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12)
로판 속 공무원 512화(513/945)
트릭시의 임신을 확인한 후부터 지금까지, 당연하게도 나는 출근이라는 사악한 단어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공의회 참고인 초청 때문에 신혼 휴가가 연기된 것이니 참고인 역할이 끝났다면 마땅히 신혼 휴가를 즐기는 것이 옳다.
물론 휴가라고 저택에 처박혀 평화로운 히키코모리 생활을 즐긴 건 아니었다. 마르와 첫눈이가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언제라도 뛰쳐나갔고, 슬슬 세쌍둥이들도 먹고 싶은 게 있다며 항의하기 시작했으니까.
“뺘아!”
“전하, 저는 수염이 없습니다.”
그리고 3, 4일에 한 번 정도는 대녀인 황태녀와 놀아주기 위해 황후궁으로 출근 아닌 출근을 하고 있다.
휴가 중에 황실의 인원과 만나는 건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이나, 그 명분이 황태녀와 친해지기 위해서라면 납득할 수밖에 없다. 아기하고는 어릴 때부터 얼굴을 익혀야 자라서도 친근하지 않겠나. 대부로서 대녀와 어색한 사이가 될 수는 없다.
대신 볼 때마다 턱 쪽에 훅을 날리는 건 참아줬으면 한다. 이 미천한 대부에게는 상황 같은 멋진 수염이 없어요.
‘가짜 수염이라도 달아야 하나?’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있지도 않은 수염을 잡으려는 황태녀. 그런 황태녀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수염이 없는 사람에게도 이럴 정도면 얼마나 상황의 수염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이 정도면 가짜 수염이라도 달고 오는 게 예의가 아닌가 싶다. 어차피 가짜 수염이면 잡아당겨도 아프지 않을 거고.
‘나쁘지 않네.’
아기와 놀아주기 위한 장난감이라 생각하면 제법 괜찮은 생각이다.
‘황제 것도 챙겨야지.’
나만 황태녀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 불충한 짓이니까. 황제도 가짜 수염을 단 대가로 황태녀의 웃음을 볼 수 있다면 분명 기뻐할 거다.
아님 말고.
“부아우!”
그렇게 한참이나 양팔을 허우적거리던 황태녀는 심통이 난 것처럼 온몸으로 버둥거렸다.
아니, 애초에 없는 수염을 찾은 건 너면서 왜 나한테 그래.
“미안해요, 장관. 평소에는 착한 아이인데 이상한 부분에서 투정을 부리더라고요.”
불만 가득한 옹알이 소리에 황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황태녀를 품에 안─
“뺘!”
으려던 손을 황태녀가 거부했다.
“아.”
“어머나.”
그 당찬 행동에 나도 황후도 놀라고 말았다. 어미의 품을 거부하는 아기라니, 너무 이른 사춘기 아닌가.
이윽고 본능적으로 황후의 눈치를 살폈다. 침대에 누워있던 황태녀가 황후의 손을 쳐냈다면 웃어넘길 해프닝이나, 하필 내 품에 있는 상태로 쳐냈다. 조금 과하게 해석하면 황후가 아닌 나를 택했다고 여길 수 있는 상황. 초보 엄마인 황후 입장에서는 가슴이 찢어지는 일일 거다.
‘망할.’
그리고 황후의 은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자마자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후후, 샤를로테가 대부랑 친한 것 같아 다행이네요.”
“과찬이십니다. 아마 소신에게 수염이 없는 것을 꾸짖기 위함이시겠지요.”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나, 지금만큼은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곱게 황후궁을 나가지 못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왜 이럴 때는 없는 건데.’
문득 집무실에 처박혀 업무를 보고 있을 황제가 떠올랐다. 평소에는 내가 올 때마다 황태녀 옆에 붙어서 괴상한 얼굴로 까꿍거리던 놈이, 누구라도 있었으면 싶을 때에는 보이지 않는다.
