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18)
로판 속 공무원 518화(519/945)
제국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대륙의 어떠한 국가보다 강인한 나라, 대륙의 중심에 서서 모든 것을 주도하는 나라, 신의 총애를 받아 천명을 수호하는 나라, 한 시대에 둘이나 존재할 수 없는 존엄한 나라.
이 모든 이름이 오직 제국을 위해 존재하는 영광이자 찬양이다. 아무리 강성한 왕국이라도 명목상으로나마 제국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며, 크펠로펜 제국이 망국을 눈앞에 두던 시절에도 대륙 각국은 ‘나름’ 예의를 차렸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름이었지만.
헌데 상황이 즉위하면서 제국은 다시금 부흥하였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북방까지 통합하며 제2의 전성기가 시작되었음을 과시했다. 제국과 제국인의 자부심이 하늘을 뚫은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제국 학생들은 반 대항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류티스, 라테르와 같은 반인 가여운 학생들이나 타국 출신 학생들은 승리를 위해 광전사가 되었지만, 제국 학생들에게 있어 반 대항전은 전통적으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적당히 놀다 보면 가장 고귀한 신분의 학생이 있는 반이 우승하는 놀이니 힘을 뺄 이유가 없지.
결정적으로 제국 학생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아인테르가 침묵했다는 게 가장 큰 요인이었다. 황족을 대신하여 구심점이 되는 건 조금 무엄한 냄새가 나잖아.
“제국 만세! 승리 만세!”
“제국! 무엇보다도 제국! 모든 국가 위의 제국!”
그렇기에 아인테르의 승리 선언은 그동안 고요하던 제국 학생들이 폭발하는 계기가 됐다. 어느 나라보다도 위대한 제국, 누구보다도 고귀한 황족이 승리를 외치며 앞장서? 이걸 따르지 않는 제국인은 매국노 예비군일 터.
‘돌아버리겠네.’
순식간에 광기에 휩싸인 제국 학생들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못 막는다. 차라리 아인테르가 황제의 육촌이나 칠촌 같은 먼 황족이면 자제해달라고 슬쩍 말이라도 꺼냈을 텐데, 아인테르는 황제의 유일한 동생이라 권위도 빵빵하다. 아무리 내가 온갖 직함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도 황족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막는 건 불가능하다.
‘개새끼…’
그렇기에 아인테르 옆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는 에리히를 노려봤다.
다 저 새끼 때문이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던 아인테르에게 헛바람을 불어넣은 만악의 근원, 안 그래도 바쁜 형에게 흉악한 짬을 때린 사악한 동생.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싶지만, 저 새끼도 나한테 잘못 걸리면 다시 목이 졸릴 거라는 걸 눈치챘는지 아인테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기 목숨 챙기는 지성의 반만 형을 위해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제국의 땅에서 제국이 패배하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손님을 정중히 대접하되, 승리하는 건 언제나 제국입니다!”
“와아아아!”
“이드라펜 후작 각하 만세! 리브노만 황가 만세! 크펠로펜 제국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더욱 우렁차게 울리는 만세 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78년도 시즌 부원들이 그립다…
멍하니 관중석에 앉아 경마 경기를 구경했다. 호쾌하게 질주하는 말들을 보니 씁쓸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 이리나 요룬 선수! 올해도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린의 모습에 더더욱 마음이 풀렸다.
장하다, 우리 린. 형의 속을 썩이기만 하는 못난 동생 새끼보다 우리 린이 백배, 천배 낫구나. 나한테 필요한 건 에리히 크라시우스가 아니라 이리나 크라시우스였어.
“볼 때마다 신기해요. 평소에는 꽃꽂이를 즐겨하면서 승마도 잘 하고.”
리제도 3년 연속 1위를 차지한 린의 기염에 놀랐는지, 위닝런을 하는 린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그건 나도 신기하다. 상단을 운영하는 요룬 가문의 영애고, 동아리도 원예 동아리라 다소곳하며 이지적인 이미지가 강한 린이다. 그런 린이 승마복을 입고 질주하는 걸 보면 뭔가 기묘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좋게 말하면 문무겸비라고 할 수 있으니 싫지는 않지만. 연인이 잘 났다면 오히려 기뻐할 일이지.
– 이리나 요룬 선수가 개막 경기에서 승리하며, 제국이 앞서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시발.’
그 와중에 안내 방송은 린의 반이 아닌 국적을 언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안 그래도 제국이 아르메인-유벤 양강 구도에 난입해서 미치겠는데, 거기서 국적을 강조하면 기름만 끼얹는 꼴이잖아.
‘저 새끼도 제국인인가?’
그래, 안내 방송 중인 사회자도 아인테르의 승리 선언에 홀린 충성스러운 제국인일 거다. 분명 그럴 거다.
그게 아니면 이 만행을 설명할 수 없다. 저 방송이 타국인의 입에서 나온 거라면 제국 아카데미에 소란을 일으키려는 프락치의 행동이니까.
“오라버니.”
“난 괜찮아.”
리제가 조심스레 내 손을 잡자마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하지만 너무 반사적이었다.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을 정도로.
“리제야.”
“네, 오라버니.”
“갑자기 나 안 보이면 근신 먹은 걸로 알아줘.”
그 말에 리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 재작년의 악몽을 떠올리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
장관이 올린 보고서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하.”
