하면 귀여워했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런 트릭시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답했다.
트릭시가 어떤 걱정을 했는지는 알 것 같다. 몸에 흐르는 엘프의 피 덕분에 인간과 벽을 쌓고 지내야 했으나, 정작 엘프와도 어울리지 못했던 100년의 세월. 혹시 그 100년을 우리 아이들이 평생 겪지는 않을까 걱정했을 거다.
과한 생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가 아이를 가진 건 엘프의 상식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상황이다. 엄청난 괴리감 때문에 우리 아이들을 쌀쌀맞게 대할 수도 있지. 다행히 트릭시의 말처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일단 빨리 가자. 더 있다가는 둘러싸이겠어.”
물론 안도와 별개로 모든 엘프들의 시선을 받는 건 생각보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눈빛도 심상치 않은 것이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말로만 수군거리는 게 아니라 직접 다가와 말을 걸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외조모님 자택으로 가는 거였는데.
***
수명이 정해진 필멸자들은 복잡하게 사는 것 같다.
“축하한단다. 셋이나 되는 아이가 한 번에 생기다니, 이게 신의 축복이 아니면 뭐겠니.”
“그, 가, 감사합니다, 외할머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축하를 건네는 장로, 쭈뼛거리며 감사를 표하는 장로의 외손녀.
그리고 은근히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보고 있는 은인까지.
‘왜 저러는 거지?’
이해할 수 없다. 정령계에서 새로운 정령이 태어나면 모두가 기뻐하는 경사다. 불멸의 존재인 정령은 죽음과 같은 수면에 빠지더라도 언젠가 다시 깨어나지만, 반대로 새로운 정령이 태어날 확률도 희박하다.
그런데 장로의 외손녀는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새로운 생명을 품었다. 수명이 정해진 필멸자라면 빨리 아이를 가질수록, 많이 가질수록 좋은 거 아닌가?
– 이해하기 어렵군.
– 그게 이 세계의 매력이지.
내 중얼거림에 불의 정령왕이 날아오더니 등껍질 위에 앉았다.
“불 아저씨! 더워! 떨어져!”
“맞아! 불 아저씨 더워! 물 아저씨 시원해!”
– 이런, 미안하다.
하지만 이미 내 등껍질을 선점하고 있던 요정들의 성화에 슬며시 물러났다.
– 그러고 보니 땅 아줌마가 너희랑 놀고 싶다고 하던데.
“땅 아줌마가? 진짜? 진짜?”
“와! 나 줄다리기 할래!”
이윽고 불의 정령왕의 거짓말에 요정들이 뽀르르 세계수 쪽으로 날아갔다.
분명 땅의 정령왕은 세계수 가지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지. 자는 도중에 봉변을 당할 땅의 정령왕에게 애도를 표할 뿐이다.
– 이제 좀 우리끼리 얘기할 수 있겠군.
– 중요한 이야기인가?
– 그건 아니지만, 저 아이들은 워낙 순수한 아이들이지 않나. 어지간하면 우리끼리 말하는 게 좋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들은 순수하고 거짓을 모르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 앞에서 무언가를 말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한 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딱히 악의가 있다거나 심술을 부리는 건 아니다. 그 아이들에게는 비밀이라는 게 없고, 무언가를 숨겨야 한다는 의미도 모르니까.
– 아무튼. 자네도 눈치챘나?
이어지는 불의 정령왕의 말에 우리의 시선이 장로의 외손녀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외손녀의 배 쪽으로.
–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지. 마나도 마나지만, 자연의 기운이 상당해. 적어도 셋 중 하나는 정령사의 자질을 타고났을 거야.
내 말에 불의 정령왕의 몸을 덮은 불길이 다소 격정적으로 타올랐다.
이 망할 녀석. 동의한다면 동의한다고 부리나 열 것이지, 어딜 한여름에 불을 지르고 있어.
– 그래, 최소 상급 정령사다. 아직 뱃속에 있음에도 저 정도라면 태어난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교육을 받는다면 우리와도 계약을 맺을 수 있어.
하지만 불의 정령왕의 목소리에서 미미한 흥분이 느껴졌기에 참았다. 사실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으니.
