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11)
로판 속 공무원 511화(512/945)
내 손을 붙잡은 세라의 손을 보니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세라와 친구로 지내는 동안 셀 수 없이 자주 잡은 손이고, 세라의 고백을 들은 이후로는 감히 잡기조차 두려웠던 손이다. 고백에 제대로 답도 주지 않은 주제에 먼저 접촉을 하는 건 고백이라는 용기를 낸 당사자에게 큰 실례니까.
정작 용기가 하늘에 닿아버린 세라와 제노비아 누나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내 손을 낚아챘었다는 게 유감스러운 일이다.
‘분명 평소에도 잡는 손이었는데.’
아무튼 세라와 나란히 걸으면서도 물끄러미 손을 바라봤다. 나도 세라도 달라진 건 없다. 언제나 같은 손이고, 언제나 같은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요즘 세라의 모습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내 눈과 머리는 이전과 같다고 말하고 있으나, 가슴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역시 마음이 중요한 건가.’
세라를 단순한 친구가 아닌 여자로 인식하자 가슴이 두근거렸고, 세라를 약혼녀로 여기니 모든 것이 편안했다. 바뀐 것이라고는 고작 둘 사이의 관계뿐인데 모든 게 변한 것처럼 느껴지니 신기할 따름이다.
아니, 관계가 바뀐 걸 고작이라고 할 수는 없나? 연애를 해봤어야 알지.
‘연애라.’
내 인생과 거리가 먼 단어를 떠올리니 픽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를 좋아한 것은 루이제가 처음이었고, 루이제마저 반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짝사랑한 것이 전부다. 19년 인생을 생각하면 아주 찰나에 불과한 시간.
그랬던 나에게 약혼녀가 생겼다. 그것도 무려 둘이나.
심지어 내가 먼저 제안해서.
“에리히?”
갑자기 웃음을 흘리자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확실히 수련 중에 끌려가는 놈이 혼자 히죽거리면 이상하게 생각할만하지. 나였으면 은근히 거리를 벌렸을 텐데, 여전히 손을 놓지 않는 걸 보면 세라의 넓은 마음씨를 알 수 있다.
“그냥. 이렇게 좋은 걸 왜 이제야 하나 해서.”
세라의 손을 잡아 당기며 품에 안자 세라의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딱 이런 반응을 보기 위한 대답이었지만 진심이기도 하다. 세라의 마음을─ 제노비아 누나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니 이렇게 좋지 않나. 왜 지금까지 둘의 마음을 부담스러워하고,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두려웠었나?’
어쩌면 친한 친구나 누나가 아닌 연인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것, 그 새로운 관계 속에서 내가 미숙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두려웠을 수 있다.
무인을 자부하는 주제에 부끄럽고도 추한 일이었다. 고작 그런 걸 두려워해서 상대가 먼저 고백하게 만들다니. 수십 년이 지나더라도 잊지 못할 어두운 역사잖아.
“좋은 걸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급속도로 몰려오는 씁쓸함에 세라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 기다림을 몇 년이나 더 이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옆에서 결혼이니 임신이니 신혼여행이니 자극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른 채 지냈을 거다.
‘형이 아니었으면 정말 늦었겠지.’
형이 부인들과 행복해하는 모습을, 부인들이 형과 함께 지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움직인 거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고, 사랑을 주고 싶다는 깊숙한 욕망을 눈치챘으니까.
“괜찮아. 기다린 만큼 많이 하면 되잖아.”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목소리에 슬며시 세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세라가 아담하기는 하구나.
‘이런 애의 속을 터지게 만들었다니.’
내 죄가 너무도 크다.
***
몇 분 정도 에리히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슬그머니 떨어질 수 있었다. 솔직히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에리히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우선 순위를 생각하면 에리히를 식사 자리로 끌고 가는 게 먼저다.
“오늘은 제때 오셨군요.”
그렇게 에리히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니, 어머니가 흐뭇한 미소를 지내며 입을 열었다.
“비겁해, 유모. 세라를 보내면 안 올 수가 없잖아.”
그런 어머니를 향해 에리히가 너무하다는 듯 불만을 늘어놓았다.
조금 언짢았다. 마치 내가 오지 않았다면 오늘도 굶거나 대충 먹었을 거라는 얘기잖아.
“세라?”
살짝 에리히의 옆구리를 꼬집자 에리히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제 유모가 아니라 다르게 불러야 하지 않아?”
기껏 꼬집었는데도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는 에리히가 얄미워 일부러 짓궂은 말을 건네자,그제야 에리히의 얼굴에 당혹감이 보였다.
그런데 사실이지 않나? 나랑 에리히는 이제 약혼 관계인데, 곧 장모가 될 어머니한테 여전히 유모라고 부르는 건 이상하잖아. 은근히 선을 긋는 것 같기도 해서 슬프기도 하고.
“전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물론 정식으로 부부가 된 이후에는 장모님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지만요.”
“그, 노력할게. 아직 유모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를 않더라고.”
