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15)
로판 속 공무원 515화(516/945)
마지막 방학은 마르와 첫눈이를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닌 영광의 시간이었으나, 마르가 24시간 무언가를 먹는 기계는 아니기에 실질적으로 돌아다닌 시간은 적었다. 밖에 있던 시간이 아무리 길어봤자 하루에 2시간뿐일 정도로.
그 덕에 방학이라는 단어와 걸맞은 평온하고 느긋한 휴식을 즐길 수 있었지만,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놀았다는 건 아니다.
“현지인의 조언과 교차 검증을 통해 작성한 자료입니다. 이번 학기가 지나면 도움을 드리기 어려울 테니, 제 성의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아, 아니,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방학 동안 틈틈이 작성한 북방의 역사와 문화, 문자에 대한 자료.
북방을 연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원피스가 따로 없는 자료를 건네자 게르하르트는 감동한 듯 말을 더듬었다.
“게르하르트 씨를 돕기로 한 순간부터 게르하르트 씨의 연구는 제 일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이렇게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주는 사람이 흐뭇할 정도로 고마워하는 모습이라 절로 미소가 나왔다. 원래 선물은 주는 사람의 정성과 받는 사람의 리액션으로 이루어지는 법.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물은 최고의 선물이다.
심지어 이 자료는 내 기억과 경험으로 이루어진 자료가 아니다. 이전까지야 북방이 적대 세력의 영역이어서 기억에 의존해야 했지만, 이제 북방과 유목민은 명백한 제국 세력이지 않나. 당장 통신구로 연락을 걸면 상세히 설명을 해줄 유목민 출신 대영주가 열이 넘는다.
‘다들 협조적이기도 했지.’
게다가 ‘북방 연구에 인생을 바친 교사’를 언급하니 대영주들은 묻지 않은 것까지 친절히 말해줬다.
유목민도 사람인 만큼 자신들을 연구하는 교사에 대한 호감이나 존중의 표현일 수 있으나, 누구보다 유목민의 제국화를 추구하는 대영주들은 북방이 제국에게 있어 친숙한 지역이 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제국의 북방 연구가 깊어질수록 대영주들에게는 이득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런 것까지 게르하르트에게 말할 생각은 없다. 자세한 속 사정은 멋이 없잖아.
“그러니 받아주십시오. 정 부담이 된다면 게르하르트 씨 개인의 지식욕이 아닌, 제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받는다 생각하시고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평생이 걸려도 부족하겠지만 언젠가는 이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아무튼 나름의 덕담도 덧붙이자 게르하르트는 완벽한 90도를 뽐내며 허리를 숙였다.
그 와중에 은혜를 갚겠다 맹세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게르하르트의 반 정도만 됐어도 대륙은 웃음만 넘치지 않았을까.
‘이대로 끝내기에는 아쉬운 인연인데.’
이윽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자그마한 욕망이 생겨났다.지성과 인성이 결합된 훌륭한 인재를 계속 곁에 두고 싶다는 당연한 욕망이.
그래, 이건 당연한 욕망이다. 막 아카데미를 졸업한 파릇파릇한 아이들도 잡아가는 판국에 숙련된 아카데미 교사면 말할 것도 없다.
아니, 애초에 북방 파벌의 파벌장으로서 북방 연구에 인생을 바친 사람을 그냥 놓아주는 건 도리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외면하더라도 나는 게르하르트를 외면할 수 없다.
‘스카우트는 힘들겠고.’
다만 아카데미 교사라는 직함은 학자와 교육자에게 있어 대체 불가능한 명예이자 권력이다. 아무리 나라도 그것보다 더한 직책을 안겨주기 힘들다.
흐으으으으음.
“그러고 보니 게르하르트 씨. 연구는 글자로 보는 것보다 현장에서 체험하는 게 더 좋다고 하셨지요?”
“아,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현장보다 뛰어난 자료는 없으니까요.”
