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20)
로판 속 공무원 520화(521/945)
어느덧 반 대항전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기.
“흐으음.”
대운동장에 자리 잡은 점수판을 보며 턱을 매만졌다.
아인테르가 속한 반은 여전히 1등이고, 나와 라테르의 반은 동점으로서 공동 2위인 상황이다. 반 대항전의 시작을 알린 경마 경기부터 지금까지, 이 지루하고 치열한 삼파전은 변하지 않았다.
‘두 번 연속으로 이기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아주 미세한 차이로 앞서나가는 아인테르의 반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경기 하나를 가져가면 1등을 차지할 수 있고, 거기서 한 번 더 이기면 굳히기에 돌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론으로는 누구나 우승자가 될 수 있는 법. 애석하게도 현실은 이론과 달랐으니, 라테르를 누르고 단독 2등은 차지했지만 1등의 자리에는 오르지도 못했다. 내가 이기면 쟤가 이기고, 쟤가 이기면 다른 놈이 이기는데 2연속은 무슨.
‘지독한 놈들.’
슬쩍 뒤를 돌아보자 단체로 어깨동무를 하며 응원가를 외치는 제국 학생들이 보였다.
하필 숫자도 많은 것들이 능력도 좋아서 틈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압도적 소수에 불과한 아르메인 학생들이 근소 열세인 상황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선전하는 게 아닐까?
그렇기에 더욱 아쉽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끝에 이를 것 같다.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를 잡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로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에리히가 이탈했지.’
이 지옥 같은 삼파전을 만든 주범, 아인테르를 부추긴 흑막이자 몸을 쓰는 경기라면 빠지지 않은 제국의 선봉대장.그런 에리히가 반 대항전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말았다.
사유는 별거 없다. 타국 학생들과 드잡이질을 하다가 고문 선생에게 발각되었다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분개한 고문 선생에게 목이 졸려 기절했다고 한다.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
아무튼 고문 선생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에리히는 일개 관중 겸 환자로 격하되었고,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던 제국 학생들의 응원도 한결 누그러들었다. 아무리 흥이 넘치는 학생이라도 고문 선생에게 얻어맞고 싶지는 않을 터.
‘이걸로 4인전에서 이길 확률이 늘어났다.’
도로 점수판으로 시선을 돌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제국의 선봉대장인 에리히가 이탈했고, 아인테르의 실력은 아직 나보다 아래다. 심지어 선수들에게 정신적 압박을 주는 제국 학생들의 응원도 조금은 부드러워졌으니─ 반 대항전 마지막 경기인 4인전에서 아르메인이 이길 확률이 늘어났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2연속 승리로 1등을 굳히기 어렵다면, 그냥 마지막에 승리하면 그만이다. 반 대항전 자체가 끝나면 1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지 않나.
‘마지막 승리로 최종 우승이라.’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것만큼 멋진 그림은 없지.
용맹한 아르메인의 기사가 제국의 횡포에 굴복하지 않고 버텼다. 그 처절한 인내 끝에 당당하고 고귀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역시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복이 오는 법.
“류티스.”
“응?”
그렇게 4인전에 참가할 예정인 학우들과 수련이라도 할까 고민하는 사이, 바로 옆에서 라테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라테르. 언제 온 거지?”
“아까부터 있었다.”
단호한 대답에 조금 민망했다. 기사도 아닌 마법사가 다가올 동안 인기척 하나 느끼지 못하다니. 너무 우승에 정신이 팔려 있었나?
이윽고 작게 실소가 나왔다. 고작 아카데미 행사에 이렇게 열을 올릴 줄 누가 알았겠나. 재작년과 작년에도 승리를 위해 노력하기는 했으나, 이렇게 진심으로 임한 건 처음이다. 하여간 에리히 그 녀석이 우리에게 멋진 졸업 선물을 안겨줬어.
“다음 경기가 있으니 용건만 말하도록 하지. 너도 에리히 소식은 들었나?”
“하하,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더군! 간호실 침대에 누워있다고 하던데?”
정작 선물을 준 당사자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는 듯, 먼 곳에 있다는 게 유쾌한 일이지만.
그래도 세라의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고 있다고 하니 억울하지는 않을 거다. 솔직히 에리히가 고문 선생에게 무력 제압을 당한 건 스스로 자처한 결말이기도 하고.
‘형의 명치를 찌르는 동생이라니.’
