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21)
로판 속 공무원 521화(522/945)
반 대항전이 끝난 이후의 아카데미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
실로 기이한 일이다. 분명 온갖 응원전과 신경전, 벤치클리어링을 주고받았던 학생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정작 그 학생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고 떠들고 있다.
‘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였나.’
이쯤 되면 합리적 의심이 든다. 사실 국가의 자존심 따위는 알 바 아니고, 합법적으로 광기와 스트레스를 표출할 수 있는 판이 깔려서 정신을 놓았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착잡하기 그지없다. 저것들이 반 대항전을 국가 대항전으로 만들어버린 탓에 나는 팔자에도 없던 용병 겸 광대 노릇을 하지 않았나. 에리히의 속삭임에 넘어간 아인테르가 학생들 앞에 섰더라도, 학생들이 조금이나마 자제했다면 아카데미 전체가 광기에 먹힐 일은 없었다.
그런데 판을 키웠던 것들이 이제 와서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망할 놈들.’
자기들은 즐길 만큼 즐겼으니 됐다 이건가.
‘그래도 무사히 끝나서 망정이지.’
얼음을 띄운 커피를 들이키며 속을 진정시켰다. 과정이 존나게 존나 추하고 다이나믹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결과는 양호했다.
일단 류티스와 라테르, 타니안 같은 타국 주요 인사들은 상처 하나 없이 깔끔했다. 심지어 일반 학생들도 열정적으로 경기에 임한 것을 고려하면 큰 상처가 없었으니, 가장 큰 부상자가 나에게 무력 진압당한 에리히일 정도였다.
결정적으로 국가의 자존심 대결에서 제국이 승리했다. 덕분에 반 대항전에 관심을 가지던 높으신 분도 흡족히 고개를 끄덕이셨지.
– 온전히 학생들의 손으로 승리를 거둔 건 아니지만, 장관이 규칙을 어기고 참가한 것은 아니지 않나. 상황 폐하께서도 제국의 정당한 승리에 기뻐하셨네.
“소신이 상황 폐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어 황송할 따름입니다.”
과정이 조금 오묘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승리는 승리다. 황제의 말처럼 내가 없던 규칙과 전례를 내세운 것도 아니잖아. 난 이미 재작년에 합법적으로 4인전에 참가한 경력이 있었다고.
‘왜 그딴 경력이 있어가지고.’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아카데미 재학 경험도 없는 놈이 4인전에는 두 번이나 참가했다고? 어지간히 열정 넘치는 학생들도 그런 기록은 못 세우겠다.
‘이건 명예 졸업장 받아야 한다.’
아니면 명예 교사증이거나.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제발 뭐라도 줘. 빈손으로 졸업하면 나 미칠지도 몰라.
말년에 떨어지는 낙엽 뭉치를 정통으로 맞은 것에 대한 보답인지, 남은 2학기 일정은 아무 소란 없이 흘러갔다.
솔직히 반 대항전 때 그 난리가 생기고도 다른 사건이 터지면 신의 저주를 받은 거 아니겠냐.올해 들어 신의 저주는커녕 축복만 잔뜩 받고 있는 상황이라 다행일 따름이다.
‘…축복을 받았는데 이딴 일이 터졌다고?’
문득 등골이 오싹해졌다. 축복을 받고도 이 지경으로 굴렀는데, 축복마저 없었다면 대체 무슨 일이 생겼을까. 왕족이 피를 토하는 수준을 넘어 사지가 잘렸을까? 아니면 의식불명의 중상?
있어서는 안 될 미래를 상상하다가 쿠키로 긴급 당분 보충을 했다. 이 이상 옳지 않은 미래를 엿보았다가는 멘탈이 무너질 게 분명하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넘쳐나는데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지.
‘이제 조금만 버티자.’
그렇기에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2학기의 유일한 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 반 대항전도 끝났으니 졸업식까지는 금방이다. 아주 조금만 버티면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응?’
전역 날짜를 헤아리는 말년 병장에 빙의하려던 찰나, 품 속의 통신구가 빛나기 시작했다.
혹시 이번에도 장관인가 싶어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4인전에 참가하여 애들 상대로 검을 휘둘렀다는 소식을 접한 뒤부터 장관은 거의 매일 연락을 걸며 비웃기 바빴다.
망할 노친네. 그쪽도 내 입장이었으면 애들 상대로 주먹 휘둘렀어.
– 주인님!
“집사?”
그리고 연락을 건 상대가 장관이 아닌 집사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불안하다. 집사가 먼저 연락을 건 것도,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급히 말을 꺼내는 것도 심상치 않은 조짐이─
– 마, 마님, 첫째 마님께서 진통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어?”
상상 이상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라 머리가 새하얘졌다.
***
처음 겪는 임신이지만 심적으로 불안하지는 않았다.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언제나 칼이 구해다 줬고, 내가 먼저 아이를 가진 것에 질투할 수 있는 언니들과 동생들도 자기 일처럼 나와 첫눈이를 챙겨줬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작은 주인님이 태어날 거라는 사실에 기뻐했으니, 첫 임신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부인,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네, 전혀 없어요. 고마워요.”
심지어 황후궁에서는 황후 폐하가 황태녀 전하를 품고 계셨을 때, 옆에서 충실히 보필한 시녀들을 몇 명 보내주셨다. 능력과 신분, 성품이 철저히 보증된 인재들이 옆에 붙어있으니 무언가 문제가 생기려고 해도 생길 수 없었다.
지금도 배가 크게 부푼 나를 위해 팔과 다리에 마사지를 해주고 있을 정도니까. 사실 첫눈이가 무럭무럭 자란 후부터는 움직이기도 쉽지 않아 온몸이 뻐근했는데, 이미 임산부를 보필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바로 알아차렸다.