마치 늦둥이를 대하듯 흐뭇한 표정으로 자료를 보던 게르하르트는 내 말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혹시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타입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은근히 아쉽다는 표정이 나오는 걸 보면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보다 돌아다니는 걸 선호하는 성향 같다. 지금까지는 북방에 갈 수 없어서 강제 책상 선호자가 되었을 뿐.
“그럼 앞으로 북방 연구가 더욱 활력을 얻겠군요.”
그 말과 함께 품속의 명함을 꺼내서 서명을 했다.
틈만 나면 졸업생들에게 뿌리고 다니는 추천장이 만들어졌으나, 이것만큼은 추천장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될 거다.
“제가 다행히 북방을 관리하는 대영주들과 약간의 친분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이 명함을 보여주고 학술적 연구를 위해 왔다고 하면 출입이 막히는 곳은 없을 겁니다.”
파벌장 공인 프리패스라는 말에 게르하르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사실 북방은 아직까지도 일반인들에게 있어 미지의 영역이다.제국의 영토가 된 지 이제 겨우 1년이 되어가는 수준인 데다,넓은 영토에 비해 인구는 적고, 그마저도 이리저리 흩어져 살며, 그와 달리 짐승은 많다. 빈말로라도 일반인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고 하기 힘든 수준.
덕분에 북방 주둔군 소속 군인, 북방과 거래하는 상인 정도를 제외하면 본토인의 북방 출입은 통제되고 있지만─게르하르트는 내 이름을 받았다. 북방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거부는커녕 호위까지 붙을 거다.
“저, 출입이 막히지 않는다면…?”
“국경만 넘지 않는다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내 확답에 게르하르트의 허리는 90도를 넘어 기적의 120도까지 도달했다.
휘하로 둘 수 없다면 이렇게라도 가까이 둬야지. 북방 전체가 내 관할이나 마찬가지잖아.
‘내 관할…’
조금 씁쓸하다. 어쩌다 그 광활한 영토가 일개 백작의 관할이 되어버렸을까.
이게 다 팔자에도 없던 파벌장을 나에게 권한 황제 때문이다. 추대한 건 북방 대영주들이지만 아무튼 그 새끼 때문이다.
***
요즘 들어 라테르가 의욕적으로 변한 것이 느껴졌다.
“그 망할 비숍 좀 그만 들이밀면 안 되나?”
“이게 재미인데 이걸 포기하라고?”
“빌어먹을.”
물론 의욕이 넘치는 것과 실력은 별개의 문제지만, 저번 학기보다 열정이 생긴 건 확실하다.
평소의 라테르가 나태하고 무기력했다는 건 아니다. 단지 라테르라면 보이지 않았을 급진적이고 과격한 수가 최근 자주 보였다. 마치 더 이상은 뒤가 없다는 것처럼.
‘정말 없기는 하지.’
매우 유감스럽게도 이번 학기는 우리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마지막 학기다. 쿠키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족구를 하며 몸을 풀고, 체스를 하며 머리를 굴리는 것도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다.
허나 졸업을 코앞에 둔 지금까지 라테르가 체스로 나를 이긴 적은 한 번도 없다.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쯤 되면 나도 지기 싫거든.’
만약 우리가 승패를 번갈아 가면서 겪었다면, 라테르가 자신의 승률을 높이기 위해 이를 악문 거라면 적당히 어울려줬을 거다.
그런데 내 승률이 라테르보다 높은 수준을 넘어 백전백승인 상황이다. 이 완벽한 전적에 흠집을 내고 졸업하는 건 나도 싫지. 실력으로 지는 거면 어쩔 수 없지만 봐줘서 지는 건 피해야 한다.
‘하여간 이 녀석도 정상은 아니야.’
이를 아득바득 가는 라테르를 보다 픽 웃음을 흘렸다. 다른 녀석들은 나에게 시달리다가 자기들끼리 체스를 두는데, 라테르는 홀로 꿋꿋하게 도전하고 있다. 꾸준히 패배 전적을 쌓으며 꾸준히 나를 상대하고 있다.