쓸모없는 놈. 자식을 방치하는 네놈을 아비라 할 수 있겠느냐.
다행히 황후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아니면 내 품 안에 있는 게 질린 건지─ 황태녀가 황후한테 안아달라고 팔을 뻗더라.
먼저 쳐낸 주제에 도로 팔을 뻗는 건 뭔가 싶지만,황후는 마냥 좋은지 방긋 웃으며 황태녀를 품에 안았다. 덕분에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가 급속도로 훈훈해졌었지.
“그전까지는 네발로 기어나가야 하나 고민했었어.”
“딸을 뺏은 도둑놈이면 네발로도 부족할 것 같은데요.”
무사히 황후궁에서 물러난 후, 아찔했던 무용담을 에리에게 풀어놓자 에리는 솔직한 감평을 들려줬다.
서운한 말이지만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나였어도 첫눈이가 나를 거부하고 애꿎은 놈 품에서 버티고 있으면 가슴이 찢어졌을 터. 아마 내 가슴이 찢어진 만큼 상대를 찢어버리고 싶었을 거다.
“그래도 황후 폐하 앞이라서 다행이었지. 황제 폐하 앞이었으면 진작에 멱살 잡혔을걸?”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만약 황태녀에게 거부 당한 것이 황제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새끼 성격상 눈이 뒤집혀서 온갖 괴상한 관례와 규칙으로 나를 두들겨 팼었을 거다. 심지어 법적으로 부당한 것도 아니라 항의조차 못 하는 끔찍한 폭력을.
“글쎄요. 황후 폐하도 평범한 분은 아닌데…”
내 말에 에리는 다소 오묘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에리의 말처럼 황후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공작가 출신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1황자 시절 황제와 혼인을 맺은 여장부 아닌가. 그런 사람이 평범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하지만 그런 여장부인 만큼 마음씨도 온화하고 자비롭다는 게 귀족들과 관료들의 평이다. 황제보다 너그럽고 상냥한 사람이라는 건 확실하니, 에리가 저렇게 난색을 표할 일은 아닌데?
‘뭔가 있나?’
에리가 학창 시절에 황후와 친한 선후배 관계였던 걸 생각하면 황후의 사적인 모습을 알 확률이 높기는 하다.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황후잖아. 황후가 난폭하거나 기이한 모습을 보이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혼난 적이 있었겠지.’
짧은 고민 끝에 그럴듯한 결론을 내렸다. 기행을 일삼던 에리가 황후에게 호되게 혼난 적이 있었을 거라고. 그런 경우라면 에리의 반응을 납득할 수 있다.
평소에는 상냥하지만 엄할 때는 엄한 황후. 오히려 좋네.
“아! 지금 이상한 생각하고 있죠!?”
“아니, 전혀.”
그 와중에 자신을 안쓰럽게 쳐다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에리가 볼을 부풀린 채 항의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에리에 대한 애정과 별개로 신뢰도는 썩 높지 않다. ‘당연히’ 에리가 잘못해서 황후에게 혼났다는 추론이 자연스레 나올 수밖에 없다는 의미.
이런 연인이라 미안하다.
***
어느새 덩치가 커진 1호, 2호, 4호, 5호에게 간식을 준 후, 황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거라.”
– 멍! 멍멍!
– 왈왈!
“어허.”
– 끼이잉…
그리고 황후궁 정문에서 내 뒤를 따라온 녀석들을 잠시 대기시켰다. 순하고 애교가 많은 것들이지만, 이제는 황태녀보다 큰 덩치를 자랑하는 데다 털까지 날리고 있다. 아직 생후 1년도 되지 않은 황태녀 앞에 데려가기에는 무리가 있지.
“황태녀가 조금만 더 크면 너희도 데려가주마.”
언젠가는 함께 들어가겠다는 약속을 하자 꼬리를 축 늘어뜨리던 녀석들이 다시 헥헥거리기 시작했다.