세계수가 존재하는 한 정령은 언제든지 정령계에서 이 세계로 넘어올 수 있다. 이는 하급부터 최상급 정령까지, 하물며 정령왕도 포함되는 규칙이다.
그러나 세계수 근방을 벗어나는 건 계약자가 있어야 가능하다. 아무리 강력한 정령왕이라도 계약자가 없으면 세계수 근처를 맴도는 유령이 될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일이지.’
기껏 지루한 정령계에서 탈출했더니 세계수 근처에만 머무를 수 있는 상황. 어느 정령이라도 비명을 내지를만한 일이다.
그래서 불의 정령왕이 흥분을 감추지 않는 거다. 우리가 정령사와 마지막 계약을 맺은 것이 600년 정도 전의 일이었으니까. 세계수가 불탄 공백의 세월을 감안해도 300년 동안 우리의 계약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장로마저 최상급 정령과 계약하는 것이 한계니 정말로 안타까운 일.
그렇기에 장로의 외손녀가 정령사의 자질이 넘치는 아이를 품었다면 기쁜 일이다. 그래, 분명 기쁜 일이기는 한데.
– 그 아이가 정령사의 길을 택할까?
– …….
근원적 의문에 불의 정령왕이 침묵을 지켰다.
과거에도 엘프들은 정령사의 길보다 마법사의 길을 주로 택하였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정령사의 소질이 있는 엘프가 드물었으니 자연스레 정령사가 소수가 된 것이다.
허나 정령사가 소수가 되며 정령사의 소질을 갖춘 엘프들조차 마법사의 길을 택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마법적 재능을 타고난 엘프들이 무리해서 새로운 길을 택할 필요도 없었지. 가끔 마법과 정령을 둘 다 택한 별종도 있었지만 그건 진짜 별종이었고.
게다가 지금은 세계수가 불타며 정령사의 계보도 끊긴 상황이다. 비록 세계수가 불타기 전에 정령과 계약을 한 장로가 있지만, 그 장로마저 300년 동안 정령을 다루지 못했으니 사실상 정령술은 실전됐다고 보는 게 옳다.
그런데 그 역경 속에서 굳이 정령사의 길을 택해?
‘안 하지.’
심지어 장로의 외손녀는 마법의 정점이라 불리는 데다, 은인은 검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그런 확실한 길을 놔두고 정령을 택하는 건 어지간한 용기와 광기가 아닌 이상 힘들다.
– …그러니 열심히 설득해야지.
한참을 침묵하던 불의 정령왕은 겨우 말을 이었다.
– 여차하면 정령계의 보물고를 연다.
– 미쳤,
본능적으로 거친 말이 튀어나왔지만 도로 삼켰다.확실히 그 정도라면 정령사의 길도 택할만하다. 정령계의 보물고는 우리가 수천 년 동안 대륙 각지에서 모은 것들이 모여 있으니까.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불의 정령왕의 의견이 끌렸다. 어차피 쓰지도 않는 보물을 대가로 대륙을 여행할 수 있다면 그보다 남는 장사는 없다.
– 물론 자네 말고 바람과 땅의 의견도─
– 끄에에에에에엑!
불의 정령왕이 말을 완성하려는 찰나, 세계수 쪽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정령왕들끼리 합의를 보는 건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
멀리서 묘하게 익숙한 비명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근처에 요정이랑 정령들이 널려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알아서 대처하겠지.
“─그러니 클라리스를 데려가렴. 클라리스는 엘프의 역사와 전통 문화에도 해박하니, 곧 태어날 아이에게 도움이 될 거란다.”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열심히 할게!”
지금 중요한 건 외조모님이 친히 꽂아넣는 공수부대 인력을 정중히 모시고 가는 거다.
“일이 끝나더라도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모시겠습니다.”
“아핫, 그건 곤란한데.”
트릭시의 말에 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클라리스였지만, 공작가의 진심 접대를 몇 년 동안이나 겪다 보면 정말 돌아가기 싫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엘프 입장에서도 역사와 전통이면 대체 어느 시대 얘기지? 뮤노 제국 시기인가?
‘엄청나네.’
아펠스의 전전 제국 시기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