이윽고 짧은 웃음이 터졌다.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인테르가 전면에 나서다니.’
정말 의외인 상황이다. 2황자─ 라는 칭호도 아까운 도르고스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도르고스에게 밀려 있는 둥 없는 둥 지냈고, 내가 황태자가 된 이후로는 내 눈치를 보며 죽은 듯이 지낸 아인테르다. 그런 아인테르가 귀족들 앞에 나서서 구심점이 됐다고?
‘이제 몸을 사리지 않는구나.’
기꺼운 일이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아인테르가 마침내 자신의 뜻을 가지고 일어섰다. 더 이상 아인테르에게 있어서 나는 자신의 목을 노리는 괴물이 아닌 황제에 불과하다.
물론 황제라는 이름이 가볍지는 않기에 여전히 내 눈치를 살피기는 하겠다만, 예비 살인자의 눈치를 보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할 터.
‘이렇게 조금씩 나아가는 거지.’
아인테르가 점점 정상적인 황족이 되면, 나와 살가운 형제가 되지 못할지언정 평범한 가족이 될 수는 있을 거다. 황태녀에게도 무난한 삼촌이 될 수 있을 거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아가셨던 상황께서도, 아주 조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으실 거다.
…
‘흐으음.’
그렇게 짧은 감상을 마치고 다시 보고서를 훑어봤다. 개인적인 기꺼움과 별개로 장관이 급히 올린 보고서인만큼 진지하게 확인하고 지침을 내려야 한다.
‘별일 없겠군.’
허나 아무리 봐도 내가 개입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제국 학생들이 승리를 위해 일어난 것? 만약 타국 학생들을 퇴학시키자며 폭동을 일으킨 거라면 개입해야겠지만, 아카데미 공식 행사에서 이기자고 일어난 평범한 학생들이다. 학생으로서 아카데미 행사에 열의를 가지는 게 뭐 그리 잘못된 일인가.오히려 제국의 이름을 드높이려고 하는 것을 치하해야 한다.
다만 장관의 우려처럼 학생들의 열정이 과하여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왕족들만 다치지 않으면 된다.’
장관이 아카데미에 있는 목적은 ‘타국 주요 인사들의 안전을 위한 아카데미 치안 유지’지, ‘아카데미 안전 유지’ 자체가 아니다. 학생들끼리 주먹다짐을 하는 사고가 터지더라도 왕족들만 끼어있지 않으면 상관없다.
그리고 조금 과격한 말이지만,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법이라는 말도 있으니.
***
언제나 그렇듯 황제는 나에게 도움이 아닌 도발을 날렸다.
– 후배들이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졸업하고자 하는데, 그걸 만류하는 건 선배로서 도리가 아니다.
“폐하. 전 선배가 아닙니다.”
– 이런, 그랬었지. 짐이 잠시 착각했어.
이 개 같은 새끼.
쌍욕이 절로 입안에 맴돌았다.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어.
– 그리고 반 대항전은 매년 치뤄진 아카데미의 전통이고, 외부인도 아닌 학생들이 열의를 가지며 참가하는 상황 아닌가.
하지만 뒤이은 황제의 말에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이었던 쌍욕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맞는 말이다. 반 대항전은 갑자기 생긴 일정이 아니며, 참가자들도 늘 아카데미에 있던 학생들이다. 철저히 아카데미와 제국의 관리하에 놓인 요소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요소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제국이 개입한다? 기껏 하늘까지 끌어올린 아카데미와 제국의 위상에 흠집이 갈 수 있는 일이다.
– 물론 타국에서 온 귀빈들이 자국의 행사에 휘말려 다치는 건 안타까운 일이겠지. 그 점은 장관이 잘 할 거라 믿네.
“예, 폐하. 심려치 마소서.”
통신구를 향해 고개를 숙이기 직전, 나를 빤히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 눈빛은 마치 ‘반 대항전의 어떤 사고보다 네가 아르메인 왕자를 줘 팬 사고가 더 컸다.’ 라고 욕을 하는 것 같았다.
‘망할.’
이래서 사람이 죄를 짓고 살면 안 되는구나. 단순히 쳐다보는 걸로도 찔리네.
반 대항전 둘째 날이 되었다.
“제국이여! 모든 것 위에 서는 제국이여! 누구보다 강력한 제국이여!”
“너, 아르메인이여! 사자의 용맹을 보여라!”
“세상을 바꾸는 건 무력이 아닌 지혜일지니! 유벤의 현자들은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단체 응원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와.’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저 응원가로 인해 경기에 참가하지 않는 단순 관중들마저 반 대항전의 광기에 침식되고 말았다.
게다가 선두에는 응원단장 비스무리한 존재들도 보였다. 이것들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본격적이야.
“장관님…”
작게 한숨을 내쉬며 광란의 응원 현장을 보는 사이, 퍼플 리트리버가 어기적어기적 다가왔다.
“저… 지금 자퇴해도 추천장 주실 거죠…?”
상당히 가슴 아픈 질문과 함께.
“…졸업까지 버티면 내가 책임지고 밀어주마.”
“으으윽…”
결국 퍼플 리트리버의 눈망울에는 미약한 물기가 보였다.왠지 티티를 울린 기분이라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도 내가 진짜 너 졸업하면 어디를 가든 밀어줄게. 내가 그 정도 힘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