개들이 영리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 녀석들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이건 단순히 영리하다는 수준을 넘지 않았나.
‘황태녀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어.’
수명은 다르지만 나이는 얼추 비슷하니 황태녀의 성장기 때는 이 녀석들도 함께할 거다. 부디 황태녀에게도 나에게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를.
“상황 폐하.”
그렇게 꼬리를 떼어놓고 황후궁 내부로 들어가자, 황후가 시녀들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맞이해주었다.
“옥좌에서 내려온 늙은이 하나 때문에 이리 마중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황후 폐하.”
“며느리가 시아버님을 홀대하면 신민이라고 황실을 공경하겠습니까?”
나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닌 일개 노인이니 편하게 있으라는 말에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반박했다. 비록 황제는 아니지만 여전히 자신의 윗사람이며, 황실이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으면 누가 황실을 공경하겠느냐고.
“역시 황후 폐하께서는 뭇 귀족과 신민들의 귀감이십니다.”
“과찬이십니다, 상황 폐하.”
틀린 말은 아니기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황후는 황태자비 시절에도 하고 싶은 말을 당당히 했었지. 상황으로 물러난 시점에서는 황후를 이겨낼 수 없다.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는 황태녀는 왼손에 이상한 물건을 쥐고 있었다.
“황후 폐하.”
“예, 상황 폐하.”
“황태녀가 들고 있는 저게, 무엇인지요.”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털뭉치라 황후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저게 대체 뭐지?
“감찰성 장관의 수염입니다.”
이윽고 작게 웃음을 흘린 황후의 말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장관이 수염을 길렀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고, 설령 길렀다 하더라도 그것이 왜 황태녀의 손에 있는가.
“황태녀가 상황 폐하의 품에 안긴 이후로, 상황 폐하와 같은 근엄하고 늠름한 분을 그리워했습니다. 그 덕에 장관이 가짜 수염까지 달고 와 황태녀와 놀아주었고요.”
그래도 황후의 설명에 조금은 납득할 수 있었다.
“장관이 대부의 역할에 충실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실로 제국의 홍복이지요.”
황후의 말을 뒤로하고 황태녀의 오른손으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음.’
그러자 황태녀는 기다렸다는 듯 내 손가락을 쥐었다. 여전히 잠에 빠진 상태로.
매번 겪는 일이지만 매번 색다른 기분이다. 내 자식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도, 경험하지도 못했었으니.
“이리도 푹 자고 있는 걸 보면 장관이 잘 놀아주고 갔나 봅니다.”
“수염이 뜯겼을 정도니 오죽했겠습니까.”
그 말에 다시 황태녀의 왼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짜 수염임에도 저리 처참하게 뜯길 정도면 장관이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곧 아카데미 감찰관 업무를 재개해야 하니, 유독 열심히 놀아준 것도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뒤이은 황후의 설명에 슬며시 눈을 감았다.
2년 전, 타국의 주요 인사들이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한 초유의 사태. 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급하게 파견을 간 감찰성 장관.
‘반년 후면 귀국이로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2년 전에는 그 자들이 입학한 이유가 제국을 합법적으로 염탐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들은 첫 여름 방학 때 조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제국에 남았었다.
허나 그 이후로는 꼬박꼬박 귀국하고 있다. 혹시 방학이 아닌 학기 중에 행동하는 게 아닌가 싶어 따로 살펴보기도 했지만, 아카데미 활동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졸업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합법적으로 제국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끝나고 있다.
‘도대체 무슨 목적인 건지.’
이제 염탐 때문에 왔다는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2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자들이, 제국에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귀국하는 자들이 염탐을 노린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골치가 아픈 것이다. 염탐이 아니면 도대체 왜 제국에 온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장관이 알기를 바라는 수밖에.’
장관의 업무 종료까지 반 년.반 년이 지나면 장관과 친히 대면을 해야겠다.
상황으로 물러났으니 관료들에게 개입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 일만큼은 사정을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