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09)
로판 속 공무원 509화(510/945)
트릭시와의 결혼식, 세계수 부활과 콘스탄티나 재강림, 교황의 초청으로 인한 공의회 참가, 신혼여행 중 알게 된 세쌍둥이 임신, 온 대륙이 들썩인 구인 공고 대소동.
이 모든 일들을 겪었음에도 여름 방학이 끝나지 않았다.
‘꿈인가?’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분명 숨 가쁘게 지냈고, 실제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정작 달력을 보니 아직 여름 방학 기간이었다. 심지어 개학까지 한 달 정도 남았다.
이상한 일이다. 예전에는 방학만 되면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기분이었는데, 이번에는 방학 기간이 평소의 3배 정도로 늘어난 것 같다. 교장이 마지막 방학이라고 보너스 시간을 넣어준 건가? 배려심 넘치기도 하지.
‘마지막 방학이라.’
유리스, 소피아와 함께 정원을 뛰어노는 티티를 보며 쿠키를 하나 집었다.
방학식 당시에는 결혼식 준비에 정신이 팔려 실감하지 못했지만, 이번 방학은 내 인생 마지막 방학이다. 방학이 끝나면 2학기가 시작되고, 2학기가 끝나면 제과 동아리 부원 전원이 졸업해서 각자의 조국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아카데미 감찰관이라는 직책으로 아카데미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 각국 주요 인사가 모여 대륙의 화약고가 되어버린 아카데미가 정상적인 아카데미로 돌아갈 테니까.
‘마지막.’
곱씹을수록 개운함과 허전함이 공존했다. 처음 이 업무를 받았을 때는 빨리 업무가 끝나기를 바랐는데, 막상 끝이 다가온다고 하니 복잡한 심정이 든다. 아카데미에서 쌓은 인연에 정이 든 것처럼.
확실히 교장이나 교감, 빌라르같이 유능하고 정상적인 사람들과는 그럭저럭 친해졌다. 윗사람에게 치여 고생하는 아랫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더더욱.
그리고 아카데미에 갔기에 마르와 다시 만나고, 리제와 린도 만날 수 있었다. 다소 어색한 관계였던 에리히와 친해진 것도 괜찮은 성과였지.
‘나쁘지 않았네.’
돌이켜 생각해 보면 2년 반 동안의 아카데미 생활은 내 인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 괜찮은 시간이었다. 만약 아카데미 감찰관 업무를 하지 않고 감찰부장으로만 지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적어도 그리 재밌거나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을 거다.
‘그 녀석들에게 고마워 해야 하나.’
픽 웃음을 흘리며 쿠키 옆에 두었던 커피를 마셨다. 개노답 부원들이 제국 아카데미까지 오지 않았다면 나도 아카데미에 갈 일이 없었을 터. 어찌 보면 그 녀석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 아니겠─
‘고맙기는 개뿔.’
잠시 훈훈한 회상 타임을 가지려고 했지만 77년도 시즌 부원들을 떠올리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들이 최근 조용해졌다고 미화할 뻔했어.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그것들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하는 건 옳지 않다. 그것들이 온갖 기행을 펼칠 때마다 뒤에서 수습했으니, 그 대가로 지금의 행복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일방적으로 받은 행복이 아닌 철저한 등가교환이다.
‘조국에서는 정상인으로 살렴.’
그래도 고문과 부원 관계로 지낸 정이 있기에 속으로 소소한 기도를 했다.
기행을 일삼는 건 아카데미에서도 충분하니, 부디 졸업하고 조국으로 돌아가면 평범한 왕자와 차기 성자로 지내라고. 그게 너희의 체면과 국가의 존엄을 위한 길일 거다.
“티티! 그거 먹는 거 아니야!”
– 끼이잉…
“불쌍한 얼굴 해도 안 돼!”
그 와중에 정원에 자란 꽃이라도 뜯어먹었는지, 티티가 시무룩한 얼굴로 꾸중을 듣고 있었다.
티티의 시선이 은근슬쩍 나에게 향하는 걸 보면 말려주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이건 티티의 잘못이 맞기에 외면했다. 매일매일 좋은 재료로 만든 밥을 주고 있는데 왜 애꿎은 풀이나 뜯어먹는 건지. 누가 보면 굶기는 줄 알겠어.
‘혹시 채식주의자인가?’
정말 그런 이유라면 납득할 수 있다.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취향이라면 존중하는 것이 마땅한 법 아니겠나. 오늘 저녁에는 고기랑 채소를 동시에 줘봐야지.
“본 척도 안 하네.”
– 멍!
그리고 그날 저녁, 티티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고기만 먹고 드러누웠다.
이럴 거면서 정원에서는 대체 왜.
태양이, 하늘이, 초목이는 트릭시의 품속에 자리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런 존재감도 보이지 않았으나, 첫눈이는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자라나는 게 보였다.
“칼, 딸기 좀 구해줄 수 있어요?”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는 그만큼 많이 먹는 법이다.
“딸기? 알았어, 금방 다녀올게.”
마르의 품속에서 곤히 자고 있던 첫눈이가 잠에서 깨어났는지, 평온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마르가 갑작스레 딸기를 요구했다.
봄이 제철인 과일을 여름에 구하기는 어렵지만 돈과 돈과 돈이 있다면 불가능한 게 어디 있겠나. 애초에 마법이 있는 세상에서 제철이라는 단어 따위는 ‘더 싸게 먹을 수 있는 시기’에 불과하다.
“혹시 다른 거는 필요 없어?”
“으음,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 생각나면 바로 연락 줘.”
“후후, 알겠어요.”
