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25)
로판 속 공무원 525화(526/945)
은혜도 빚도 모르는 짐승 같은 장관의 모습에 잠시 갈등했으나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다. 이미 마르를 비롯한 가족들과도 이야기가 끝난 상황이고, 다들 그게 좋겠다며 지지해줬으니까.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장관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 부탁을 하는 건 꺼려진다. 아무리 야수의 인성을 지닌 사람이라도 저 사람이 아니면 곤란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더 망설여지네. 야수의 심장도 아니고 인성이라니.
‘됐다.’
그만 생각하자. 장관의 인성이 화려하다는 걸 모르고 산 것도 아니잖아.
“이상한 건 아니니까 편하게 앉아서 들으십쇼. 둘이 왔다가 혼자만 돌아갈 것도 아니잖아요.”
“너라면 믿겠냐?”
직설적인 물음에 잠시 입이 다물어졌다.
만약 내가 갑자기 장관에게 식사 초대를 받고, 장관이 할 말이 있다는 듯한 기색을 보인다면? 장관이 이상한 게 아니라고 해도 순순히 ‘아, 그렇군요.’ 라고 넘어갈까?
‘그건 아니지.’
납득했다. 확실히 나였어도 저랬─
“그래도 뭐, 설마 신혼인 놈이 부인 앞에서 이상한 말을 하지는 않겠지.”
가혹한 팩트로 멘탈을 두드린 장관은 픽 웃으며 팔짱을 꼈다.
망할 노친네. 결국 들어줄 거면서 꼬장부리기는.
***
갑자기 식사 초대를 받을 때부터 무언가 부탁할 게 있다고 짐작했다.
저놈은 상사랑 겸상을 하면 입맛이 떨어진다고 외치던 놈이다. 그래서 재무성 청사에 있을 때도 어지간하면 따로 식사를 했던 놈인데, 막 태어난 아기가 있는 소중한 저택으로 나를 초대한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지. 그게 아무 이유도 없는 평범한 초대라고 믿기에는 저 새끼를 너무 오래 보고 지냈다.
하지만 무언가 있다고 짐작만 했을 뿐, 그 이상은 추리하기 어려웠다.
‘나한테 뭔가 부탁할 급이 아닌데.’
나보다 아래인 놈이라 감히 부탁할 체급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나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인 놈이라 굳이 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솔직히 저놈이 무언가 필요하다면 자체적으로 구하거나 이래저래 얽힌 인맥을 동원하면 충분하다. 아무리 내가 재무성 장관이라 한들 그 이름이 공작보다 고귀하지는 않으니까.
‘뭐지?’
대체 뭐지?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지?
이쯤 되면 은근히 불안하다. 감찰부 시절부터 수시로 내 뒷목을 잡게 한 놈 아닌가. 그런 놈이 이제는 나와 같은 장관(내정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상식을 초월하고 끔찍한 짓을 저지를지 두렵다.
물론 다시 부하로 받을 거냐고 묻는다면 거절하겠지만. 가져갔다가 돌려주는 것만큼 치사한 짓은 없어.
“그게 말입니다.”
내 시선에 뒷머리를 긁적이던 칼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조만간 페디가 세례를 받을 텐데, 대부 없는 세례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페디의 대부를 고르려고 하는데…”
민망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꼴이 심히 거슬렸다. 남의 눈치를 살피거나 정상적인 양심이 있는 놈도 아니면서 이제 와서 뭘.
“그, 페디의 대부를 맡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엉?”
하지만 뒤이은 말에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확실히 저놈이라도 당당히 말할만한 내용이 아니기는 했다.
“아니 그게, 솔직히 제가 이런 부탁을 드릴 사람은 각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전승공 각하께 부탁드리기는 이미 제가 그분 외손녀의 대부고, 가족에게 대부를 맡길 거면 굳이 대부를 세울 필요도 없고, 각하가 나이도 친분도 적당해서─”
내 침묵이 거절의 조짐으로 느껴졌는지, 칼은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미안하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저런 폭탄을 터뜨린 직후에 아무리 입을 열어봤자 그게 제대로 들리겠나.