어머니도 쿡쿡 웃음을 흘리며 동참하자 에리히는 어색히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빠른 항복에 살짝, 아주 살짝 언짢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와 어머니 사이에 끼어 어쩔 줄 몰라 하던 에리히는 뒤이어 나타나신 예비 시어머님의 합류에 넋이 나가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약혼녀를 오고 가게 만들면 어떻게 하니. 안 그래도 아직 허약한 애인데.”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세라가 올 줄은 몰라서…”
“약혼녀가 직접 찾아갈 정도로 걱정을 끼친 게 잘못이란다.”
무슨 항변을 하든 꾸지람을 듣는 상황에 에리히는 입을 뻐끔거리다 씁쓸히 고개를 숙였다. 원인을 본인이 제공한 순간부터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세라 너도 약혼자라고 너무 봐주지는 말렴.”
“네, 명심할게요.”
졸지에 나까지 혼났지만 에리히를 놀리기 위한 장난의 일종이라는 걸 알기에 웃을 수 있었다. 애초에 내가 어머니의 부탁으로 에리히를 데리러 갔다는 건 시어머님도 알고 계시니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한 사람을 놀리는 상황이라 언뜻 보면 따돌림처럼 보이기도 하나, 그동안 에리히 때문에 속이 타들어간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에리히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도 에리히가 이상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수련에 열중하다고 잠깐 실수한 거잖아요. 너무 뭐라고 하지는 말아 주세요.”
물론 속이 타들어갔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에리히는 옛날보다 더욱 멋지고 당당한 남자다. 과거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 아예 놀리지 않는 건 힘들지만, 과하게 놀리는 건 참아야지.
“봐주지 말라고 하자마자 그러면 어떡하니.”
“헤헤, 죄송해요.”
다행히 시어머님도 같은 생각이셨는지 그 말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에리히를 구박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에리히는 나에게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
나도 같이 놀리고 있었는데.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광경이다. 저 바보가 그때 그 박력 넘치던 에리히랑 같은 인물이 맞는 걸까?
“그때부터 계속 생각했어. 내가 너의 고백을 받아도 될지, 나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
“그런데 점점 욕심이 생기더라. 설령 나에게 자격이 없더라도 나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나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웃게 만들고 싶다고.”
“부끄럽지만 형의 영향인 건 맞아. 형이 없었으면 아직까지 고민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래도 형의 영향을 받았을지언정, 형의 결정이 아닌 내 결정이야.”
“날 기다려준 걸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내 인생의 반을 너한테 맡길 테니, 앞으로 기다릴 일이 생긴다면 내가 너를 기다리는 걸 거야.”
‘맞겠지.’
이틀 전, 약혼 관계부터 시작하자던 에리히의 말이 떠오르자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분명 같은 사람이야. 멋진 모습도 맹한 모습도 전부 내가 사랑하는 에리히야.
비슷한 말을 제노비아 언니에게도 했다는 건 조금 유감이지만, 나랑 제노비아 언니에게 자신의 인생을 반씩 공평하게 준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예비 부인들에게 넘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넘어갈 수 있어.
“흐헿.”
나도 모르게 얼빠진 웃음소리를 내서 황급히 입을 막았다.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니 어머니와 시어머님은 못 들으신 것 같─
“프흐.”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밝은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세운 에리히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바보.’
이럴 때는 못 들은 척 넘어가는 건데.
아직 에리히의 둔감함이 전부 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
어머니와 연락을 마친 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 봤다.
‘와.’
와.
‘꿈인가?’
볼을 강하게 꼬집자 고통은 그대로 느껴졌다.
일단 꿈은 아니다.
‘어머니가 꿈을 꾸신 건가?’
불효자스러운 가능성마저 고려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의 표정과 목소리는 잠에 취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믿기 어렵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반드시 와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그날이 찾아오니 어안이 벙벙하다.
‘에리히가 약혼.’
그 둔감한 새끼가 드디어.
순간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남자는 태어나서 한 번, 원치 않은 취직을 했을 때 한 번, 사직서가 반려됐을 때 백스무 번을 우는 법인데, 고작 동생의 약혼 때문에 눈물을 보일 뻔했다.
하지만 이건 그만한 감동이 있는 일이다. 옆에서 대놓고 좋아하는 티를 내도 ‘우린 친구잖아?’ 같은 행동이나 하는 미친놈.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누나가 가족이었으면 좋겠다.’ 같은 말이나 하는 분탕쟁이.
그랬던 에리히가 두 명의 고백을 받아들이고 정식으로 연인이 되었다. 심지어 약혼 관계를 맺자고 본인이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크라시우스의 경사다.’
비록 에리히가 어떤 심정의 변화가 있어서 약혼을 제안하고,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이제야 내 귀에 들어왔는지 의문이기는 하나─ 솔직히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런 사소한 것이 아니라 에리히의 약혼이라는 결과 아니겠나.
이 형의 결혼이 네 번이나 남아있기에 동생이 결혼하는 건 나중의 일이 되겠으나, 그만큼 화려한 결혼식을 보장하는 것이 도리일 터.
내가 어떻게든 5공작 전원을 에리히 결혼식 때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