배시시 웃는 마르의 모습에 순간 쓴웃음이 나올 뻔했다. ‘지금은’이라는 말이 이렇게 두려운 적이 있었던가.
임산부의 입맛이 오락가락한 건 이래저래 주워들은 것이 있기에 잘 알고 있다. 변화무쌍한 입맛과 입덧은 임산부의 숙명 아닌 숙명 같은 거라 아무리 노력해도 조절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안다.
그래도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움직이는 건 별개의 문제다. 사과가 먹고 싶다고 해서 가져왔더니, 그사이에 귤로 입맛이 변해서 나 홀로 사과를 씹어 먹은 적도 있을 정도니까. 지금은 딸기를 원하는 마르가 5분 후에는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변덕도 심해.’
딸기 원정을 떠나기 전, 사랑스러운 첫눈이가 있는 마르의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변덕에 시달리는 것이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딱히 싫지도 않다. 무언가를 먼저 요구한 적이 극히 드문 마르가 나에게 의지하는 것도 첫눈이 덕분이고, 예비 아빠로서 자식이 먹고 싶은 걸 챙기는 건 당연한 일.
…대신 새벽에 스테이크를 찾는 건 조금 참아줬으면 한다. 그건 첫눈이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마르한테는 힘들어. 새벽에 스테이크를 먹고 잠에 들면 아침에 얼마나 힘들겠냐고.
“아, 칼.”
“응?”
“그으, 키위도 부탁해요.”
그렇게 말하는 마르의 얼굴은 묘하게 붉어져있었다. 자기 입으로 지금은 다른 게 필요 없다고 했는데, 약 30초 만에 번복하게 되었으니 민망한 모양.
당연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첫눈이가 이 아빠를 배려해서 바로 마르의 입맛을 자극한 것 같아 기쁠 따름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효도를 하네.’
누구 자식인지 참 예쁘기도 하지.
***
내 부탁을 듣자마자 빠르게 사라지는 칼을 보니 고맙고도 미안했다.
귀찮을 수도 있는 일을 매번 흔쾌히 들어주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변덕스러운 요구를 매번 들어주는 것이.
‘직접 갈 필요는 없는데.’
그리고 말 한마디면 사용인들을 부릴 수 있는 귀족이면서 직접 움직이는 것이.
칼은 요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내 부탁을 남에게 넘기지 않았다. 아무리 멀리 있는 것이라도 직접 움직였고, 귀한 것이라도 직접 찾아 다녔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이 놀랍고도 당황스러워서 최대한 먹고 싶은 걸 참기도 했다. 내가 뭘 말하기만 하면 자다가도 뛰쳐나가는데 어떻게 입을 열겠어.
하지만 억지로 참을수록 티가 나는 법이라 결국 칼에게 들켰고,
“자식은 부부의 보물인데 마르만 고생하는 건 좀 그렇잖아. 게다가 첫눈이한테 아빠도 너를 먹여 살렸다는 말을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웃음을 터뜨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칼의 모습에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었다. 그리고 같은 사람에게 여러 번 반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어머님도 남편이 가장 멋지게 보일 때는 신혼이라고 하셨지만, 그걸 감안해도 칼은 너무 멋지고 상냥했다. 어떻게 귀족이 저런 면모를 보일 수 있을까. 누가 저 사람을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한 제국의 실세라고 생각할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배를 쓰다듬으며 첫눈이에게 말을 건네자, 첫눈이는 발길질을 하며 대답했다.
이 기묘한 타이밍에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첫눈이가 정말 내 말을 듣고 이러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단순한 우연일 확률이 더 높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첫눈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는 걸, 자기 아빠를 좋아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
한참이나 배를 쓰다듬다 나지막한 탄성을 냈다.
먹고 싶은 게 하나 더 생겨버렸다.
***
키위는 금방 구했지만 의외로 딸기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 제도의 서민층이면 지방의 중산층 수준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만 모여 사는데 제철이 지난 과일을 굳이 찾겠습니까? 사소한 디저트를 먹더라도 맛을 따져서 먹지.
도저히 답이 없어 신혼 선배인 2과장에게 연락을 걸자 그런 답변이 돌아왔다.
이해하기 어려운 답변이지만 그러려니 싶었다. 이미 나보다 먼저 부인의 입덧에 시달린 경력자기도 했고, 2과장의 가문은 유통 쪽에 발을 걸친 가문이기도 하니까. 내가 모르는 사정을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 그래도 뭐, 아예 수요가 없는 건 아니라 뒤져보면 나오기는 합니다.
“품질은?”
– 당연히 좋죠. 제도에서 허접한 물건을 파는 놈이면 애초에 제도에 발을 붙이지도 못해요.
자신감 넘치는 답변이라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 제도 어딘가에 있기는 하구나. 그럼 됐어.
– 아, 부장님.
“왜.”
– 귀찮게 하나하나 알아보면서 제도 시장을 뒤지실 바에는, 아예 저희 가문과 계약이라도 맺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잠시 머리를 굴렸다. 2과장의 가문과 계약을 맺으면 지금처럼 찾지 못한 음식을 쉽게 찾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일개 상인이나 점포도 아닌 귀족 가문과의 계약을 소규모로 체결하기는 민망하다. 마르가 임신 기간 동안 먹어봤자 얼마나 먹는다고 굳이 가문 단위의 계약을 할 필요는 없─
– 부인도 여섯 분이시라 몇 년 동안은 내내 이러실 것 같은데요.
“계약서 보내.”
– 옙.
잠깐 망각했던 부분을 2과장이 일깨워줬다.
부인 여섯 명이 임신을 하고, 그 임신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 2과장의 말처럼 몇 년 동안은 이 고생을 해야 한다.
‘이게 가장의 무게인가.’
너무도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