“칼. 부탁하는 입장에서 그게 뭐예요.”
“아, 응. 미안.”
백작 부인이 칼을 구박하는 것조차 웃으며 보지 못했다. 평상시라면 아내 앞에서 꼼짝도 못 한다며 비웃었을 텐데.
혼란스럽다. 저놈이 나에게 대부 운운하는 것도, 저놈에게 자식이 생겼다는 걸 실감하는 것도,
“부탁드립니다, 각하. 각하가 아니면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저놈이 나에게 고개 숙여 부탁하는 것도. 전부.
“나한테 맡겨도 되겠냐? 후회할 수도 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너하고 온갖 쌍욕을 주고받으며 치고받는 나한테 네 첫 자식의 대부를 맡길 수 있겠느냐고. 고작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고.
“솔직히 내가 애한테 좋은 영향을 끼칠 성격은 아니야.”
“그건 저도 잘 압니다. 안 좋은 영향 받으면서 자란 애가 전데요 뭐.”
이 새끼가 이 와중에도 말 한마디를 안 지네.
“그래도 그런각하니까 맡기는 겁니다. 제가 아는 각하는 좀 투박하실지라도 의무는 다 하시는 분이니까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부끄러운 말을 하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부끄러웠다. 의무는 다 하다니, 혹시 지금까지 내가 아니라 다른 놈하고 일하고 있었나?
“그러니 이번 의무도 다 하실 거라 믿습니다. 약속했잖습니까.”
허나 그 말에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약속, 약속이라.
‘기억하고 있었나.’
이제 이 늙은 놈만 기억하는 추억일 줄 알았는데.
“새끼야, 내가 기억하는 약속하고는 다르잖아.”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픽 웃음을 흘렸다.
“저랑 각하가 아니면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정신 나간 답변에 정말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이 망할 놈.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들어줘야지.
“세례식 날짜 정해지면 말해라.”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부인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부인.”
“네, 말씀하세요.”
“잠시 들르고 싶은 곳이 있는데, 먼저 돌아가겠소?”
그 말에 부인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조금 늦어도 괜찮아요.”
“고맙소, 부인.”
아무것도 묻지 않는 부인의 배려에 살짝 포옹을 나누며 몸을 돌렸다. 둘이 나온 주제에 부인 혼자만 돌아가게 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지금 그 녀석들을 보러 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빌어먹을 놈. 남자는 철이 없어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 달라지는 법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 능글 맞고 뻔뻔한 녀석은 왜 아이를 가지고도 달라지는 게 없는지.
“너희도 그놈 꼬라지를 봤어야 한다.”
홀로 터덜터덜 도착한 묘비 앞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라드, 올리버, 드레이크, 발터, 이드리드, 헤카테.칼이 했던 말과 달리 내 의무를 다하지 못하여 떠나보내야 했던 녀석들. 건방지게 연장자인 나보다 먼저 가버린 녀석들.
“그러니 이번 의무도 다 하실 거라 믿습니다. 약속했잖습니까.”
그리고 칼이 운운했던 약속을 함께 나눴던 녀석들.
“여전히 이상한 말이나 하면서 말이야. 다 지난 약속을 갑자기 들먹이기나 하고.”
묘비에 얹어진 낙엽을 털어내며 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 북방 종군 시절. 칼과 헤카테가 연인이 되었다는 걸 알아챈 그 녀석들은 전쟁이 끝나면 바로 결혼을 하라느니, 자식은 셋이면 될 것 같다느니, 결혼식 음식은 화려하게 준비하라느니 등. 온갖 놀림과 축하를 쏟아냈었다.
“첫 자식은 무조건 내가 대부다.”
그 사이에서 나도 한마디 거들었었지.
“아니, 그건 좀. 애 성격 버릴 일 있습니까?”