다시 웃음이 나왔다. 만약 크라시우스 가문이 왕가였다면 에리히가 왕세자 자리를 노린다는 얘기까지 나왔을 거다. 그만큼 이번 에리히의 돌발 행동은 고문 선생에게 있어 치명타였으니까.
물론 우리는 재밌으니 넘어갔다. 고문 선생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아카데미 학생으로서 아카데미 행사를 즐기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나.
“객관적으로 아인테르의 현 실력은 우리와 견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에리히가 빠졌다면 나와 너의 대결이 되겠지.”
“뭐, 그렇겠지.”
나도 하던 생각이라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1, 2년 정도가 더 흐른 후라면 모를까, 막 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인테르는 우리를 상대할 수 없다.
아인테르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이건 인간이라면 거스를 수 없는 시간적 문제다.
“그리고 4인전의 점수는 다른 경기들보다 많다. 괜히 다른 경기에서 힘 빼지 말고 4인전에서 마무리를 짓는 건 어떻겠나.”
“오.”
상상도 못한 말이라 감탄사가 나왔다.
라테르가 4인전에 나온다는 말에 놀란 건 아니다. 라테르가 4인전에 출전하는 건 논할 필요도 없는 상수니, 오히려 불참을 선언했다면 놀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감탄을 내뱉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당당히 선전포고했다가 지면 어쩌려고 그래?”
그 라테르가 나에게 다가와 정식으로 승부를 걸었다. 동아리실에서 체스로 도전하는 수준을 넘어,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4인전에서 승패를 가리자.’ 라는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성과 품위를 추구하는 라테르답지 않은 방식이지만,
‘마음에 들어.’
기사로서는 무엇보다 기꺼운 선언이다. 숙적의 공개적 선전포고만큼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건 없지.
“질 거라 생각하고 전장에 임하는 장군이 있나?”
“하핫!”
더욱 마음에 드는 말이 나왔다.
“좋아. 4인전에서 이기는 쪽이 전부 가져가는 걸로 하자고.”
명예와 영광, 환호, 그 모든 것을.
─라고, 굉장히 멋진 모습으로 라테르와 헤어진 게 방금 전 일 같았는데.
‘꿈인가.’
경기장에 올라오는 아인테르의 반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정확히는 아인테르와 함께 올라오는 참가자 중 한 명을 보니 헛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고문 선생이 왜.’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경기장에 발을 딛는 검은 머리의 사내.
재작년, 4인전을 화려하게 끝낸 승리자가 다시금 학생들 싸움에 끼어들었다.
‘…망할 에리히.’
혹시 이게 네 계략이었나? 동생인 네가 빠지는 대신 형인 고문 선생을 넣으려는 자기희생?
정말 그런 거라면 에리히도 어지간히 미친놈이 맞다. 아니면 고문 선생이 에리히의 목을 조르다가 머리를 잘못 건드렸거나.
***
아카데미 반 대항전이 국가의 자존심을 건 애들 싸움이 됐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야 현장에서 직접 선수이자 관중으로 활약 중인 애들은 귀족가의 자식들이고, 그 자식들이 가문과 연락을 하면 소문이 퍼지는 것쯤이야 금방이다.
그렇게 제국 전체는 물론, 타국에도 반 대항전 소식이 알음알음 퍼지면서 재앙이 시작됐다.
– 야, 요즘 아카데미가 난리라던데.
“언제는 조용했던 것처럼 말하십니다.”
시작은 장관이었다.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에리히에게 진심 초크를 걸었던 그날 밤, 장관에게서 비웃음 섞인 안부 연락이 왔었다.
– 뭐,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카데미 얘기만 하는데 어쩌겠냐. 제국을 이끌어 갈 미래들이 타국의 학생들과 우호를 다지며 제국의 기량을 뽐내고 있으니, 아름다운 선례로 남을 거라며 기대가 많더라고.
그리고 뒤이은 장관의 첨언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장관이 만나는 사람들이라면 같은 장관급 인사들이거나 못해도 백작 이상은 되는 고위 귀족이다. 제국의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인사들 입에 반 대항전이 오르내리고 있으며, 아름다운 선례를 바라고 있다.
물론 아름다운 선례가 무엇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제국의 승리지 않겠나.
실로 곤란한 일이었다. 단순한 애들 싸움이 어른들도 관심을 가지며 어깨를 으쓱이는 일이 되어버렸다.
“학생들의 일이니 학생들이 알아서 하겠죠. 저희는 그저 응원만 하면 되는 거고요.”
