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22)
로판 속 공무원 522화(523/945)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결혼을 했을 때는 세상이 나를 축복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자식이 태어났을 때.
“멋진 도련님입니다.”
마치 세상이 멈춘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분명 기쁜 일이다. 마르의 임신을 알게 된 날부터 고대했던 순간이고,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었던 내 아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왜 입이 열리지 않는 건지, 왜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첫눈이.’
내 아이, 나와 마르의 아이.
치열했던 출산 현장을 증명하는 것처럼 땀에 젖은 황후궁 시녀는 빙긋 웃으며 나에게 첫눈이를 보여줬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쭈글쭈글하고, 붉은 기운을 띠고,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방이 떠나가라 우는 첫눈이를.
“둘 다, 괜찮나?”
“예. 부인께서 지치기는 하셨지만,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겨우 입을 열고 내뱉은 말에 시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순간 다리의 힘이 풀릴 뻔했다. 내 앞에 있는 첫눈이도, 수 시간 동안 고생한 마르도 아무 문제가 없다. 문밖에서 얼마나 바라고 바랐던 소식이던가.
“각하, 어서 안아보시지요. 도련님도 저보다는 각하의 품을 좋아할 겁니다.”
그 말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떨리기 시작했다.
‘안아?’
저 아이를? 저 조그맣고 가녀린, 잘못 건드리면 사라질 것 같은 아이를?
그래도 괜찮을까?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바깥을 돌아다닐 때 입은 옷이라 먼지나 흙도 묻어있을 텐데? 손도 땀에 젖어서 더러울 테고. 그런 몸으로 막 태어난 아이를 안는 건─
“유난 떨지 말고 안아라. 막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 품만큼 따뜻한 게 어디 있겠느냐.”
장인 어른이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내 등을 한 대 치며 지나가셨다. 발걸음이 다급하신 걸 보니 치열한 싸움을 한 마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일 터.
조금 따끔한 터치였지만 덕분에 아득해지던 정신이 돌아왔다.
“그래, 어서 안아보렴. 청결은 걱정하지 말고.”
뒤이어 다가온 트릭시는 내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땀을 흘리며 찝찝했던 몸이 상쾌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 마법이 있었지. 아무리 더러워도 마법 하나면 1급 청정수가 되는 법이지.
“그, 그럼, 잠깐만.”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첫눈이를 건네받았다.
가볍다. 너무 가볍다. 과장을 좀 보태면 수련 때 사용하는 목검보다도 가벼운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정말 그보다 가벼울지도 모른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작은 애가 마르의 품에서 발길질을 하고, 툭하면 뭔가를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린 거였구나. 이 작은 녀석이 우리 가족과 저택의 사용인들을 벌벌 떨게 만든 거구나.
“칼.”
그렇게 멍하니 첫눈이를 보는 사이, 아버지가 다가와 입을 여셨다.
“축하한다. 이제 너도 아비가 되었구나.”
“아비…”
아버지의 말에 다시 첫눈이를 바라봤다. 마르가 나를 남편으로 만든 것처럼 이 아이는 나를 아비로 만들었다.
이 아이를 시작으로 내 가족들이 점점 늘어날 거다.
“참을 필요 없단다.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슬쩍 입술을 깨물자 어머니가 내 등을 다독이셨다. 장인 어른의 매콤 터치와 달리 마음이 평온해지는 손길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눈물이 나왔다.
그냥 눈물이 나왔다.
아들도 울고 아빠도 우는 기묘한 합창을 마친 뒤.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은 마르에게 첫눈이를 안겨줬다.
“칼을 똑 닮은 아이네요.”
첫눈이를 보며 배시시 웃은 마르는 그런 말을 꺼냈다.
‘닮았나?’
여전히 축축한 눈가를 닦으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직 쭈글쭈글한 저 아이에게서 어떻게 내 모습을 투영하는 거지? 일단 눈코입이 달려있다는 건 닮긴 했는데.
“우리 첫눈이. 건강하게 자라서 훌륭한 소가주가 되어야 한다?”
아무튼 피곤한 몸으로도 첫눈이를 꼭 안고 있는 마르는 물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많은 감정이 섞인 목소리였다. 첫 아이를 봤다는 기쁨, 무사히 태어났다는 안도, 그리고 첫 번째 부인으로서 장남을 낳았다는 홀가분함까지.
‘딸이었어도 상관없었는데.’
예전부터 마르에게 말했지만 자식의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그깟 성별이 무슨 대수겠나. 애초에 작위를 여자에게 물려주는 게 불가능한 세상도 아니잖아.
허나 마르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은근히 아들을 바랐던 모양이다. 트릭시와 현명공, 황태녀의 사례가 있듯 법적으로 여성의 작위 상속이 금지된 것은 아니나, 아들 우선 상속을 내세우며 딸을 배제하는 귀족들이 은근히 있으니까. 그런 만큼 마르도 첫눈이가 아무 잡음 없이 승계가 가능한 아들이어서 마음이 놓인 듯하다.
물론 마르 성격상 딸이었어도 좋아했겠지만. 그냥 안전하게 무난하게 가자는 거지.
“자세히 보니 마르의 얼굴도 보이는구나.”
그 와중에 장인 어른이 흡족스러운 반응을 보여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어딜 보고 닮았다고 하는 건데. 나도 같이 좀 알고 보자. 내가 아빠인데 내가 가장 모르는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이름은 생각해뒀느냐?”
“예?”
“이름 말이다. 건강히 태어난 아이를 계속 태명으로 부를 수는 없지.”