같은 상대를 여러 번 놀리는 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상대가 패배를 감수하며 승부를 거는데 피하는 건 기사의 도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라테르를 상대할 때는 온갖 수를 동원하고 있다. 듣도 보도 못한 스타일로 정신을 흔들고, 도발을 통해 다시 한번 흔든다. 그것이 내가 라테르에게 보이는 최고의 경의.
‘반 대항전 때는 난리 나겠어.’
체스로 시작한 생각은 이윽고 반 대항전까지 흘러갔다. 라테르와 승부를 봐야하는 건 체스만 있는 게 아니지.
아니, 오히려 반 대항전이 진짜다. 체스 결과는 우리 동아리만 알고 끝이지만, 반 대항전은 아카데미 전체가 아는 공개적 대결이니까.
‘얘도 칼을 갈았을 텐데.’
그리고 내가 하는 생각은 이 녀석도 하고 있다고 보는 게 옳다. 내가 반 대항전을 진짜로 여기는 것처럼 이 녀석도 반 대항전의 승리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을 거다.
아니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고작 체스로도 이를 가는데 반 대항전을 그냥 넘긴다? 그건 가치관이 뒤틀려도 단단히 뒤틀린 사람이어야 가능한 일.
그러니 나도 진심으로 간다. 아르메인의 검과 유벤의 지팡이 중, 어느 쪽이 더 강한지 우열을 가리기 위해.
“체스 두는 사람 어디 갔나?”
그런 의미에서 끙끙거리는 라테르를 향해 자그마한 도발을 던졌다. 오늘의 도발이 내일의 승리에 기여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너 이…!”
당연하게도 효과는 확실했다.
조금 신기하기는 하다. 생긴 건 피도 차가울 것 같은 얼음 마법사면서 의외로 성격이 불 같단 말이야.
‘나 때문에 변한 건가?’
그렇다면 유감이다.
***
올해 들어서 아카데미 돌아가는 사정에 조금 어두워지기는 했다. 마르가 학생회일 때는 자연스레 아카데미 일정이나 업무 진행 상황도 주워듣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럴 방법이 없지 않나. 괜히 일정 좀 듣겠다고 학생회실에 쳐들어가면 남들이 보기에 이상하다.
‘누가 보면 감찰하러 가는 줄 알지.’
나도 주에 한두 번 정도 까먹지만, 내가 아카데미에 상주하는 공식적인 이유는 아카데미 감찰이다. 감찰관이 학생회실에 기습 방문을 한다면 기습 감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카데미 상황에 어둡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교장이나 교감이 알려주니까. 먼저 나서서 일거리를 물고 오는 건 바보나 할 일이다.
그런데 그런 나조차 최근 아카데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있다.
“쟤네 왜 저래?”
창문 밖으로 보이는 작은 운동장. 그곳에서 열정적인 대련을 하고 있는 에리히와 류티스를 바라봤다. 라테르도 한쪽에서 쉬지 않고 마법을 쏟아내는 것이, 마치 전장에 참여한 베테랑 마법사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 반 대항전 준비래요. 마지막 대항전은 우승으로 장식하고 싶다던데요?”
내 질문에 리제가 친절히 답해줬다.
그렇구나. 승리에 대한 집착이었구나.
‘좆됐다.’
대충 봐도 상당한 열정이 보이는 준비라 절로 식은땀이 났다. 저렇게 풀 파워로 준비하면 사고가 터질 확률도 덩달아 높아진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말년 감찰관 시기, 그 중요한 시기에타국 주요 인사가 피를 흘리거나 기절할지도 모르는 위급 상황이─
‘…재작년에 이미 흘렸잖아.’
생각해 보니 쟤들끼리 싸워봤자 재작년보다 심하게 다치지는 않겠네.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