딱 적당한 강도라 스르륵 눈이 감길 정도였다. 이대로 칼이 퇴근할 때까지 낮잠이라도 잘까?
“흐으읏─!”
“마, 마님!?”
“부인!”
그리고 나른했던 몸과 정신이 갑작스레 찾아온 통증 때문에 번쩍 뜨였다.
그 뒤의 일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비명 같은 신음을 흘리는 나를 겨우겨우 일으키던 시녀들, 사방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용인들, 급히 통신구를 꺼내던 집사.어렴풋한 행동과 모습만 눈에 들어올 뿐, 나에게 건네는 말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하나, 딱 하나만큼은 들을 수 있었다.
“소가주께서 태어나실 겁니다! 의사, 사제, 마법사─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다 부르세요!”
첫눈이가 생각보다 성질 급한 아이라는걸.
‘첫눈은 아직인데.’
우리의 첫눈은 네가 되겠구나.
고통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
급히 타일글레헨 백작령에 있던 가문의 마법사를 호출했다. 하필 트릭시가 수업 중이라 텔레포트로 이동하려면 가문의 마법사가 필요했다.
“내가 정신이 없으니 두 분께는 자네가 전해주게.”
“예, 각하. 반드시 그럴 터이니 염려치 마십시오.”
나를 저택 앞에 떨궈준 마법사를 향해 빠르게 입을 열자, 마법사도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첫눈이가 마르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사실은 부모님께도 알려야 하는 귀중한 정보. 그러나 지금 심정으로는 도저히 두 분께 정상적으로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직도 손이 벌벌 떨리는데 무슨 수로.
그렇기에 정보 전달은 마법사에게 맡겼다. 마법사가 가문으로 복귀하면 어머니께 보고할 테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알려주실 것이며, 아버지는 장인어른께 전달하실 터.
“주인님!”
아무튼 마법사를 뒤로하고 저택으로 들어가자 집사가 황급히 달려왔다.
“두, 둘째 마님은 어디 계십니까?”
“수업 중이라 나 먼저 왔어. 통신구에 문자 남겼으니 끝나면 바로 올 거야.”
홀로 복귀한 모습에 당황한 집사의 어깨를 다독이니, 집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가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트릭시의 임신이 확정된 이후로 처음 본다. 매번 내 아이와 관련된 일에 자기 일처럼 동요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지. 이렇게 충성스러운 사용인이 어디 있겠어.
다만 감동적인 집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은 도저히 가라앉지 않았다.
‘아직 11월 중순인데.’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훑으며 머리를 굴렸다.분명 1학기가 시작하기 직전에 마르가 4주 판정을 받았으니, 대충 11월 말이 마르의 출산 예정일이다.
하지만 사람의 몸이 기계가 아닌 이상 딱 10개월에 맞춰 아기가 태어나지는 않을 터. 11월 말은커녕 10월 말만 돼도 첫눈이가 태어나기에 문제가 없다. 그 당연한 사실을 반 대항전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아니, 핑계다. 남편이자 예비 아빠가 출산을 잊는다는 게 말이 되냐. 그냥 11월 말이라는 사실에 홀려서 방심하고 있었던 거다.
“마르는 괜찮아?”
“진통이 시작되자마자 최고의 인력을 불렀습니다. 황후궁에서 온 시녀분들이 계셔서 순조롭게 준비가 가능했습니다.”
적어도 환경은 최고라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황후궁에서 사람이 왔을 때는 너무 과한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그 배려가 신의 한 수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역시 어디 사는 노랭이와 달리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다.
“그럼 지금 당장─”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집사의 단호한 선언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주인님이 방으로 들어가시면 의료진에게 심적 부담과 변수를 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막 아카데미에서 오셨으니 청결 문제도 있고요.”
“나 더러워…?”
“저보다는 깨끗하시지만 임산부의 입장은 일반인과 다른 법이지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침통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막말로 내가 마르 옆에 있어봤자 도움이 되는 건 없고, 방해만 될 확률이 높다.
“무사히 끝나겠지?”
그래도 납득하는 것과 걱정은 별개의 문제.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자 집사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에넨의 가호가 있을 겁니다. 다름 아닌 두 복자의 자식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전혀 안 놓인다.
“───! ───!!”
“──!”
문 너머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에 입술만 짓씹었다.
불안하다.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잘 진행되는 거 맞아?
‘괜찮을 거야.’
애써 불안감을 털어냈다. 2과장도, 황제도 무사히 자식을 보지 않았나. 나도 마찬가지일 거다. 첫눈이도 무사히 이 세상에 태어날 거다.
집사의 말처럼 복자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잖아. 에넨이 그런 아이를 외면할 리는 없어.
‘제발.’
마르도 첫눈이도 건강하면 위리디아에 대성당 규모로 교회 하나 지을 테니까, 제발.
“칼.”
“…트릭시.”
내 손을 쓰다듬는 손길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걱정하지 말렴. 아무 문제도 없으니까.”
아까부터 말없이 방문을 보던 트릭시의 선언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트릭시는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존재. 그런 트릭시가 확언하는 거라면 둘 다 건강하다는 거겠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리고 저 안에 있는 의사와 사제가 누군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마법사는 잘 안단다. 출산과 관련해서는 그 아이보다 뛰어난 아이가 없을 정도야.”
연이은 위로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리제와 린, 행정부의 노예인 에리와 피네마저 저택에 모였다.
“백작 각하!”
슬슬 이성이 초조함에 완전히 먹히기 직전,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온 시녀가 무어라 입을 열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굳이 들을 필요도 없었다.
“으에에에에에엥!”
방에서 들리는 울음소리가 모든 걸 설명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