“새끼야. 백작이 친히 대부를 해주겠다는데 그걸 사양해?”
“제 첫 자식이면 차차기 제국백입니다. 백작이 대수입니까?”
처음에는 칼이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그놈이 반발할수록 기뻐하는 것들이 다섯이나 근처에 있었다.
“직속 상관 겸 대부? 이야, 그건 못 참지.”
“나라면 없는 자식을 만들어서라도 부탁한다.”
“과장님. 저도 자식 생기면 대부 부탁드려도 됩니까?”
“넌 여자랑 손이나 잡아보고 얘기해.”
“시발.”
점점 분위기가 ‘첫 자식의 대부는 무조건 과장님.’으로 흘러가자 칼은 눈에 띄게 당황했었다. 심지어 헤카테도 은근히 좋아했으니 버틸 수 없었고.
“대신 저 새끼들 첫 자식도 대자나 대녀로 삼아주십쇼!”
“추하다, 이 새끼야.”
혼자 죽을 수 없다는 듯 단체 조건을 내건 것이 놈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아무튼 그랬다. 내 직속 부하 둘이 결혼을 한다길래 그 자식의 대부를 하려고 했고, 하나만 그러면 정이 없으니 다른 녀석들도 자식을 낳으면 대부가 되어주려고 했지. 정작 칼을 제외하면 전부 죽으면서 사라진 약속이 되었지만.
그래, 분명 사라진 약속이었을 터다. 아련한 추억으로 남은 약속이었다.
‘이제는 나만… 기억하는 줄 알았는데.’
낙엽을 털던 손으로 헤카테의 묘비를 매만졌다.
헤카테가 죽으며 반쯤 미쳐버린 놈이었고, 이제 겨우 새로운 사랑을 찾아 일어선 놈이다.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약속을 아직도 기억할 줄은 몰랐다. 먼저 언급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하지만 그때의 약속을 다시금 공유하기 시작했다. 비록 처음 한 약속과는 다를지라도, 약속을 나눈 녀석들은 없을지라도.
‘우리가 새롭게 기억하면 되겠지.’
아무튼 내 부하의 아이는 맞으니까.
칼의 아이는 맞으니까.
“보고 있으면 축하해줘라. 이렇게 살고 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저기 어디쯤에 있을 녀석들에게 말하는 건데 고개 정도는 들어야겠지.
‘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부끄럽게 눈물만 많아졌다.
***
“저기, 칼.”
“응?”
“아까 말했던 약속이라는 게 뭐예요?”
“아, 그거.”
페디를 품에 안은 채 묻는 마르를 향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몇 년 전에 장관 각하가 먼저 제안했었거든. 내가 첫 자식을 낳으면 대부가 되어주겠다고. 잊은 것 같길래 먼저 언급한 거지.”
“엄청 무거운 약속이었네요.”
“그치? 아무래도 늙어서 기억력이 안 좋아졌나 봐.”
낄낄거리며 페디의 볼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마르의 말처럼 그 약속은 무거운 약속이었다. 무려 백작이 여덟이나 모인 자리에서 한 약속이었잖아.
제국백인 나, 일반 백작인 장관, 리브노만 백작인 그 녀석들까지 여덟. 지금에 와서 보면 정말 화려한 라인업이다.
“뭐, 약속이라고 하니 바로 눈치챈 걸 보면 완전히 잊은 건 아니겠지만.”
“후후, 부끄러워서 모른 척하신 게 아닐까요?”
순간 페디를 만지던 손이 멈췄다.
‘부끄러워…?’
아무리 마르의 말이라도 그건 동의하기 어렵다.
그 양반이 내 앞에서 부끄러워하다니. 어디 길바닥에서 맨정신으로 울고 있을 확률과 비등하지 않나.
‘망할.’
갑자기 불안해진다. 설마 진짜 까먹었던 거 아닌가? 그럼 나만 진심이었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서글프기 그지없었다.