– 그렇기는 한데, 언제나 이성과 마음은 다른 법이지.
장관은 그 말을 끝으로 적당히 안부 인사만 나누다가 연락을 끊었었다. 마치 제국의 여론을 나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처럼.
그날 이후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국 수뇌의 눈과 귀가 아카데미에 향했다면, 이건 단순히 ‘타국 귀빈의 안전 확보’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제국의 자존심을 위하여 제국의 승리를 이끌어야 하는 빅-이벤트인 거다.
‘알게 뭐야.’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은근한 기대를 외면하며 최대한 버텼다.
제국의 수뇌가 승리를 바란다고? 나는 뭐 말단인 줄 아냐. 하필 위에 있는 유일한 새끼가 황제라 개처럼 구르는 거지, 나도 어디 가면 떵떵거리는 실세이자 거물이다. 괜히 개입해봤자 ‘애들 싸움에 다 큰 어른이 끼어든다.’ 라는 말을 감수하며 남들이 바라는 걸 들어줄 이유는 없다.
만약 반 대항전의 승리가 국익으로 이어지는 일이거나, 다른 사람들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라면 고려해 봤을 거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잖아. 이겨봤자 단순히 자존심만 세우는 거고, 지더라도 피해를 입는 사람은 없다. 그저 아쉽기만 할 뿐.
– 장관.
“예, 폐하.”
– 상황 폐하께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셨네. 아직 젊은 친구들이 제국의 명예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보기 좋다 하시더군.
“…….”
허나 평온한 두덕리 온라인을 즐기던 상황마저 관심을 보인다는 말에 모든 걸 포기했다.
상황이 바란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해야 한다. 비록 양위를 하며 공식적인 권력은 전부 손에서 놓은 상황이나, 그 권위와 명예가 제로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망해가던 제국을 부흥시킨 명군을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좆됐다.’
문제는 내가 제국의 주요 전력이던 에리히를 강제 이탈시켰다는 거였다.
그동안의 경험상 마지막 4인전의 승리자가 최종 우승을 할 것 같은데, 에리히 없이 아인테르만 있는 제국 진영은 류티스나 라테르를 상대하기 어렵다. 내 손으로 제국의 승리 가능성을 찢어발긴 것이다.
제국의 신하가 제국의 승리를 방해했고, 그 소식을 접한 상황이 아쉬움을 표한다?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미래다. 그 미래를 피할 수 있다면 애들 싸움에 끼어든 어른이 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문 선생… 대체 왜…”
“나도 사정이 있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재작년에 4인전에 참가한 것처럼 올해도 4인전에 참가하고 말았다.
미안하다, 류티스.
‘이게 공무원의 사정이다.’
너 같은 왕족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할 차가운 현실이지.
시발.
***
모든 걸 건 마지막 승부는 고문 선생이라는 괴물의 난입으로 제국의 승리가 되었다.
난데없는 외부인의 난입에 소란이나 이의가 제기될 수도 있었으나, 다수를 차지하는 제국 학생들은 제국의 승리가 마냥 기쁜지 우렁찬 박수와 환호를 내질렀다.
게다가 반발해야 할 타국 학생들마저 고문 선생의 화려한 검술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내기 바빴다. 아마 고문 선생도 반발을 막기 위해 스스로 광대 역할을 한 것이겠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나.’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경기장 아래로 내려갔다. 마지막을 승리로 장식하는 건 실패했지만, 아득한 고수인 고문 선생에게 가르침을 얻었으니 검의 길을 걷는 자로서는 성공적인 결과다.
다만 나처럼 검사가 아닌 마법사인 라테르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
“3등. 어디 가는 거지?”
뒤에서 들리는 라테르의 목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뭐라고?”
“3등이라고 했다.”
겨우 고개를 돌리며 라테르를 바라보자, 픽 웃음을 흘린 라테르가 턱으로 점수판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라테르의 말처럼 내가 속한 반이 3등, 라테르의 반이 2등이었다.
“네가 나보다 먼저 쓰러져서 그런지, 내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내가 이긴 것 같군.”
말도 안 되는 논리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리 둘 다 사이 좋게 고문 선생에게 패배한 입장인데, 누가 이기고 지고가 어디 있나.
“이번 승부는 애매했지. 그러지 말고 다음에 다시 붙─”
“미안하지만 패자하고 다시 승부를 가리고 싶지는 않군.”
…
‘저 파랑이 새끼가.’
순간 누군가를 진심으로 증오하는 법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