장인 어른의 기습 공격에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사실 생각해두기는 했다. 태어날 아이가 입을 옷이나 장난감도 미리 사두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평생 불릴 이름은 당연히 먼저 정해뒀다.
다만 예전에 있었던 루 사건과 티티 사건 이후로 내 작명 실력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괜히 입 열었다가 조리돌림 당하면 다시 울지도 몰라.
“생각해둔 게 있으면 말해라. 여기 모인 사람이 몇인데, 이상하더라도 금방 좋은 이름을 찾겠지.”
하지만 장인 어른의 위로 아닌 위로에 용기를 얻었다.
그래, 이 자리에는 부모님과 처부모님, 다른 연인들이 전부 모인 집단 지성의 현장이다. 내가 실수를 해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그,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페르디난트라고 지으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부드럽고 무난한 크리스를 생각했었는데, 그건 줄이면 정말 칼 마르 뭐시기가 되어버려 아우스엔 로동자 연대가 출범할 수도 있다.
그래서 페르디난트다. 마침 내 조부는 라인하르트, 아버지는 빌헬름, 동생은 에리히지 않나. 전부 독일식 인명이니 손자도 독일식으로 페르디난트가 좋을 터.
‘잠깐만.’
생각해 보니 왜 나는 칼이지? 독일식으로 맞추면 카를이 맞지 않나?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떠오른 출생의 의문에 슬쩍 어머니를 바라봤다. 우리 형제 이름은 어머니가 지은 거라고 들은 것 같은데.
“좋은 이름이구나. 크라시우스 가문의 선조 중에도 페르디난트라는 이름을 쓰신 분이 계시지. 용맹하고 현명하셔서 지인들의 사랑을 받은 분이란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 시선을 도움 요청이라고 이해하셨는지, 온화한 미소와 함께 내 결정을 지지해주셨다.
‘아무렴 어때.’
그래도 어머니의 미소를 보자마자 출생의 의문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독일이 없는 세계에서 독일식 인명 운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아무렴.
“페르디난트…”
마르도 썩 마음에 든 이름이었는지 몇 번이나 페르디난트라는 이름을 중얼거리며 조심스레 첫눈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오늘부터 첫눈이는 페르디난트 크라시우스다.
***
우렁차게 울던 첫눈이─ 아니, 이제는 페르디난트라는 이름을 얻은 우리 아이는 울다 지쳤는지 잠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된 걸 축하합니다. 올해는 연이어 경사가 생기는 해로군요.”
“손주가 생긴 건 처음이라 아직은 얼떨떨할 따름입니다.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할아버지가 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양육은 부모가 할 일이니, 우리는 잔뜩 귀여워해 주기만 하면 충분하지요.”
아버님과 시아버님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픽 웃음을 흘렸다.
두 분이 정식으로 사돈 관계가 된 후부터, 아버님은 제국백인 시아버님에게 존대를 쓰기 시작하셨다. 공작으로 군림하던 아버님이 황실과 같은 공작들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존중을 보이는 것이 사돈이라는 게 기꺼울 따름. 그만큼 자식들의 혼사에 진심이라는 거잖아.
“물론 초보 부부라 미숙한 점이 많을 터이니, 그럴 때만 조금씩 도와주면 됩니다.”
“가장 어려운 일이군요.”
“새로운 생명을 기른다는 게 늘 그렇지요.”
두 분의 화목한 대화를 듣다가 다시 페르디난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 아이가 내 품에 있었구나.’
아직도 얼떨떨하다. 이 생명이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품에 있었다니. 사람의 몸은 정말 신비롭다.
‘페르디난트.’
그리고 칼이 정상적인 이름을 지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루이제를 줄여서 루, 강아지의 이름을 베아티투도로 짓던 칼이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이야.
살짝 감동했다. 혹시 우리 아이의 이름이 걸린 문제니 각성한 걸까?
“귀엽다아아아…”
짧은 상념은 에르제베트 언니의 목소리에 깨지고 말았다.
“이 귀여운 애가 부장님 아이일 리 없어. 마르 아이가 아니었으면 계속 못 믿었을걸?”
“후후, 그런가요?”
눈을 반짝이는 언니의 모습에 다시 웃음을 흘렸다.
고맙게도 페르디난트는 질투가 아닌 축하 속에서 태어났다. 명실상부한 미래의 타일글레헨 백작의 탄생에 모두가 기뻐했다.
사실 조금, 아주 조금은 걱정했었다. 자기는 아직 결혼하지도 못했는데 자신보다 어린 녀석이 아이를 낳는다면 얼마나 복잡한 심정일까. 그래서 에르제베트 언니나 페넬리아 언니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으으, 너무 귀여워… 일 때문에 피곤했는데 치유되는 것 같아…”
“주인님, 주인님의 아이…”
다행히 그 망상은 나 혼자만의 기우로 끝났다. 처음으로 아이를 가져서 그런지 정신적으로 불안했었나 봐.
‘부끄럽게.’
저렇게 착한 언니들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하다니. 평생을 비밀로 할 부끄러운 기억이다.
“…이러고 아침에 다시 출근해야 되네.”
에르제베트 언니의 중얼거림에 숙연한 감정이 들었다.
벌써 새벽인데 정상적으로 아침에 출근? 그건 너무하잖아.
‘관료는 보통 일이 아니구나.’
칼을 보면서도 느낀 거지만 새삼스레 다시 깨달았다.
우리 페르디난트는 본인이 절실하게 원하는 게 아니라면 관료의 길을 권하지 말자.
“어?”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뒷정리를 하던 소피아가 놀란 듯한 목소리를 냈다.
“와, 눈이다!”
이윽고 소피아와 같이 움직이던 유리스의 말에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새하얀 축복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